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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의 카페 생활] 커피에게로 달려가기 - 언와인더리
임진아의 카페 생활 (4)
시원한 한 잔이 기다리고 있는 달리기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즐거운 이벤트에 가깝다. 뛰다 말고 냅다 카페로 들어가 마시는 시원한 라테 한 잔은 운동과 세트로 묶인 행복이다. (2023.05.19)
격주 금요일, 임진아 작가가 <채널예스>에서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소개합니다. ‘임진아의 카페 생활’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카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
어른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놀랍도록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내가 꾀부리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마른 몸으로 살 때는 힘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체질이 변하며 살아본 적 없는 몸무게에 다다르자 더 심해졌다. 움직일 힘이 부족해서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과, 몸이 무거워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금방 지치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움직이는 일이 곧 스트레스로 작용해버리고, 모든 일은 게으른 나와의 싸움이 되었다.
오지은 작가가 보내는 한 권의 편지 『당신께』를 읽으며 내가 애써 하지 않으려 했던,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문장으로 만들어져있던 생각 한 줄을 만났다.
나는 살이 쪘다. 살이 찐 나를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내 결과물도 싫어할 것이다.
이 늪의 슬픈 점은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압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살이 찐 나를 사람들이 싫어하고 말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살이 쪘다는 사실을 적어도 나만큼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감각하며 살고 있다. 나, 살, 쪘네라는 늪에서 하루를 시작할 때면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지친 기분이 들었다.
『당신께』의 편지를 읽고 난 후, 왜인지 마음이 한 끗 차이로 달라졌다. 살이 쪘다는 것에 마침표를 칠 게 아니라, 그런 나를 기왕이면 자세히 느끼고 싶어졌다. 운동을 한다면 내가 내 무게를 들고서 내달리는 운동이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혼자서 뛰기 시작했다. 그간 혼자 뛰어본 적은 많았다. 키키와 산책을 하거나, 약속 장소에 늦을 것 같은 경우엔 뛸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러닝복을 입고, 러닝화를 신고, 노래를 들으며, 러닝 앱으로 달리는 속도와 거리를 재면서 뛴 적은 없었다.
성격이 급하고 꾀부리기 좋아하는 나는 집에서 준비 운동을 마친 후 현관문에서부터 러닝 앱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며 근처 홍제천으로 내달린다. 혼자 달리기 시작한 후에는 달리기 좋은 때를 만나면 나가고 싶어졌다. 뛰고 오면 살이 빠지겠지라는 마음보다는, 이 날씨에 뛰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가까웠다.
혼자 뛸 때의 준비 사항은 이렇다. 애플워치, 핸드폰, 달리며 들을 노래 목록, 책 한 권. 처음에는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책 위주로 골랐는데 이제는 당일에 가장 읽고 싶은 책이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 정도는 들고 뛸 수 있다. 나는 선수가 아니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준비 사항은 도착지가 될 카페 한 곳.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선수가 참고 참다가 물 한 잔 마시듯 나에게도 달콤한 지점이 필요하다.
우리집 기준 홍제천에서 왼쪽으로 가면 망원 한강 공원 방향, 오른쪽으로 가면 서대문구청 방향이다. 어느 쪽이 더 재미있냐면 역시 서대문구청 방향이다. 농구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달리면서 구경할 거리가 많고, 봄이 지날 때쯤이면 오리 새끼들이 태어나서 천을 따라 귀여운 그림들이 그려져서 좋다. 가장 좋은 점이라면 역시 술집이 많고 카페가 많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 가오픈을 마친 한 카페를 마음속 도착지로 삼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지난번보다 더 달려보자고 작은 목표를 세웠지만, 숫자보다는 손에 잡히는 맛있는 커피 한 잔이 나에게는 뚜렷하게 그려졌다. 도착하면 시원한 라테를 마시며 소설을 읽어야지 하며.
뛰기 시작하면 걷고 싶어지고 그만두고 싶어진다. 더 달릴 수는 있지만 왜 달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나에게 러닝은 '계속 달릴 이유는 없지만 달린다'에 가깝다. 이 정도면 달리기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달리기를 싫어하는 건 달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나는 내가 달리기를 싫어할 줄 안다는 게 괜히 좋았다. 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달리다 보면 달리게 된다. 그리고 달리지 않을 때면 다시 달리고 싶어진다.
