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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여백의 행복, 여분의 행복

8화 -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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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줄임말은 아마도 나 이외의 모든 것을 여백으로 뒀을 때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을 뜻하는 '여백의 행복' 아닐까. (2023.06.13)


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포스터 (웨이브 제공)

살아 있는 것은 힘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해야 하는 것들이 복잡하게 얽힌 교차로 가운데에서 버티듯이 살면서 주말만을 기다린다. 혹은 일주일 남짓의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365일을 참거나. 하지만 일상을 인내한 끝에 떠나온 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상상했던 것만큼 자유롭게 쉴 수 없다는 여행의 아이러니다. 귀중한 휴가를 제대로 보내기 위해 만에 하나의 상황을 모두 고려해가며 바리바리 챙긴 짐이 가득한 캐리어에서부터 여행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달까.

기다린 만큼 기대가 커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여행은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처럼 느껴져서, 마감이 임박한 타임 세일에 참여한 사람이 된 것처럼 모든 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전전긍긍하게 된다. 쉬려고 떠난 여행에서 쉬지 못하고 무리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름난 명소에서부터 현지인들만 안다는 숨은 장소에 이르기까지 가야 할 곳도 많고, 먹어봐야 할 것도 많다.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남들이 하라는 최소한만 하기에도 버겁다. 과제를 해치우듯 여행하다 보면, 내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여행기의 조연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여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행의 무게에 짓눌리는 여행자들에게 여행의 기쁨을 되찾아주는 드라마가 있다. 매화마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대사로 시작하는 '박하경 여행기'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는 박하경(이나영)은 토요일 하루만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을 반복한다. 일상으로부터 떠나고 싶게 만드는 무수한 일로부터 몸을 쏙 빼낸 다음 그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는 그의 여행에 묵직한 캐리어 따위는 없다. 언제나 가까운 동네라도 다녀오듯 단출한 차림이지만, 군산, 부산, 속초, 대전,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쏘다닌다.

여행기지만 통상적인 여행의 요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풍경이 멋지지 않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임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하경 여행기'에서 중요한 건 여행기보다는 '박하경'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백으로 내버려 두는 여행이다.

돌아다니고 맛있는 걸 먹는, 일견 보면 남다를 것 없고 밋밋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하경만의 생각이다. 하경은 일상과 다른 장소에서 일상에서부터 끌어온 고민들을 거듭 곱씹는다. '문제는 항상 다른 곳을 원하고, 다른 어떤 곳에 가서도 또 다른 어떤 곳을 원한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계속 헤매기를 반복하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간다. 살아가는 일에 정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종착지 없는 인생이란 여행에서는 헤매는 만큼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하경을 보면서 실감한다.

계획에도 예상에도 없던 우연들이 여백을 풍성하게 채워주기도 한다. 혼자 떠나 혼자 돌아오는 여행이지만 반드시 '혼자'이기만을 고집하지도 않기에, 하경은 새로운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옛 제자, 묵언 수행 중인 보살,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 10대 시절을 버티게 해준 작가, '꼰대' 할아버지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하경의 여행에 '특별 출연'한다. 그리고 그들은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한 만두전골을 먹을 수 있는 단순한 일부터, 재능과 꿈, 사랑, 세대 갈등 등 인생의 무수한 고민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된다. 궁극적으로 하경이 만나는 건 새로운 사람들이라기보다 새로운 자신이다.

"뭐가 좋아지고 나아진다기보다는 그냥 다음 단계가 온다고. 그러고 나면 또 다음 단계가 오고 또 다음 단계가 오고. 또 오고, 또 오고..."

아마 이런 여행이 가능한 건 그가 드라마에서 말하듯 '여행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크게 기대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하경처럼 여행하기는 힘들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억지로 누르고 싶지도 않다. 다만, 여행에 대한 마음의 방향을 조금 바꿔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여행으로 인생을 단숨에 바꿔버릴 대단한 행복을 얻겠다는 기대보다는, '어떤 순간을 실감하게' 되리라는 기대. 그런 순간들을 통해 다음의 여행과 인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는 쪽으로. 드라마 3화에서 하경과 결국 엇갈리지만 '언젠가 만나겠지? 영화는 계속되니까'라던 남자(구교환)의 대사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이나 마음대로 흐르지 않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많은 걸 놓치고 원하는 것과 엇갈리면서 살겠지만, 삶이 계속되는 한 '언젠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사라지고 싶을 때는 어디든 가 보자. 혼자라서 낯선 곳이라서 용기가 없다면 딱 하루도 괜찮다. 걷고 먹고 멍 때릴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좋으니까."

여행의 줄임말은 아마도 나 이외의 모든 것을 여백으로 뒀을 때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을 뜻하는 '여백의 행복' 아닐까. 혹은 내가 몰랐던 인생의 보너스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여분의 행복'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든, 어디서든 모두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각자만의 여행기를 만들어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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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혜경(광고AE, 작가)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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