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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가 읽은 그림책]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월간 채널예스> 202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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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애타고 들뜬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여름 방학도 끝이 난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바다와 소녀가 있다. (2023.04.06)

ⓒ 티모테 드 퐁벨, 이렌 보나시나

낭만의 속성에는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있다. 이 정서적 거리감을 내가 최초로 느낀 것은 오래전 외할머니의 집에서였다. 태어나 열세 살이 될 때까지 해마다 여름의 며칠은 외가에서 지냈다. 그곳은 내게 집 다음으로 친숙한 곳인 동시에 집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다. 부모님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검약과 규율의 세계 반대쪽에 외할머니의 집이 있었다. 푸른 수국이 탐스럽게 핀 마당, 쓸모와 무관한 오래되고 아름다운 물건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페달로 움직이는 풍금과 재봉틀, 마당에서 콩과 호박을 따서 밥을 지어 먹는 저녁, 밤마다 펼쳐지던 커다란 모기장, 방석이 놓인 예배당과 새벽 기도. 젊은 부모가 아직 자식에게 줄 수 없는 정서적 풍요가 그곳에 있었다.

게다가 집에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일들을 실컷 해볼 수도 있었다. 어른의 물건을 만지거나,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밥을 먹거나, 아무 때나 밖으로 나가 노는 일이 외할머니의 집에서는 쉽게 허락되었다. 방임과는 달랐다. 이 한없이 너그러운 허용은 확실한 애정과 신뢰에 기반했다. 할머니를 권사님이라 부르며 수시로 드나드는 동네 어른들이 나를 반기는 것도 좋았다.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대화의 편의보다 나의 편안을 우선에 두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단지 부모로부터 잠시 인계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어엿한 손님인 듯했다.



아이가 양육의 울타리 밖에 있는 어른의 초대를 받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 초대에는 멀고 낯선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두 세계 사이의 거리는 모험의 크기와 비례하게 될 테니까.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에서 소년이 보낸 여름이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의 배경은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삼촌을 만나러 온 소년은 이미 이곳에서 몇 번의 여름을 보낸 경험이 있다. 혼자 타는 기차, 검표원의 정중한 응대,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마중, 기대에 찬 삼촌의 얼굴, 온갖 재미난 잡동사니로 가득한 집, 해마다 조금씩 키가 맞는 자전거, 그 자전거를 타고 매일 나서는 모험, 들판의 자두나무와 이웃 마을의 카페, 저녁마다 삼촌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집으로 보내는 엽서. 소년의 여름 방학은 늘 비슷한 방식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름은 다르다. 삼촌의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을 수 있을 만큼 자란 다리로 소년은 매일 갈 수 있는 더 먼 곳까지 간다. 그 덕분에 소년은 생애 처음 바다를 만난다. 작은 소년 앞에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인물과 풍경이 극한의 대비를 이루며 양면 가득 푸른 수채 물감으로 채워진 이 장면은, 이 책이 왜 이토록 큰 가로 판형을 선택했는지, 그림은 왜 이토록 여백이 많고 간결하게 그려졌는지 잘 보여준다.

ⓒ 티모테 드 퐁벨, 이렌 보나시나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는 소년의 독백처럼 이후 소년의 여름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바다에 에스더 앤더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러 온 낯선 소녀를 보자마자 소년은 한눈에 반하고 만다. 직전까지 세상을 향해 활기차게 뻗어 나갔던 소년의 호기심은 이제 오직 한 사람, 에스더 앤더슨으로 향한다. 모든 첫사랑이 그렇듯 소년은 충격에 휩싸이고 얼이 빠지고 매혹당한다.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파도에 휩쓸려 이제는 삼촌의 이야기도, 밤마다 읽던 책도, 세상의 가장자리를 향해 힘껏 내달리던 매일의 모험도 모두 시시해져 버리고 만다.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소녀와 나누는 암시와 비밀의 말들뿐.

그렇게 애타고 들뜬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여름 방학도 끝이 난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바다와 소녀가 있다. 마지막 문장에는 한 시절의 끝과 시작이 맞물린 이 투명하고 미묘한 여름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돌아오는 길은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사람들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이 세상 어딘가에 에스더 앤더슨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오래전 외할머니가 젊은 엄마에게 들려주었던 양육 지침들 중에는 어린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부모 모르게 아프면서 큰다' 같은. 비밀을 가지는 것. 성장의 열쇠는 거기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낯선 곳에서 부모가 아닌 어른과 보내는 여름 방학이란 아이에게 얼마나 좋은 성장의 토양인가. 비록 책의 제목이 되지는 못했지만 소년에게도 독자에게도 안젤로 삼촌의 존재감은 크다. 그는 아이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 느슨하고 든든한 울타리인 동시에, 개성과 인격을 두루 갖춘 매력적인 어른이었다. 이런 어른이라니, 첫사랑에 결코 밀리지 않을 삶의 양분이 아닌가.


ⓒ 티모테 드 퐁벨, 이렌 보나시나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티모테 드 퐁벨 글 | 이렌 보나시나 그림 | 최혜진 역
길벗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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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무루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자. 비혼이고 고양이 '탄'의 집사이며, 채식을 지향하고 식물을 돌보며 산다. 그림책 『섬 위의 주먹』,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를 번역해 소개했다.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티모테 드 퐁벨> 글/<이렌 보나시나> 그림/<최혜진> 역30,400원(5% + 1%)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지던 자전거 일주, 한밤의 독서,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소년에서 어른으로의 성장 매년 시골의 삼촌 댁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는 소년은 올해도 방학을 맞아 기차를 탑니다. 노란 옥수수 밭을 지나면 나오는 삼촌의 집, 초콜릿 맛 제티를 파는 가게, 자두가 잔뜩 달려 축 쳐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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