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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가 읽은 그림책] 『잃어버린 얼굴』

<월간 채널예스> 202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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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잃어버린 남자가 있다. 원래 그는 누구나 감탄할 만한 또렷한 얼굴을 가진 덕에 자신의 재능을 셀피로 마음껏 발휘해 왔다. 그러나 얼굴이 소비될수록 기이하게도 그의 이목구비는 점점 희미해진다. (2023.06.13)

『잃어버린 얼굴』

올가 토카르추크 글,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 사계절, 2023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궁핍한 시대'라 했다. 넘치는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궁핍한 이유는 '존재'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자' 즉, 인간, 자연. 사물이 각기 지닌 고유한 성격으로, 우리가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저마다의 경이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든다. 존재를 잃은 시대의 인간은 공허하다. 이런 상태를 하이데거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표현했다.1)

존재는 왜 상실되는가. 존재자가 그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잃은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올가 토카르추크가 쓰고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린 두 권의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과 『잃어버린 얼굴』이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다.


ⓒ 요안나 콘세이요

영혼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다. 어느 날 호텔방에서 모든 기억을 잊은 채로 깨어나기 전까지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문득 자신이 텅 비어버렸다고 느낀다. 그는 현명하고 나이든 여의사로부터 영혼을 잃었다는 진단을 받는다. '영혼이 움직이는 속도는 육체보다 아주 느리기 때문에' 생긴 이 병의 치료법은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한다. 오랜 시간 내달리던 삶을 완전히 멈추고 한곳에 머물며 조용히 자신의 영혼을 기다린다. 그사이 소년의 모습을 한 영혼이 남자의 자취를 느리게 쫓는다. 마치 그리운 이를 향해 떠나는 먼 여정처럼 이야기는 홀로 영혼을 기다리는 남자의 정적인 삶과, 남자를 향해 천처히 흘러가는 소년의 순간들을 교차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둘 사이에 닫혀 있던 마지막 문이 열리는 순간, 환하게 웃는 소년과 선명한 표정의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본다. 커다란 얼굴 가득 '존재의 빛'으로 충만한 이 순간을 콘세이요는 밝고 선명한 색채와 무성한 식물로 풍성하게 그려냈다.

이후 남자의 집에는 밀림처럼 빽빽이 식물들이 자라나고 꽃을 피운 한련화가 창을 넘어 하늘 높이 덩굴을 뻗는다. 그리고 그 속에 보일 듯 말 듯 끈으로 이어진 털장갑 한 쌍이 있다.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아직 어린 남자가 자신의 영혼과 나눠 끼었던 장갑이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소년의 속도는 언제부터 어긋났을까. 무엇이 남자에게 영혼의 존재마저 잊고 더 빠르게 움직이라 재촉했을까.

과속은 경쟁이 시작되면서 생겨난다. 타인과의 비교 의식은 영혼을 감지하는 기능을 마비시킨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만 감각하고 나머지는 비존재의 영역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끔 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느낄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배제되는 방식의 진화가 우리로 하여금 기울어진 세계의 맹목 속에서 내면의 결핍에 불감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2)


ⓒ 요안나 콘세이요

바로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얼굴을 잃어버린 남자가 있다. 원래 그는 누구나 감탄할 만한 또렷한 얼굴을 가진 덕에 자신의 재능을 셀피로 마음껏 발휘해 왔다. 그러나 얼굴이 소비될수록 기이하게도 그의 이목구비는 점점 희미해진다. 남자는 공포를 느끼지만 불행히도 그에겐 찾아갈 현명한 여의사가 없다. 고심 끝에 그는 사진에도 잘 견디는 새 얼굴을 사기로 한다. 전 재산을 들여 산 최고의 얼굴은 그를 곧 만족시킨다. 그러나 머잖아 남자는 깨닫는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이 다들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채로 기괴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과열된 욕망의 끝에서 소스라치는 남자를 향해 누군가 말한다. 곧 익숙해질 거라고.

얼굴은 한 인간의 고유함을 상징한다. 사진을 그대로 연필선으로 세밀하게 옮겨온 것 같은 콘세이요의 그림 속에서 처음 남자의 얼굴은 환한 빛으로 눈부시다가, 차츰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지워지고, 끝내 뭉툭한 픽셀의 모자이크로 변해간다. 그사이 화려하게 채색된 장소들과 무겁게 가라앉은 무채색 공허의 대비가 반복된다. 알맹이를 잃은 채로 반짝이는 포장지처럼. 얼굴에 대한 이 서늘한 우화는 존재의 망각에 관한 알레고리다. 이야기는 묻는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셀피는 과거 개개인의 앨범에 속해 있던 사진이 지닌 기록의 의미를 어떻게 변형시켰는가. 복제되고 과잉되는 초상들 속에서 얼굴은 얼마나 쉽게 가면이 되는가. 나에 대한 증명, 타인의 시선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영혼을 잃은 남자는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얼굴을 잃은 남자는 존재를 되찾는데 실패했다. 대체할 수 없는 길고 고집스런 흑연의 시간들로 촘촘히 새겨진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두고 마음은 영혼을 되찾은 남자 쪽으로 크게 기운다. 그러나 오직 시선만은 피에로 마스크를 쓴 것 같은 기괴한 웃음들을 향해, 못 박힌 듯이, 있다.



1)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21세기북스
2) 『순간의 존재』 한상연, 세창출판사



잃어버린 얼굴
잃어버린 얼굴
올가 토카르추크 글 |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 이지원 역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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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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