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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모든 걱정 다 떨치고 그냥 맛있게 -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6화 -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맛있는 음식은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재료와 소통해야 한다. 같은 재료로 같은 과정을 거쳐도 마음 때문에 다른 음식이 된다. 사랑과 정성이 깃든 음식이라야 배부르다. (2023.05.16)
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
하루 종일 속이 울렁거린다. 어제 과음한 탓이다. 매번 겪는 숙취지만 바쁜 일들까지 겹쳐 무리하면 유달리 힘들 때가 있다. 해장하겠답시고 기름진 버거를 먹었는데 더부룩하기만 하고, 좀 걸어봐도 여전히 어질어질하고. 와중에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버스를 두 시간이나 탔더니 멀미 증상까지 생겼다. 물만 마셔도 얹히는 기분으로 헛구역질을 반복했더니 저녁 먹을 기력도 없다. 한 끼 건너뛰겠다고 하자, 남편이 미역국을 해주겠단다.
아, 미역국!
몸이 안 좋을 때 그나마 들어가는 게 있다면 바로 남편의 미역국이다. 소고기 등심 한 팩을 그대로 넣고 끓인 소고기 미역국인데, 아무렇게나 국자를 들이밀어도 무조건 고기가 두 점 이상은 걸릴 정도로 소고기를 듬뿍 넣고 푹 끓여서 그런지 국물이 아주 일품이다. 연애하던 시절 첫 생일 때 생일상을 차려주겠다기에 미역보다 고기가 더 많은 '어른의 욕망 가득 미역국'을 해달라고 했다가 탄생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생일이 아닐 때 먹어도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맛이랄까.
뜨끈한 국물을 한 입 넣으면 과하지 않게 기름기가 자르르 돌아 고소하면서도 진한 국물이 속을 부드럽게 달래준다. 꽉 뭉쳤던 속이 사르르 풀어진다. 분명 아무것도 씹지 못할 것 같았는데, 입맛이 돌고 용기가 솟는다. 부드럽게 흐물거리는 얇은 미역부터 호로록 들이마시듯 먹어본다. 이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실크 같은 미역이 지나간 다음에는 양파와 소고기다. 비로소 제대로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며, 저녁을 안 먹겠다고 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국그릇을 세 번이나 비운다. 이 맛있는 걸 두고 한 끼를 그냥 넘기려고 했다니 억울할 뻔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냐며 호들갑을 떨자 남편이 대답했다. '남들 하는 거랑 똑같지, 별거 없다'라고. 그런가, 그런데 왜 이 미역국은 유난히 맛있을까. 어쩜 이렇게 내 입맛에 꼭 맞는 걸까.
"맛있는 음식은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재료와 소통해야 한다.
같은 재료로 같은 과정을 거쳐도 마음 때문에 다른 음식이 된다.
사랑과 정성이 깃든 음식이라야 배부르다."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서 창욱(한석규)이 하는 말이다. 그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암 환자인 아내 다정(김서형)을 위해 요리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골고루 영양을 섭취하며 먹는 것을 잘 챙겨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그는 몸에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소금이나 간장은 최대한 쓰지 않는 건강한 레시피로 요리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건강한 음식이 맛있기까지 한 건 힘든 법. 아픈 다정의 입맛은 쉽게 돌아오질 않고, 창욱은 아내가 한 끼라도 건강하고 또 맛있게 먹도록 고군분투한다.
드라마 1화에서 등장하는 쥐똥고추 역시 그 일환이다. 맛있는 잡채를 해주고 싶지만 소금이나 간장은 쓸 수가 없으니, 무염 잡채의 밍밍한 맛을 숨기고 싶어서 쥐똥고추를 쓰기에 이른다. 하나로도 충분했을 쥐똥고추를 세 개나 넣는 바람에 엄청나게 매운 잡채가 되어버리지만, 그 실수는 입맛 없던 다정이 오랜만에 맛있게 먹게 되는 기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창욱이 요리에 고추나 후추를 꼭 넣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마치 내가 매운 음식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이 났다.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 기쁨. 진즉에 왜 몰랐었을까?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반복과 훈련을 통해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변했다. 요리 실력도, 나도."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던 창욱에게 요리의 세계는 낯설다. 그런 요리 초보가 탕수육에 해삼탕에, 말만 들어도 기가 죽는 온갖 음식들을 다정이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기꺼이 시도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는 다정이 '맛있게 먹을 약'이 되어, 맛 이상의 효능을 보인다. 다정은 아들과 갔던 제주도의 바다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다가 원조 레시피로 만든 돔베 국수를 먹고 기억해 내기도 하고, 무항생제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두렵고 슬픈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보통의 요리 드라마와 다르게 비주얼부터 맛까지 자극이라곤 없고 일류 셰프의 현란한 손놀림 같은 것도 없지만, 서툴어도 차근차근 정성껏 요리를 완성해가는 창욱의 모습에선 오래 끓인 국 한술을 떴을 때와 같은 진한 감동과 사랑이 배어난다.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창욱의 요리 실력도 능숙해지지만, 상대방을 위해 요리하는 마음은 무뎌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을 울린다. 망고 주스가 마시고 싶다는 다정을 위해 망고뿐만 아니라 용과며 사과며 양배추며 몸에 좋다는 과일을 잔뜩 사다가 종류별로 주스를 다섯 개나 만들었을 때는 그의 귀여운 호들갑에 웃음이 나왔고, 동시에 그의 간절함이 애달팠다. 다정의 증세가 악화되어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되자,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비로소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그보다 더 크게 통곡하기도 했다.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워할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다정, 그를 위해 요리하는 창욱, 그 사이에서 관계를 회복해나가는 아들 재호까지. 세 식구는 매 끼니마다 소중하게 만들고 함께 먹는다. 그들은 '식구(食口)'라는 문자 그대로 함께 식사를 거듭하며 서로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함께 먹은 음식은 다정이 힘든 순간 떠올릴 수 있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는다.
호스피스 병동에 누워 "준비가 된 것 같다"라며 다정이 덧붙인 건 창욱이 좋아하는 김치밥을 만드는 비결이다. 냄비나 솥으로 밥을 지어야 하고 마지막엔 참기름 대신 들기름을 넣어야 '자기가 좋아하는 맛'이 난다면서. 창욱이 다정을 생각하며 쥐똥고추를 넣듯이, 그 사람의 입맛을 돌게 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마음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남편의 미역국을 먹으면 씻은 듯이 낫는 기분이었나 보다. 별거 없어 보이는 것에도 사랑이 있다는 사실은 일상을 든든하게 만드니까.
시한부 주인공이 등장하고 시청자를 울게 하지만, 이 드라마는 신파극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억지로 짜내는 슬픔도 일그러진 표정 사이로 흐르는 눈물도 없다. '뭔가를 먹을 수 있는 날이면 좋은 날'이기에, 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소중함을 하나하나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이 드라마를, 내 주변의 모두가 꼭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만큼은 모든 걱정 다 떨치고 그냥 맛있게, 살아있는 순간 최선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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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