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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가 읽은 그림책]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월간 채널예스>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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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손에 쥐고 나는 여전히 머뭇거린다. 아직 쓰지 못한 단어들을 정확히 쓰게 되면 내게도 안정과 평온의 주파수가 정확히 맞는 날이 올까. 영감의 목록이 길어지면 나도 칼 한 자루를 쥐고 씩씩하게 숲으로 들어가 홀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될까. (2023.03.10)

ⓒ 쥘리 델포르트

숲에서 고독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책의 저자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을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침낭 하나에 의지해 잠드는 밤의 충만이나,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는 숲길의 고요, 원시적 낭만으로 가득한 탐험의 즐거움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언제나 책을 덮고 나면 마음 밑바닥에 늘 주파수가 덜 맞은 라디오처럼 잡음 하나가 희미하게 흐르고 있다. 이 오래되고 복잡한 소음의 이름 중 하나는 '질투'다.

"제롬을 만났을 때 그는 피레네 산맥을 혼자 걸으며 텐트를 버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에 마음 깊이 질투를 느꼈다. 남자들도 자기가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질투를 느낄까?"



쥘리 델포르트의 그래픽 노블이자 에세이인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에 쓰인 불안과 분노, 질투, 열망, 매혹과 사랑의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공명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때 여자아이였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궁금하지 않을까?

'트라우마 없이 성장했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지'

딸만 둘을 낳은 엄마 옆에서 아들 낳으라는 친할머니의 닦달을 들을 때, 명절마다 먼저 밥상을 받은 남자들이 떠난 자리에 앉아 종일 음식을 한 여자들이 식사를 할 때, 버스에서 교복 위로 몸을 비비는 남자 어른들을 만날 때, 운치가 좋다는 산길 초입에서 여긴 여자 혼자 못 간다는 주민들의 말에 발길을 되돌렸을 때, 일하던 카페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동일한 조건으로 일하는 남성 동료의 강연료가 나보다 두 배 많은 것을 알았을 때, 출산 휴가 석 달 쓴 해의 인사 고과 점수 때문에 10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며 동생이 울었을 때, 나는 이 이야기들을 굳이 소리 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더 불운하다고도, 그렇다고 괜찮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일들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궁금하다. 한밤중에 택시를 타거나 어두운 집 앞 골목을 걸을 때, 에어컨 설치나 싱크대 수리를 위해 집에 사람을 불러야 할 때, 내 주위 남자들도 나처럼 의심과 두려움을 느낄까? 혼자 산길을 걷거나 하룻밤 숲에서 밤을 보내는 데 자신의 안위를 걸까? 책 속에서 침낭이나 텐트, 부싯돌 혹은 하루치 사유의 질문들을 안고 숲으로 떠나는 남자들은 딱히 더 용감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위축도 없이 산뜻하고 홀가분하게 숲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수컷 외뿔고래다. 암컷에게는 없는 외뿔을 지닌 그들은 알까? 약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모습이 자기 이름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별이 문법 규칙에서 소외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고 자라는 일이 무엇인지.(이 책의 원제는 『Moi aussi, je voulais l’emporter(나도 대표하고 싶었다)』이다. 명사의 성별이 구분되는 프랑스어에서는 둘 모두를 하나의 대명사나 형용사로 수식할 때 남성형으로 쓴다)


ⓒ 쥘리 델포르트

질문들의 무게와 달리 색연필로 스케치하듯 그려진 델포르트의 그림들은 산뜻하고 경쾌하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목소리는 매혹의 바다로 나아간다. 그곳에 등대처럼 토베 얀손이 있다. 델포르트는 이유를 모른 채로 얀손에게 이끌린다. 우리가 매혹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레이엄 하먼은 『예술과 객체』에서 매혹이 "관찰자를 자기 역능의 한계점에 이를 때까지 혹은 자신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확대"하며, "매혹당하는 것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유인되는 것"이라 했다. 매혹의 성분에는 미지가 있다.

어쩌면 용기도 있을까. 델포르트는 섬에서 하룻밤 홀로 캠핑을 한다. 섬을 두고 '생산적인 고독의 상징'이라 말했던 얀손의 "고독과 대면할 수 없다면 진정한 자유는 없다."는 문장을 경험하고 싶어서. 하지만 누구나 얀손처럼 자기만의 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니 델포르트는 개방된 섬에 칼 한 자루를 쥐고 간다. 펜과 칼을 모두 쥐는 그의 용기에 나는 감탄한다. 이 책을 번역한 윤경희 문학비평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여성 예술가에게 창작 수첩은 부당한 세계를 향한 의문과 감정을 쏟아내는 밑바탕이자 그것의 질서를 깨뜨리고 뒤집는 싸움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이것은 싸움의 기록이다.

펜을 손에 쥐고 나는 여전히 머뭇거린다. 아직 쓰지 못한 단어들을 정확히 쓰게 되면 내게도 안정과 평온의 주파수가 정확히 맞는 날이 올까. 영감의 목록이 길어지면 나도 칼 한 자루를 쥐고 씩씩하게 숲으로 들어가 홀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될까. 지금은 우선 수첩에 '베긴회 수녀들'이라고 쓴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술잔을 두고 마주 앉아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한 수도원에서 살고 있다는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출산과 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돌봄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 연결되고, 평화로우면서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아름다운 삶에 우선은 유인되어 보겠다.


ⓒ 쥘리 델포르트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쥘리 델포르트 글그림 | 윤경희 역
바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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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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