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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해의 책 옷 입히기] 어린이책 디자인의 보람
<월간 채널예스> 2023년 5월호
책 속에 다양한 상상력과 유쾌함, 깊은 울림이 있는 어린이책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이 일을 하는 동안은 하고 싶었던 일도 잠시 잊을 만큼 집중을 했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던 어린이책 일은 한 눈 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나도 어느새 이 일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었다. (2023.05.11)
북 디자이너 일을 시작하고 막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어린이책을 디자인했던 적이 있다. 내가 한 작업물을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오! 귀엽다. 이 그림 네가 그린 거야?"라는 대답이 가끔 돌아온다. 그림 작가는 따로 있다고 얘기하면 그럼 어떤 작업을 한 건지 내게 조심스레 되묻기도 한다. 어린이책에서 분위기를 가장 크게 결정짓는 것은 그림이고, 디자인적 역할이 그 속에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적 배치 외에도 글의 내용에 따른 그림의 흐름부터 그에 어울리는 요소를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창작 동화를 진행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들은 그림의 부분과 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주었다.
그리고 내가 디자인적으로 욕심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과하게 강조하거나, 공력을 많이 들였다고 해서 아까운 마음에 그 방향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조화를 깨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화면에 디자인적으로 얼마나 개입해야 할지 결정하고, 과감하게 개입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결정하는 것도 디자인의 큰 부분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일을 할수록 그 안에서 내가 디자인적으로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 찾아보고 싶었다. 거기에다 책의 분위기에 알맞은 제목을 넣으려면 서체에만 의존하기엔 아쉬움이 컸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조화를 만들기 위해 한글 레터링 작업에 더 신경을 썼다. 몇 가지 예로,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 『구스범스』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어린이책 작업들이다.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는 어린이 심사위원들이 직접 뽑은 문학상인 스토리킹 수상작이다. 가족을 잃고 혼자 남겨진 건방이가 오방 도사와 친구들을 만나 함께 무술을 수련하며 겪는 이야기들이 다섯 권에 걸쳐 흥미롭게(정말 재미있게) 펼쳐진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강경수 작가 님은 내용과 잘 맞는 캐릭터와, 역동적인 무술과 잘 어울리는 그림체로 이야기를 잘 표현해 주셨다. 본문의 시작 부분에서 건방이가 돌을 주먹으로 깨면서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제목에 반영하여 레터링 작업을 했다.
1권에서 주먹으로 힘겹게 돌을 깨는 건방이의 모습을 시작으로, 제목의 돌 부분에는 권을 거듭할수록 창이 꽂혔던 흔적이나 칼에 베였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마지막 5권에서 건방이는 1권과 똑같은 자세로 돌을 깨뜨리고 있는데, 손끝에는 더 힘이 생기고 주변에는 고난을 함께 거쳐온 친구들이 있다. 디자인을 할 때 건방이의 성장을 어떻게 이 책답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심하며 작업을 했기 때문에, 표지에 시작과 위기, 그리고 성취와 같은 성장의 과정을 잘 담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구스범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린이 공포물로, 100권에 달하는 책이 나왔던 큰 시리즈였다. 스산한 공포물이지만 어린이책의 특성을 살리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권마다 원화에 어울리는 컬러풀한 색을 부여하고, 꿀렁꿀렁하고 괴기한 느낌의 레터링을 작업해 나가며 조화를 맞추었다. '조금만 더'를 반복하며 며칠에 걸쳐 제목 레터링을 완성시켰던 기억이 있다. 이 형태의 글자에 확신을 가지고 디테일한 작업을 하기까지 많은 시안을 거치기도 했다. 작업의 막바지쯤에 담당 편집자가 저자인 'R. L. 스타인'의 모습을 캐리커처로 넣고 싶다는 의견을 주었다. 어린이 독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귀엽게(?) 그려보았던 캐리커처가 작가 소개에 들어가게 되었다. 1, 3권 총 2권을 작업하며 디자인 포맷을 잡는 작업을 했고, 지금은 40권이 한국어판으로 나와있다.
책 속에 다양한 상상력과 유쾌함, 깊은 울림이 있는 어린이책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이 일을 하는 동안은 하고 싶었던 일도 잠시 잊을 만큼 집중을 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도 성인 책 분야를 하고 싶었는데, 퇴사 후 여행을 하고 통장 잔고가 바닥나는 바람에 코앞의 상황만 생각하고 덜컥 어린이 출판사에 입사했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던 어린이책 일은 한 눈 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나도 어느새 이 일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좀 넘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여러 권의 작업을 거치며 점점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되어갔다. 하지만 당장은 헤매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성인 책 분야로 다시 이직을 결심했다.
그럼에도 어린이책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요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책 디자인에 대해서는 듣거나 말할 발언의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린이책을 만들면서 느꼈던 보람도 그 이유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이책을 할 때에는 유독 후기를 찾아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 중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 속 캐릭터를 연습장에 꾹꾹 눌러 열심히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는데,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확실한 것은, 보람있는 일이기에 나도 그 시간만큼은 진심으로 일 할 수 있었다. 가정의 달 5월, 좋은 선물과 함께 재미있는 책이 어린이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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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디자이너. 돌베개 출판사에서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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