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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어린 개가 왔다] 멜팅 포인트

정이현의 어린 개가 왔다 -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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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항상 갈림길 앞에 서 있다. 하물며 강아지를 키울 때조차. 이제 내 앞의 갈림길은 더욱 복잡해졌으며, 종전에 상상해보지 못한 형태로 휘어지고 이어지게 되었음을 실감한다. (2023.06.05)


소설가가 얼룩 개를 기른다고요?
정이현 소설가에게 어느 날 찾아온 강아지, 그 작은 돌봄과 애쓰는 마음을 연재합니다.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서로 적응해가는 이야기,
<채널예스> 격주 월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언스플래쉬

우리집은 두 동짜리 빌라다. 1동과 2동은 각각 출입구가 있고 두 건물 가운데에 작은 정원이라고 해야 할지 마당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공유 공간이 존재한다. 몇 해 전 이 집으로 이사를 결정했을 때 이 정원 또는 마당의 존재가 꽤 큰 영향을 미쳤다. 이곳에서라면 아이들이 마음 놓고 안전하게 눈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 하필 눈사람이었을까? 

그동안 여러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겨울마다 눈이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 속에 파묻힐 만큼 한껏 내려 풍성하게 쌓이는 날이 자주 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은 한겨울이면 번갈아 크고 작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함박눈 쏟아지는 마당에서 그림 속 풍경처럼 신나게 눈덩이를 굴리는 모습은 일 년에 두어 번 보기도 힘들었다.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 것'이 전혀 아니지도 않은 상태로, 여럿이 공동 소유하는 물건의 운명은 대개 비슷하다. 소유에 따르는 책임에도 다들 한 발짝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마당의 존재는 때론 이웃 간 소소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정원 바닥이 바로 지하 주차장의 천장이라 장마철이 한번 지날 때마다 주차장 이곳저곳에선 누수 현상이 일어났다. 또 마당은 여름철 모기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모든 세대가 돈을 걷어 정기 방역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그럴 필요 없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그렇게 마당의 존재는 내게 '반드시 있을 필요는 없는데 있는 곳, 그래서 종종 귀찮은 일을 몰고 오는 곳' 정도로 정리되어 갔다. 

첫눈이 내리던 그 저녁, E는 기습적으로 바둑이를 달랑 끼고 마당으로 나갔다.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아이들이 우르르 그 뒤를 쫓아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어, 어, 어"를 거듭하다가 그들을 놓쳐버렸다. 숫자 3이 눈앞에서 형광 핑크빛으로 깜빡거렸다.

3... 3차... 그렇다... 3차 접종!

바둑이는 아직 3차 접종 전이었다. 그런 어린 개를 이 엄동설한에 무려 맨몸으로 데리고 나가다니. 

내가 내려갔을 때 강아지는 이미 흰 눈이 쌓이기 시작한 땅 위로 한발 내디디려는 중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이었다. 분명한 건 녀석은 지금 어리둥절하다는 거였다. 조심스러워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닌,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그런데 어느 순간 녀석의 몸짓이 달라졌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얼굴을 박고서 정신없이 냄새를 맡았다. 바둑이의 관심을 끈 것은 흩날리는 눈이 아니었다. 땅바닥 그 자체였다. 

바둑이에게 눈은 처음이지만, 땅은 처음일 리 없었다. 바둑이는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랐다. 엄마와 형제들과 흙과 풀과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살고 먹고 뒹굴었다. 바둑이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을 그 원초적인 흙의 냄새는, 이 머나먼 곳의 흙냄새와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를까.

바둑아, 너는 무엇이 기억나서 그토록 사무치게 바닥에 몸을 문대고 있는 거니.

눈앞에서 명멸하던 숫자 3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주란 작가의 장편 소설 『수면 아래』의 작가의 말에는 '해동'이라는 단어의 여러 뜻이 나온다. 

해동-얼었던 것이 녹아서 풀림, 또는 그렇게 하게 함.

해동-나이가 적은 아이. 

이 구절을 처음 읽을 때 나는 바둑이라는 생명체가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문장은 뒤늦게 가슴 한복판에 날아들어 나의 것이 된다. 여러 겹의 우연들을 기습적으로 뚫고서 내 곁에 불시착한 어린 생명처럼. 3차 접종일을 기다리는 동안 바둑이를 데리고 다시 밖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사이 겨울이 절정이었다. 바둑이는 하룻밤이 다르게 부쩍부쩍 자랐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의 뒷모습을 나는 자주 훔쳐보았다. 어김없이 마음이 알싸하게 아팠다. '해동'이라는 낱말을 입 밖으로 중얼거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3차 접종을 한 이후에는(5차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본격적인 산책에 나섰다. 반려견이 기본 접종 완료 전에 산책하는 문제에 나는 지금도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모든 인간은 항상 갈림길 앞에 서 있다. 하물며 강아지를 키울 때조차. 이제 내 앞의 갈림길은 더욱 복잡해졌으며, 종전에 상상해보지 못한 형태로 휘어지고 이어지게 되었음을 실감한다.



수면 아래
수면 아래
이주란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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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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