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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어린 개가 왔다] 루틴과 자유 - 마지막 화

정이현의 어린 개가 왔다 - 14화(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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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르고 싶은 가치는 '자유'였다. 단 하나만을 가질 수 있다면 단연 자유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 자유로울 자유. (2023.07.03)


소설가가 얼룩 개를 기른다고요?
정이현 소설가에게 어느 날 찾아온 강아지, 그 작은 돌봄과 애쓰는 마음을 연재합니다.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서로 적응해가는 이야기,
<채널예스> 격주 월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언스플래쉬

많은 사고들은 그저, 그냥 일어난다. 그날은 나에게 종일 몸과 마음이 가라앉아서 움직이기 힘든 날로 남아 있다. 이상하게 피곤한 날이었다. 오후가 깊숙해지도록, 바둑이가 보통 산책을 하는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산책은 나가야 했다. 비가 오지 않는 한, 하루에 한 번, 평균 두 번, 많으면 세 번 바둑이와 산책을 나가는 것이 내가 정해둔 루틴이었다. 아침, 오후, 저녁에 한 번씩. 그날 하늘은 맑았다. 비가 오지도 않는 이런 날 루틴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루틴이라는 단어를 자주 오래 생각하고 있었다. 

routine. 루틴. (n)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

'중학생을 위한 필수 영어 단어 500' 같은 제목의 책에서 처음 그 단어를 알게 되었다. 표지 디자인은 잊었어도 'routine' 옆에 그려진 일러스트는 선명히 기억한다. 쳇바퀴 통이었다. 그 안에서 다람쥐가 열심히 발을 굴리고 있을 것 같은. 단어 옆에 작은 그림 하나씩을 첨부한 출판사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뿐더러, 그 발음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그 쳇바퀴 그림을 떠올린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E에게 하자 그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루틴을 보통 부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쓰나?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곤 덧붙였다.  

"어쩐지 너는 루틴을 힘들어하더라니." 

뭔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투였다. 음, 그렇다면 출판사의 전략은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던 셈인가. 우리 사회에는 루틴을 대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루틴을 긍정적인 단어로 인식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자기 계발의 원동력으로 삼는 사람 또는 루틴 따위 내 알 바 아니라 간주하며 불규칙적인 삶의 파도에 몸을 맡기는 사람, 그리고 루틴을 힘겨워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여기고 바동바동 매일의 일상을 굴리며 살아가는 사람. 물어볼 것도 없이 나는 마지막 유형의 인간이었다. 범속한 생활인이라면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바둑이를 키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히 알게 됐다. 동물을 키우는 일(그리고 아마도 식물 역시)이야말로 강력한 루틴이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육아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인간은 더뎌도 조금씩 성장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지 않았다. 생명을 다할 때까지 인간의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돌봄이 요구되었다. 인간이 돌봄에 대한 일정한 루틴을 만들고 지켜가지 않으면, 즉 인간이 조금 방심해버리면, 동물의 생활은 금방 엉망진창이 되고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강아지를 데리고 오기로 (내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졌을 때 내가 극심한 내적 저항에 시달렸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안 그래도 열심히 돌리고 있는 일상의 쳇바퀴를 이제는 절대로 멈출 수 없음을 예감했던 것이다.  

쳇바퀴를 멈출 수는 없지만, 조금 헐겁게 돌려도 되겠지. 

그때 그런 생각이 살짝 스쳤다. 나는 하교한 아이들을 불렀다. 

"오늘은 너희끼리 나갈래?"

바둑이의 산책을 부탁했다. 바둑이가 좋아하는 산책로로 가려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야 했다. 중앙선이 있는 1차선 도로였다. 일반적으로는 동네 주민들만 이용하는 한적한 길이지만, 1킬로미터쯤 나가면 올림픽 도로와 이어지므로, 우회하는 차량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만 반짝 붐비곤 했다. 바둑이의 목줄을 쥐고 있을 때 횡단보도 앞에서 늘 긴장이 되었다. 바둑이가 쌩쌩 달리는 차들은 보지 못한 채, 저 너머의 풀밭을 보고 갑작스럽게 흥분하기 일쑤여서였다.  

아이들과 바둑이가 나간 뒤, 아 길 건널 때 조심하라는 당부를 못했네, 라고 생각했다. 내가 당부를 했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깜빡 잠이 들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큰애였다. 사고가 났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 내려갔다.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커서 멀리서부터 사고 지점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문제의 그 횡단보도였다.

작은애가 바둑이의 목줄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저속이지만 멈추지 않고 달려온 차량에 치인 사고였다. 차에 치인 것은 개가 아니라 작은애였다. 보험사가 오고, 경찰이 왔다. 보행자 보호 의무 위반, 어린이 보호 구역 위반이므로 12대 중과실 사고라고 했다. 작은애는 겨우 몸을 일으켰으나 다시 주저앉았다.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근처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기로 했다. 바둑이는 큰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병원에 가는 내내, 작은애는 자신이 줄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 그러면 바둑이를 잃어버릴 뻔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의사는 물리 치료를 하며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경찰서에 나가 조사도 받았다. 그만하기를 얼마나 다행이냐고, 자칫하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고 사고 소식을 들은 이들은 다들 똑같이 얘기했다. 보험 회사와 병원과 경찰서에서 사고 처리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작은애는 빠르게 회복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변수가 남아 있었다. 

그토록 산책을 좋아하던 바둑이가 사고 이후 절대로 바깥에 나가려 하지 않는 개로 변한 것이다. 사고 트라우마로 바둑이는 세상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애원을 해봐도, 맛있는 간식으로 꼬드겨 봐도 녀석은 목줄만 보면 차갑게 외면했다. 억지로 줄을 채워도 그때뿐, 제 발로는 계단을 한 걸음도 걸어 내려가려 들지 않았다.  

루틴은 사라졌다. 이제는 의무적으로 산책을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억지로 쳇바퀴 통을 굴리고 있다고 믿었는데 통이 깨지고 난 뒤에 나는 후회를 시작했다.

언젠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보기에는 사랑, 행복, 명예, 부 같은 항목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질문자가 당황할 정도로 한참을 머뭇거렸는데 고르고 싶은 답이 거기 없어서였다. 내가 고르고 싶은 가치는 '자유'였다. 단 하나만을 가질 수 있다면 단연 자유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 자유로울 자유. 

개와 사는 삶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가 대폭 제한된다. 즉흥적인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가끔 개가 없던 때의 삶을 떠올린다. 그립냐고 묻는다면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은 바둑이가 없던 때가 그립다는 말과는 엄연히 다르다. 개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있으나 바둑이가 없는 삶은 이제 그럴 수가 없다. 바둑이는 '어린 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물로 내 삶에 존재하므로. 바둑이는 나로 하여금 자유의 모양에 확실히 다른 견해를 가지게 만들었다.

바둑이가 다시 산책을 하게 되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 의지해 조심조심 바둑이가 그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던 날, 내가 느낀 기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지리산의 보호소에서 혈혈단신 서울로 살러 온 어린 개가 얼마나 용감하고 씩씩한지, 날마다 새로운 두려움을 극복하고서 조금씩 조금씩 더 멀리 걸어가고 있는지 널리 알리고 싶다. 아직 끝맺지 못한 이 글편이 훗날 한 권의 책으로 묶인다면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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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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