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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짧은 소설] 모래가 되는 꿈

<월간 채널예스> 202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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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에 모래바람이 잔뜩 불어와 들창 앞에 쌓였다. 어느덧 뒤틀리기 시작한 나무 들창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쌓였던 모래가 안으로 조금 쏟아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집게손가락에 모래 알갱이를 묻혀 맛을 보았다. 영서 맛이 났다. (2023.08.01)


며칠째 계속 모래가 되는 꿈을 꾼다. 세상의 온갖 것들이 갑자기 다 모래가 되어 바스러지는 꿈이다. 겉보기엔 멀쩡한 것 같아도 손을 가져다 대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꿈의 시작은 제법 평범했다. 나는 어느 작은 도시의 버스 정류소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리가 아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순간 의자는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린다. 부서져 내리는 의자 때문에 엉덩방아를 찧었다가 옷에 묻은 모래를 털고 일어나려고 버스 정류소 안내판 기둥을 붙잡는 순간 그 또한 모래가 된다.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마침내 도착한 버스에 서둘러 한 발짝 올려놓고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려고 하면 그것 역시 모래가 된다. 급출발하는 버스 안에서 서둘러 손잡이를 잡으려다가 버스마저 모래가 되면 어쩌나 싶어 버티고 섰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만다. 넘어지면서 반사적으로 옆에 섰던 사람의 팔뚝을 잡아버려 그 역시 모래가 되고 만다. 그다음부터는 만지든 말든 상관없이 죄다 모래가 되어 바스러진다. 이미 오래전부터 모래였던 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는 듯 와르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 모든 사태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나는 제법 멀쩡해서 모든 질서가 무너지는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본다. 하룻밤만의 꿈이라면 '거참, 희한한 꿈이네' 하고 넘겼다가 모닝커피를 마실 때쯤이면 죄다 까먹었을 텐데, 비슷한 식으로 며칠 밤 계속 반복되다 보니 자꾸 곱씹게 된다.

"늙어서 그래."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 영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점을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꼽았다. 이삼십 대 때랑은 다르게 좀처럼 피로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점도, 머리숱이 점점 준다는 점도, 점점 깜박하는 게 많아진다는 점도 다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건 다 당연한 얘기라서 그때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래 꿈은 나이를 먹는 거랑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늙으면 몸에서 수분이 쫙 빠져버려. 꿈은 다 은유랑 상징이잖아. 모래가 상징하는 게 뭐야? 사막, 이런 거잖아. 네 몸도 지금 그런 상태라서 제발 물 좀 주세요 하고 무의식이 외치는 거야. 보습 잘하고 자라."

그 말을 들으니 목이 타서 나는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 빈 잔을 바로 채워 또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로 수분 채우려고 하지 마. 물 마셔, 물. 여기요! 얼음물 두 잔만 주세요."

"오늘 집에 일찍 안 가도 돼?"

"늦는다고 하고 나왔어. 너는?"

"나도 괜찮아. 애는?"

"친정에 있어. 그래도 넌 노화가 덜 시작됐어. 타고나기도 튼튼하게 났고 애도 안 낳았잖아."

"흰머리 안 보여? 너는 어떻게 새치 하나 없어?"

나는 고개를 숙여 흰머리가 잔뜩 난 정수리를 보여주며 물었다. 평소에는 내 몸에서 노화의 증거를 찾는 일을 하지 않았고, 사십이라는 나이가 그렇게 늙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평균 수명을 따져봐도 반 정도를 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서와는 이십 대 때 만나고 오랜만에 다시 만났기 때문인지 우리가 아주 가까웠던 그 시절에 비해 얼마나 더 늙었는지를 더듬어보게 되었다.

"당연히 염색했지. 안 하면 너보다 더 심해."

영서는 웃으며 대답했다.