서대문구청까지 얼마 안 남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꾀부리는 마음이 찾아오자마자 달리기는 끝이 난다. 그대로 홍제천을 빠져나와 서대문 가재울로에 위치한 언와인더리 카페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도착한 언와인더리 카페는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손님들로 한껏 고요했다. 달리다가 멈추면 그제야 땀이 쏟아져서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아이스 라테. 두유로' 생각뿐이어서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했다.
"안녕하세요. 아이스 라테. 두유로 가능할까요?"
"네. 라테는 콜드브루 라테가 있는데 그걸로 드릴까요?"
그러고 보니 메뉴판을 정독하지 않고 카페에 온 게 처음이다. 처음 가는 카페는 물론이고, 가본 카페도 가기 전에 메뉴판을 보며 무얼 마실지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나인데, 아차 싶었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 앉으니 땀이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카페에 들어오기 전에 스트레칭도 하고 한숨 돌렸어야 했는데 또 한 번 아차 싶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각자의 커피 시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나 홀로 네 명 분의 테이블에 앉아 땀을 흘리고 있자니 꼭 몸이 뻥튀기 된 듯 커진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안 보는데도 모두 나를 보는 것 같은 기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얼마 동안이나 하고 있었을까, 금방 커피가 나왔다.
"두유 말고도 아몬드 우유도 있는데, 그것도 맛있으니 다음엔 아몬드 우유로도 드셔보세요."
친절한 말에 나도 자연스럽게 웃었다. 두유 색에서 조금 더 진해진 커피 색이 마음에 들었고, 큼지막한 얼음이 둥실 들어가 있어서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나는 이 한 잔을 위해 달려온 게 아닐까. 이런 식의 러닝이라면 내 일상에 제대로 뿌리를 내릴 것 같았다.
땀투성이인 내 모습에만 집중하던 시선이 방금 나온 콜드브루 두유 라테에 시선이 옮겨지자 커질 대로 커진 내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언와인더리 카페는 언와인더리 요가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요가 선생님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주하니, 운동을 하면 땀이 나는 당연한 사실이 시원한 바람처럼 자리했다.
가져간 소설책을 펼치자 카페에는 금방 오후의 볕이 내려앉았고, 책 속의 이야기는 어느새 중반부를 달리고 있었다. 그제야 선명한 라디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카페에 앉아 낯선 라디오를 들을 때면 평소에 힘을 쓰지 않는 쪽으로 고요해진다.
언와인더리 카페는 달리다가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좋은 곳이다. 나에겐 달리다가 가기 딱 좋은 위치에 있는 카페이고, 일상의 카페 목록 중에서 달리다가 가고 싶은 카페가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늦게 달리기 시작한 사람의 운동 에세이『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에 나오는 '즐거운 운동을 위한 어른의 여덟 가지 자세' 중에서 다섯 번째 자세는 꾀부리기 대장인 내 마음가짐과 꼭 같다.
즐거운 이벤트를 만든다.
시원한 한 잔이 기다리고 있는 달리기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즐거운 이벤트에 가깝다. 뛰다 말고 냅다 카페로 들어가 마시는 시원한 라테 한 잔은 운동과 세트로 묶인 행복이다. 나에게는 언와인더리 카페 같은 즐거운 목적지가 여럿 있다. 언와인더리 카페 근처에 있는 카페 샘을 도착지 삼아도 좋다. 저녁 달리기를 할 때면 술집 또또를 도착지 삼기도 한다. 목이 마른 걸 꾹 참았다가 물도 마시지 않고 생맥주를 들이켜는 순간, 마음껏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차오른다. 꾀부릴 줄 아는 어른의 행복은 이렇게나 쉽다.
『당신께』 속 편지가 나에게 해준 말처럼, 달리다 보니 정말로 늪이 메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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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그리거나 쓴다. 일상의 자잘한 순간을 만화, 글씨, 그림으로 표현한다. 지은 책으로는 『사물에게 배웁니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아직, 도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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