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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의 혼자서 추는 춤] 번역가는 근로자입니까?
<월간 채널예스> 2023년 6월호
일이란 눈에 보이는 사랑이에요. 만일 당신이 마지못해 포도주를 짓이기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독이 되어 포도주에 스밀 겁니다. (2023.06.09)
시인이자 번역가인 황유원 작가에게 번역은 곧 '혼자서 추는 춤'입니다. 번역을 통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먼바다를 항해합니다. 번역가의 충실한 가이드를 따라 다채로운 세계 문학 이야기에 빠져 보세요. |
오늘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날이다. 책의 난이도와 분량 등을 고려해서 예상 작업 시간을 산정해보는 날이기도 하다. 이번 책은 240페이지 정도로 그리 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글자 크기가 꽤 크니 한 달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한 달 동안 미우나 고우나 이 책과 함께 동고동락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이 하필이면 '근로자의 날'이란다. 처음에는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날이잖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렸다가 '아니, 혹시 나도 근로자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근로자'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았다.(대충 알 것 같아도 꼭 사전을 찾아보는 것은 특히 번역 일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역시, 예상대로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어라, '근로'란 '근면한 노동'을 뜻할 것이고, 나도 그것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나도 근로자가 아닌가! 왠지 기뻐서 "여러분, 저도 근로자였습니다!" 하고 잠시 허공에 외치고픈 심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였을까? '근로자의 날' 관련 뉴스를 검색해보았다. 음, '근로자의 날 법'에 따르면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하고 이 날을 근로 기준법에 따른 유급 휴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사전적 의미로는 근로자가 맞지만 사회적 의미로는 근로자가 아니었다. '유급휴일'이라는 말은 나에게 전혀 무의미한 말이니까. 나는 인간들의 '사회'보다는 글자들의 사회인 '사전'과 훨씬 더 어울리는 번역가, 즉 '프리랜서'니까.
가끔 누가 무슨 일 하시는 분이냐고 물으면 차마 시인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그냥 프리랜서라고 대답하곤 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아...' 하며 말끝을 살짝 흐린다. 아니, 프리랜서가 어때서? 프리랜서는 과거 중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말로, 원래 '자유로운(free) 계약에 따라 전투에 참여하던 창기병(lancer 혹은 그냥 lance)'을 뜻하던 단어다. '자유'와 '창'의 합성어! 물론 나는 창기병은 아니지만 종이 교정지를 받고서 역교를 볼 때만은 창을 든다. 내 창은 만년필.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잉크를 구입해 깨끗이 씻어 말린 만년필에 넣어준 후 곧바로 교정지로 쳐들어간다.(그렇다, 교정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전투인 것이다)
번역 일을 아르바이트가 아닌 본업처럼 하게 된 것은 2016년 무렵이었다. 나는 밥 딜런의 가사집 번역을 끝내자마자 공항으로 달려갔었다. 출국 전날까지 편집부와 마지막 교정지를 주고받느라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당시 남인도 벵갈루루의 벽지에 있던 작가 레지던스 '상감하우스'에 입주 작가로 가기 위해서였다. 머리가 식기도 전이었지만 나는 당장 또 다른 마감을 앞두고 있었다. 바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어쩔 수 없었다. 고대했던 첫 해외 레지던스 생활을 만끽할 틈도 없이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번역을 했다. 그곳의 프랑스인 매니저 파스칼에게 "너희 한국인의 문제는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거야!"라는 가슴 아픈 말까지 들어가며.
정말 오랜만에 펼쳐본 『예언자』에는 놀랍게도 「일에 대하여(On Work)」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앞으로 이 일을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전혀 모르고서 번역한 문장들.
노동하고 있을 때, 당신은 실은 삶을 사랑하는 중이에요. 사랑으로 일한다는 건 무엇인가요?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서 자아낸 실로 옷을 짜는 일입니다. 마치 당신의 연인이 그걸 입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애정으로 집을 짓는 일입니다. 마치 당신의 연인이 거기 살기라도 할 것처럼. 일이란 눈에 보이는 사랑이에요. (...) 만일 당신이 마지못해 포도주를 짓이기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독이 되어 포도주에 스밀 겁니다. _『예언자』 중에서 |
거의 무작위로 옮겨 적어본 것임에도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날, 그것도 '근로자의 날’에 정말이지 어울리는 문장들이 아닌가. 대상을 생각하며 작업하는 것, 그것만큼 힘이 되는 것도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이제 나는 살면서 무엇을 먹느냐보다 그것을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일을 한다면, 그것은 독이 되어 스밀' 것임을 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이라는 아동서를 작업할 때는 줄곧 조카들을 생각했었다. 아직은 많이 어린 아이들이 언젠가 그 책을 읽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한 문장 한 문장에 최선을 다했던 기억. 그것이 내게는 진짜 '근로에 의한 소득'이었다. 이번 책은 개와 노인에 대한 가슴 아픈 책이다. 나는 첫 문장을 옮기기도 전에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을 상상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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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번역가.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초자연적 3D 프린팅』, 『세상의 모든 최대화』, 옮긴 책으로 『모비 딕』, 『바닷가에서』, 『폭풍의 언덕』, 『밤의 해변에서 혼자』, 『짧은 이야기들』,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시인 X』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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