모처럼 만나 근황을 나누다가 느닷없이 꿈 이야기를 꺼내게 된 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모래시계 때문이었다. 안주로 모츠나베를 시켰는데 직원이 모래시계를 가져다 놓으며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끓인 후 먹으라고 말했다. 샛노랗게 빛나는 비현실적인 색깔의 모래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뭘 그리 빤히 보느냐는 영서의 말에 고개를 들어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할 이야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서도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서 침묵을 채워주는 것이 고마운 눈치였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충동적으로 약속을 잡긴 했지만 십 년이라는 공백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카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만날 날을 잡고 간간이 일상을 공유하던 중에 차츰 연락이 뜸해졌던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서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먼저 약속을 무르자고 말하지도 않았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운 마음이 크긴 했다. 그래도 무슨 이야기를 이어가야 좋을지, 괜히 묻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건드리는 것은 아닐지 알 수 없어 우리랑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날씨, 나이, 다른 동기들의 근황 같은 것들. 그중 나이와 그에 뒤따르는 건강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마치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흰머리가  난다는 둥, 한번 붙은 살이 잘 안 빠진다는 둥, 지나가는 사십 대를 붙들고 물어보면 누구나 동의할 법한 이야기들. 꿈 이야기는 그런 것들에 비해서도 훨씬 더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넌 동안이라 괜찮아. 같이 다니면 사람들 다 내가 언닌 줄 알았잖아."

"그랬나?"

"기억 안 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어긋나는 기억들을 하나씩 꿰맞추며 우리는 둘 다 조금씩 취했다. 영서는 젊을 때와는 다르게 얼굴도 금세 발개졌다.

"안 먹는 버릇 하니까 이제 술도 안 받나 봐. 넌 좀 늘었다?"

"열받을 때마다 한 잔씩 마시다 보니까 이젠 술꾼 다 됐지."

"슬슬 건강 생각해야지. 적당히 마셔."

"진짜... 세월이 흘렀나 봐. 정영서가 그런 말을 다 하고. 옛날엔 먹고 죽자는 말밖에 안 했는데."

내가 농담조로 말하자 영서도 웃었다.

"나도 이제 애 엄마잖아."

"그러니까. 어쩌다 애를 다 낳았어, 정영서가?"

"신기하지? 나도 가끔 신기해. 나도 아직 애 같은데."

"너 닮은 딸이면 예쁘긴 하겠네."

"남편 어릴 때랑 판박이야. 첫딸은 아빠 닮는다잖아. 보고 있으면 남편 얼굴이 보여서 재밌어. 둘째는 또 누굴 닮을까 그런 것도 궁금해지고."

"둘째 계획도 있어?"

"그냥. 아직은 상상만. 넌 계획 없어? 아... 나 애 낳기 전엔 임신 계획 물어보는 사람 엄청 싫어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네."

"괜찮아. 친구끼리 뭐 어때. 우린... 안 가지려고."

"살아보니까 사람 일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거 같아. 너도 내가 그렇게 일찍 결혼하고 애 낳고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너도 그래. 너 평생 혼자 살 거라고 했었잖아. 네가 남자랑 결혼할 줄을 누가 알았겠어? 그러니까, 혹시 모르잖아. 난자라도 얼려놔. 내가 아는 병원 있는데 소개해 줄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영서는 진지하게 조언을 하는데 왜 웃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술에 취하면 매사 진지해지는 건 여전했다. 마지막 남아 있던 닭다리를 먹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열을 내며 토론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난자를 얼려놔야 하는 일 같은 건 그에 비하면 훨씬 중대한 사안임은 분명했다.

사실 내가 결혼을 했다는 건 얼떨결에 나온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알았는지 잘 살고 있느냐고 물어온 영서에게 무조건 예스, 예스, 잘 지낸다고 대답을 하다가 혹시 결혼을 했느냐는 물음에도 그럼, 그럼 하고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인물 사진은 한 장도 없지만 대체로 집 안에서 놀고 먹으며 찍은 사진들이 주로 두 사람 몫인 것이 영서로 하여금 그런 추측을 하게 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영서와 만날 생각도, 연락을 계속 이어갈 생각도 없었기에, 그저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아무렇게나 대답을 하며 계정을 비공개로 돌렸다. 그사이 영서는 이미 내 계정을 팔로우해서 그러는 게 아무 의미가 없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굳이 왜 결혼을 했다는 거짓말을 했는지는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갔다. 만나는 사람은 있었지만 결혼은 아니었다. 역시나 얼떨결에 영서와 만날 약속을 잡은 다음에는 얼굴을 보고 실토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사실을 말하기가 싫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말하기가 싫었다. 꿈 얘기 같은 생소리를 늘어놓은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들을 아무렇게나 늘어놓다가 헤어진 다음에는 연락처를 차단하고 싶었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서는 내 결혼 소식을 무척 반가워했다. 안 그래도 내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전해 듣고 긴가민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워낙 흔한 이름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잘못 전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근데 너 결혼할 때 왜 나 안 불렀어?"

