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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해의 책 옷 입히기] 일하고 쉬는 일상

<월간 채널예스> 202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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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잘 쉰다는 것은 일과 잠깐이라도 완전히 멀어질 수 있는 것, 내적 소모가 없는 것, 생각을 넓혀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스스로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2023.04.07)


밀려오는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테트리스 게임과 상황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게임이 무난히 흘러가다가도 블록을 잘못 쌓으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게임이 어려워지고, 긴 막대 블록 하나만 내려오면 몇 줄이 한꺼번에 없어지는 건데, 도무지 나오지 않다가 포기할 때쯤 기다리던 그 블록이 내려와서 몇 줄이 시원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게임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블록이 내려오는 속도가 빨라져서 어떤 블록을 어디에 놓을지 빠르고 적확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 와중에도 블록은 계속 내려온다.

내가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계속 내려오는 블록처럼, 몇 줄을 없애기 무섭게 나에게 새로운 일들이 계속 내려온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 내적 중심을 잡고 있어야 바쁜 시기도, 어려운 시기도 잘 보낼 수 있다. 사람들은 디자인을 할 때 영감을 어디에서 받는지 궁금해하고,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면 영감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인드 컨트롤'이다. 디자인적 영감은 결국 책상 앞에서 작업을 거듭하면서 생기기 때문에, 시간이 걸려도 크게 걱정할 부분은 아닌데, 마음에 관한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해도 자기중심을 잡는 마인드 컨트롤은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언제나 어렵게 느껴지는 일이다.

디자이너들 중에서 디자인적 결과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사실 나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디자인이 성에 차게 나오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거기다가 계속 그런 결과물들을 내게 되기라도 하면 내가 재능이 없는데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의뢰를 받아서 하는 일이지만, 추상적인 내용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려면 나의 개성에 따른 관점과 표현력이 중요해서 그런지 감정 이입을 하지 않고 일로만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사람들의 직관적인 평가에 많이 노출된 직업이다 보니 결국 흔들리며, 슬럼프와 번아웃에 깊게 빠지기도 했다.

디자인을 하는 것이 나의 생계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슬럼프가 왔다고 일을 쉴 수는 없었다. 역시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몸에도 하나둘씩 여러 증상이 나타나고, 체력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많은 것들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전에는 뭐든 해보고 싶은 마음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사이드 프로젝트까지 많은 일들을 하려고 했지만, 몸이 안 좋아진 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요한 것만 남기다 보니, 내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때쯤 다행히 환경도 안정되면서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시기 덕분에 일을 시작한 지 몇 년 만에 진정한 휴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잘 쉴 수 있게 되면서 내 마음의 중심이 조금이라도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디자인이 잘 안 나오더라도 그것을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연결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잘 쉰다는 것은 일과 잠깐이라도 완전히 멀어질 수 있는 것, 내적 소모가 없는 것, 생각을 넓혀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스스로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운동, 여행, 독서, 음악 듣기,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누워 있기 등 얘기할 거리도 별로 없는 매우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 잠깐의 멈춤 속에서 불안을 잠깐 내려놓고 조금의 안정을 찾는다. 곧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내게 위로를 준 책 두 권을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한 권은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고, 또 한 권은 『오늘의 단어』이다. 두 권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지만, 평범함 속에서 빛나는 것을 찾아내고,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과 자기 일상을 굳건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이 와도 덜 흔들리고, 빨리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더 추천하는 책들이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근처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돌멩이 가운데 무작위로 하나를 골라 손바닥에 올려놓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의식을 집중시켜 응시하고 있으면, 점점 별다른 특징도 없는 돌멩이의 형태, 색깔, 무늬, 표면의 모양, 흠집 등이 한껏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다른 어떤 돌멩이와도 다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 돌멩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 내 손바닥에 올려놓은 돌멩이는 그 하나하나가 둘도 없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온 천지 길바닥에 무수히 굴러다니고 있다.*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위즈덤하우스, 2016, 26쪽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저 | 김경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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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 저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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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민해

북 디자이너. 돌베개 출판사에서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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