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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어린 개가 왔다] 비자발적 산책자의 탄생

정이현의 어린 개가 왔다 -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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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산책을 나온 개들이 정말로 많았다. 우리 동네에는 오솔길이라고 부르는, 한참 가면 한강시민공원과 연결되는 흙바닥의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동안 아 저런 곳이 있나 보다, 라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않던 길이었다. (2023.06.19)


소설가가 얼룩 개를 기른다고요?
정이현 소설가에게 어느 날 찾아온 강아지, 그 작은 돌봄과 애쓰는 마음을 연재합니다.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서로 적응해가는 이야기,
<채널예스> 격주 월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어떤 소설가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왔다. 소싯적부터 나는 뭔가가 '되고 싶다'보다 '되고 싶지 않다'를 훨씬 자주 중얼거려온 편이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놓은 대답은 하나 있었다. 꼭 어떤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산책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산책자로서의 소설가 말이다.

이때의 산책자는 보들레르에서 발터 벤야민으로 이어지는 '플라뇌르(Flâneur)'의 의미에 가까울 터다. 도시 곳곳을 관조자의 자세로 자유롭게 천천히 걷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 탐색하는 사람, 마침내 숨겨진 진실을 탐구하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유의점이 하나 있었다. 내가 꿈꾸는 걷기란 거의 전적으로 사유의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것. 현실에서의 나는 산책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걷기 싫어서가 아니다. 말하기 부끄러워서 어디 발설한 적은 없지만, 그건 전적으로 귀... 귀...찮아서였다. 이제 와 고백하는 이유는 명백히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귀찮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극복하지 않을 수 없는 초강력한 변수가 새로 등장했을 뿐이다. 어린 개가 온 후,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는 귀찮음 따위와 상관없이 나는 하루에 두 번 혹은 세 번 반드시 집 밖으로 나가 동네 오솔길을 반복해 걷는 '프로 산책러'로 거듭났다. 비록 철저히 비자발적이며 수동적인 변모라고 해도 내가 거의 직업적으로 산책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개를 산책시키는 시간이 더 길다는 사실 또한.

어린 개의 목에 연결된 리드줄을 행여나 놓칠세라 꽉 움켜쥐고, 바지 주머니에는 배변 봉투와 물티슈를 총알처럼 장전하고 마치 전장에라도 나가는 표정으로 골목길을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내 모습이 가장 낯선 사람은 나였다. 어린 개와 사는 일은 그 전에 모르고 지났던, 모르고 지나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삶의 여러 지평이 갑자기 넓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둑이가 본격적인 산책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나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알려고 들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것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산책을 나온 개들이 정말로 많았다. 우리 동네에는 오솔길이라고 부르는, 한참 가면 한강시민공원과 연결되는 흙바닥의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동안 아 저런 곳이 있나 보다, 라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않던 길이었다. 그렇지만 알고 보니 그 길은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개 산책을 시키는 견주들과, 견주를 따라 나온 개들로 가득했다. 우리 동네에 개 키우는 집이 이렇게나 많았는지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실내 생활을 하는 반려견에게 산책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중대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개의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규칙적인 산책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했다. 그리고 현대 반려견 생활에서 산책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배변 때문이라고도 했다. 풀숲 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강아지들 옆에 엉거주춤 선 채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던 그 많은 견주들. 그들이 기다리던 그것이 뭐였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개똥이었다.

개들은 실내 배변을 하는 개와 실외 배변을 하는 개로 나눌 수 있다. 확실한 수치는 모르지만 실외 배변을 하는 개들의 비율이 더 높다고 했다. 실외 배변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 배변 패드값이 안 들 텐데! 나는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바둑이는 아주 많은 양을 먹고, 또 그만큼 아주 많은 양의 배설을 하는 강아지였다. 거실 화장실의 타일 바닥에 배변판을 깔아두고 그 위에 배변용 종이 패드를 깔아두었다. 내가 이미 이 지면에서 자랑했듯이 바둑이는 대소변을 가리는 데에 특수 재능이 있었다. 집 안의 다른 곳에 실수를 하거나 '마킹'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녀석은 늘 제대로 쌌고, 한 회의 분량은 엄청났고, 하루에 여러 번 패드를 갈아줘야 했다.  

반면 실외 배변의 단점이라면? 비!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외치게 되었다. 실외 배변만 하는 개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천둥이 치나 밖에 나가야 배변을 한다고 했다. 나갈 수 없으면, 즉 사람이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집에서는 며칠이고 꾹 참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인터넷에는 아무리 궂은 날씨여도 '똥책'을 해야만 하는 견주들의 (눈물 없이 읽기 힘든) 사연들로 넘쳐 났다. 우리집 바둑이는? 그 중간이었다. 밖에 나가면 두 번에 한 번꼴로 큰일을 보았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배변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안이고 밖이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하는 성격이었다. 실외 배변을 원하는 개에게 억지로 실내 배변을 하라고 강제할 수도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집사는 그저 따를 뿐이다.

처음의 겁나고 두려운 상태가 조금씩 사라지고, 바둑이가 누구보다 맹렬하게 산책을 원하는 강아지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둑이가 가장 좋아하다 못해 집착을 보이는 것은 오솔길의 양쪽 가장자리에 무성하게 피어난 잡초들이었다. 가수 나훈아의 명곡 '잡초'에 등장하는 그 잡초였다. 가사를 곱씹다가 픽 웃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한 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 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

그 가사의 단 한 부분도 우리 바둑이와 잡초 간의 관계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인간은 맡을 수 없는 잡초의 향기를 정신없이 흡입하는 강아지, 그것이 바둑이었다.(그 향기가 조금 전 앞서 지나간 다른 멍멍이의 쉬야 향기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 바둑이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길가의 잡초를 무척 많이 사랑하는 박애주의견일뿐 더러, 산책을 나가자는 시늉만 해도 행복해지는, 산책의 즐거움을 조금씩 배워가는 강아지였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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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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