영서가 젓가락으로 희멀건 곱창 하나를 집어 들며 물었다. 나도 그 옆에 있던 두부를 집었다. 나는 준비한 바가 없었으면서도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았다. 사실을 말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내가 다 뻥 차버린 셈이었다.

"코로나19가 심했잖아. 결혼식이랄 것도 없었어. 그냥 가족들끼리 모여서 밥만 먹었어."

"그게 아니라, 왜 소식도 안 전했냐고."

"그때 우리 얼굴 안 본 지 꽤 됐었으니까 연락하기가 좀 뭣했어." 

"그런 거 핑계 삼아 연락하고 그러는 거지. 하여튼 넌..."

뒤이어 나올 말이 뭘까 괜히 긴장됐다.

"사람을 섭섭하게 만들어."

두부가 통째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식도가 잠깐 뜨거워졌다.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고 말했다. 

"좀 미안하네."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래!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우리 이제 자주 보자. 프리랜서면 평일 낮에도 시간 돼? 같이 브런치도 하고 그럼 좋겠다. 남편 욕도 하고."

영서는 곱창을 씹으면서 전골냄비에 있는 것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것 역시 취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먹지도 않을 음식을 뒤적거리는 것.

영서와 만난 날 밤에도 모래가 되는 꿈을 꾸었다. 우리는 지프차를 타고 사막을 건너려는 중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영서가 제발 자신도 태워달라고 했다. 이미 탈 수 있는 인원을 꽉 채운 상태였기 때문에 갓난아이래도 태울 수가 없다는 말을 전해도 영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래가 돼서 타는 것도 안 될까? 그런 건 누구도 생각을 못 했는데 완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영서는 한 포대의 모래가 되어 루프백에 실렸다. 지프차는 덜컹거리며 한참을 달렸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포대는 비어 있었다. 구멍이 났었나 봐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달려오는 동안 영서가 조금씩 흩뿌려졌을 길이 어쩐지 반짝반짝 빛나는 듯도 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듯도 했고. 포대를 탈탈 털어도 영서는 한 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머지 영서가 돌아오면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걸 잘 쓸어 모아서 단지에 넣어 보관해 두었다. 도착한 사람들은 나무로 집을 지었다. 해가 뜨면 참새 떼가 날아와 잠든 사람들이 모두 깰 수 있도록 지저귀었다. 어느 날 저녁에 모래바람이 잔뜩 불어와 들창 앞에 쌓였다. 어느덧 뒤틀리기 시작한 나무 들창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쌓였던 모래가 안으로 조금 쏟아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집게손가락에 모래 알갱이를 묻혀 맛을 보았다. 영서 맛이 났다.

나는 영서에게 그 꿈을 들려주고 해석을 해달라고 했다. 영서는 한참을 아무 말 않다가 "그거 개꿈이네" 하고 말했다. 내 생각도 같았다. 개꿈이었다. 굳이 애써서 어떤 해석을 붙여볼 수도 있겠지만 영서가 단호히 그렇게 말하는 이상 그건 개꿈일 수밖에 없었다. 영서는 아이가 등원할 시간이라 나가봐야 한다고 했다. 영서를 닮았을 딸아이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알겠어. 바쁠 텐데 어서 가봐. 잘 지내. 또 보자."

"응, 너도 잘 지내."

영서는 나처럼 '또 보자'는 말을 쓸데없이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영서가 정말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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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연(소설가)

1983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2018년 「작정기」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 첫 책 『빨간 모자』를 시작으로 『마음에 없는 소리』, 『소설 보다:여름 2022』(공저), 『함께 걷는 소설』 등을 썼고, 제12회, 제1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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