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의 뒷면] 말랑말랑한 아기 얼굴 같은 책 - 『말랑말랑 생각법』
<월간 채널예스> 2023년 5월호
언제부터 어떠한 연유로 한 존재의 창의력이 차츰차츰 마모되는 것일까. 어째서 창의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익숙함에 안도하고, 창의 역량을 인재상이라 내세운 기업은 고개 숙이기를 고집하는 것일까. 파블로 피카소의 말을 떠올려본다. (2023.04.28)
갓 태어난 우리는 무엇이든 만들고 부수고 상상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머지않아 권력과 규칙과 잣대에 짓눌려서 하고 싶은 것을 해선 안 되는 인간으로 변해 간다. 언제부터 어떠한 연유로 한 존재의 창의력이 차츰차츰 마모되는 것일까. 어째서 창의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익숙함에 안도하고, 창의 역량을 인재상이라 내세운 기업은 고개 숙이기를 고집하는 것일까. 파블로 피카소의 말을 떠올려본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관건은 어떻게 하면 이들이 커서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게 하느냐다."
정신과 육체의 성장판이 닫힌 어른들에게 되찾아주고 싶었다. 궁금해하고 물어보고 건드리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시절의 생동을. 눈치 보지 않고 트랙을 벗어나 기꺼이 가고 싶은 길을 내가며 뛰는 활력을. '우리가 태초에 지닌 창의력을 마음껏 끄집어내는 문화'를 싹틔우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책을 누가 쓸 수 있을까. 자신이 하는 일을 '어렵고 복잡한 것을 쉽고 재밌게 풀어내는 일'이라 정의 내리는 사람. 약점을 드러내도 안전한 조직을 만드는 사람. 명수 님이라면 쓸 수 있을 거란 느낌이 있었다.
2018년 12월, 첫 번째 답신은 명랑한 거절이었다.
"생각이 무르익으면 연락드릴게요. 익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이런 메일을 보냈다.
"몸속에 철(鐵)이 들어가면 녹이 슬고 죽을 거예요. 철이 없는 생각을 들려주세요."
두 번째 답신은 가까운 기약이었다.
"밥 같이 먹을까요. 우리?"
'우리'라는 단어를 보고 나란한 두 선이 원이 되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2021년 1월, 우리는 어느 식당에서 처음 만나 으레 명함을 주고받는 인사를 했다. 그때 내가 받은 명함 앞면에 적힌 '한명수'라는 이름 석 자의 크기는 양옥집 문패에 각인된 이름만큼 컸다. 회사의 이름만큼 구성원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우아한형제들의 기업 문화가 직사각형 종이 한 장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기업 문화를 만들어가는 명수 님의 이야기가 막 더 듣고 싶었다.
2022년 4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벚꽃 이모티콘이 수놓인 메일을 받았다. 원고 스무 편을 차례대로 읽다가 생각했다. 글과 삶이 똑같구나. 그렇다면 이 책은 진짜가 되겠구나. 창의력이 생활력일 수 있겠구나. 입말은 막힘없이 흐르는 영롱한 피와 같았고, 문장은 기어코 돌 틈을 비집고 나오는 새싹과 같았다. 오랜만에 내 생각의 기름기가 쏙 빠지는 투명함을 경험했다.
2023년 2월, 마케터와 홍보 담당자가 "이 책 정말 좋네요."라고 했을 때 "정말 좋아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진실을 말했으니까 부끄러움은 없었다. 편집자는 첫 번째 독자이니 독후감도 곁들였다. "이 책을 편집하면서 일하는 태도가 조금은 변했어요. 그런데 한 개인이 변한다고 조직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책을 모든 기업의 사원부터 임원까지 읽었으면 좋겠어요."
2023년 3월, 인쇄소에 파일을 넘긴 후, 명수 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거친 쌀알을 뽀얗게 도정해 줘서 고마워요"라는 그의 말. "한 권의 책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다가도, 한 작가의 인생과 시간과 노고가 스몄으니까요. 편집자는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만들 때 헌신하지 않을 수 없지요"라는 나의 답. 늘 그랬듯 우리의 대화는 말랑말랑했다.
『말랑말랑 생각법』은 인생에 숨을 불어넣는 책이다. 기업 문화뿐 아니라 가정 문화, 사회 문화까지 재밌게 바꾸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에 쉬어버린 굴 같은 흐물흐물한 충고란 없다. 심히 탱글탱글한 아기 얼굴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읽는 분들께서 한 장 두 장 넘기며 뜨끔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자이거나 이미 훌륭한 선지자일 터.
나무가 잎사귀를 꺼내고 떨구기를 거듭하며 나이테를 쌓는 것처럼, 작가와 편집자는 원고를 읽고 덜어내기를 반복하며 책 배의 나이테를 쌓아간다. 나무를 베어 만든 어떤 책은 청량한 산소를 앗아가지만, 어떤 책은 사람의 정신과 조직의 탁한 공기를 맑게 바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겸허히 말하건대, 이 책은 인간 세계와 일터 세계의 심폐를 소생시킬 수 있는 것들에 속한다. 그리하여 널리 알려지기를 소망한다. 아니, 널리 알려져야 한다. 부디 사랑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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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기획 편집자. 『최소한의 이웃』, 『최재천의 공부』,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등을 펴냈다. 201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지만 아직 시집 한 권을 쓰지 못해 부끄러운 사람. 읽고 쓰고 말하는 사람을 겪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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