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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해의 책 옷 입히기] 책의 물성을 만드는 일
<월간 채널예스> 2023년 2월호
어떤 종이는 눈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 책에는 괜찮을 것 같고, 어떤 종이는 자주 쓰던 무난한 종이인데도 이번엔 도무지 느낌이 오지 않을 때도 있다. (2023.02.13)
책을 만들면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종이와 후가공을 고르는 일이다. 회사의 작은 책장 한 면을 모두 차지할 만큼 많은 종이 샘플들이 있는데, 그 앞에 서서 종이를 고르는 것 자체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이렇게 종이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은 표지 디자인이 컨펌까지 마치고 거의 마지막 단계에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심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 일을 기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디자인한 결과물과 어떤 종이가 잘 어울릴지 그 책만의 물성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과정의 흥미로움 때문이다. 어떤 책은 거친 종이 결이 느껴지게 하고 싶고, 어떤 책은 반짝이는 광이 났으면 좋겠다는 식의 전체적인 느낌을 생각하며 종이와 후가공을 고른다. 종이마다 가지고 있는 특성이 모두 달라서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이러한 변수가 더 괜찮은 대안을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번을 조합하고 선택하고 수정해 가며 책의 물성을 완성해 나간다.
『호저집』은 박장암(조선 시대 실학자 박제가의 아들)이 박제가와 교유했던 중국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시, 필담 등을 모아 엮은 책이다. 여기에서 '호저(縞紵)'는 비단과 모시라는 뜻으로, 벗 사이에 마음을 담아 주고받는 선물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이야기들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한 권은 비단 느낌의 윤이 나는 종이로, 다른 한 권은 모시 느낌의 거친 종이로 각 권의 질감을 다르게 조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하는 종이는 가격이 너무 비싸고, 모시를 표현한 종이들은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딱 맞는 조합을 찾기가 힘들었다. 시안의 방향을 '편지' 자체의 느낌을 살리는 것으로 수정했다. 옛 편지글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인 세로쓰기 형식에서 따온 세로 선을 두 가지로 변형하여 각 권에 그래픽 이미지를 적용했다. 여기에 질감은 거친 느낌이 살아 있는 종이가 적합할 것 같았다. 이 두 권의 색 조합은 꼭 맑은 느낌이 나야 한다는 생각에 '엔티랏샤'라는 종이에 별색으로 인쇄를 했다. 케이스는 모시처럼 격자 질감이 있는 레자크 황갈색 종이에 크롬 박을, 면지는 책을 펼쳤을 때 색다르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생각하며 은은하게 펄이 들어간 스타라이트 은색 종이를 사용했다. 다양한 느낌의 종이들이 그래픽과 어우러져 하나의 분위기로 완성됐다.
아르떼 울트라 화이트 일반 무광 코팅. 시중 책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표지 질감이다. 책표지로 많이 쓰이고 컬러 표현이 매우 잘되는 종이지만, 이 조합만으로 모든 책을 소화시키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고가의 종이 사용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도 많다. 이럴 때는 다양한 코팅으로 눈을 돌려보기도 한다. 『단명 소녀 투쟁기』는 코팅으로 그림의 질감을 잘 살려낼 수 있었던 케이스 중 하나이다. 원고를 읽고, 주로 소녀나 동물, 식물 등을 소재로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유화를 작업하는 남서현 작가님이 떠올랐다. 이 책만큼은 그래픽적인 느낌보다 유화의 깊이가 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망설임 없이 작업 의뢰를 드렸다. 남 작가님은 주인공 '구수정'을 유화로 표현해 주셨다. 유화 작업이 끝나면 캔버스 위에 광이 나는 바니시를 바르기도 하는데, 책에서는 유광 써멀 코팅으로 바니시처럼 빛나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었다. '스노 화이트'라는 매끈한 종이가 특징이 뚜렷한 코팅과 만나 개성 있는 질감이 된 것이다. 여기에 추가적인 디자인적 요소로, 삶과 죽음 사이 두 갈래에서 투쟁하는 주인공을 생각하며 흰색과 검은색 두 개의 가름끈을 넣었다. 띠지는 거친 종이에 물결 모양으로 완성했고, '구수정'의 모험을 상징하는 심벌을 만들어 넣었다. 띠지도 디자인의 큰 요소이기에 버려지지 않고 활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점선 부분을 자르면 책갈피가 되도록 만들어보았다.
디자인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종이 샘플이 가득 꽂혀 있는 그 책장 앞에 또 선다. 손을 뻗어 책장 위쪽에 있는 샘플들부터 살펴보며 내려오다가 책장 아래쪽에도 내가 놓친 괜찮은 종이들이 있지 않을까 쭈그려 앉아서 살펴보기도 한다. 그 안에서의 발견은 때마다 새롭다. 어떤 종이는 눈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 책에는 괜찮을 것 같고, 어떤 종이는 자주 쓰던 무난한 종이인데도 이번엔 도무지 느낌이 오지 않을 때도 있다. 고르고 골라 추려낸 종이에 코팅이나 후가공이 올라간 것도 생각해 보고, 인쇄할 때 컬러가 잘 나올지도 생각해 본다. 어떻게 보면 옷의 옷감을 선택하는 일인데 쉬운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렇게 이미지부터 제작 사양까지 여러 번의 조합과 선택, 수정, 그리고 또 조합과 선택을 반복하며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책이 누군가의 두 손에 올라갔을 때, 그저 좋은 느낌으로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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