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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으랏차차 진심을 다한다면 이기는 세상 - <으랏차차 스모부>

3화 - 드라마 <으랏차차 스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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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남자도 여자도 같은 도효에 서고 같은 스모부 동료로서 겨룰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럴 날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어. (2023.04.04)


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드라마 <으랏차차 스모부> 포스터

허리 디스크와 둔근 통증으로 병원에 다닌 지 어느덧 세 달째. 이게 다 스모 때문이다. 정확히는 스모의 기본이라는 시코(四股, '시코아시'의 약자) 때문이다.

시코는 스모 경기 직전에 행해지는 의식으로, 땅에 깃든 사악한 영령을 멸하고 잠자는 대지를 깨워 풍작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겼다. 양다리를 벌리고 한 발씩 강하게 바닥을 내리밟는 이 동작은 스모 훈련 방법이기도 하다.

다리를 어깨보다 살짝 넓게 벌린 스쿼트 자세에서 무게 중심을 이동하며 다리 한쪽을 천천히 든다. 팔로 무릎을 펴고 잠시 멈춘다. 버틴다. 천천히 다리를 내린다. 그게 '하나'다. 그렇게 양쪽 다리를 오가며 200번 반복한다... 물론 내가 아니라 드라마 <으랏차차 스모부>의 '오바 호노카'가.

나 역시 200번까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에 30번은 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더랬다. 평소 기본 스쿼트조차 하지 않는 내가 글로만 써도 극악하게 느껴지는 이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건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어리석고 무모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 하지도 못하고 몇 달째 통증으로 고생 중이다. 그러나 그땐 어쩔 수 없었다. 스모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고 입문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으나, 드라마 속 호노카의 시코가 너무나 우아했기 때문이다.

글로는 감히 표현하기 힘든 경지인 자세보다도 우아한 건 그의 태도다. 그는 어떤 상대에게도 맞설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수양하기 위해 매일 시코를 포함한 혹독한 훈련 루틴을 반복한다. 좋아하는 스모를 더 잘하기 위해서라면 효율 따위 재지 않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드라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쿄리츠 대학교 스모부의 유일한 부원이자 주장인 호노카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여자라는 사실 말고는.

실제로 일본 스모계는 1400년 가까이 여성들이 도효(土俵, 씨름판)에 오를 수 없도록 막아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는 셈이다. 드라마의 원작인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된 2000년에는 오사카 지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도효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경기장 밖에서 시상식을 진행해야 했고, 그로부터 18년 후에는 응급조치를 위해 여자 간호사가 도효 위로 올라가자 "여성들은 도효에서 내려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2019년에는 BBC 올해의 여성 100인에 일본 여자 스모 선수 '히요리 콘'이 포함됐으나, 어릴 때부터 스모 신동이라고 인정받았던 그 역시 여자라는 이유로 프로는 되지 못했다.(넷플릭스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나는 스모 선수입니다>를 볼 수 있다)

"내레 그냥 스모를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스모는 계속할 생각이에요."

이런 시대에 스모에 진심인 여자 캐릭터가 바로 '호노카'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이 스모 현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전국 대회 경기장인 료고쿠의 도효 위에는 여자가 오를 수 없기 때문에 현을 대표해서 전국 대회에 나가는 건 준우승한 남자애라는 말을 시상대에서 들어야 했던 호노카.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이 악물고 트로피를 움켜쥐던 호노카. 금녀가 전통인 현실 속에서도 그가 스모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기엔 스모를 너무나 좋아하니까, 할 수 있다면 스모를 계속할 뿐이다. 그런 그가 선택한 곳이 쿄리츠 대학교 스모부다. 스모부가 강하진 않지만, 『스모가 내 인생을 바꿨다』라는 책에서 '남녀 모두 같은 도효에서 스모를 하도록 만들고 싶다'고 쓴 아오키 토미오가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드라마는 그가 홀로 지키는 쿄리츠대 스모부에 '모리야타 료타'라는 남자 캐릭터가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취업이 확정된 대학생인 '료타'는 안전한 졸업 학점을 받기 위해 담당 교수의 권유로 스모부에 입부한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스모에 점차 진심이 되어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스포츠 청춘물의 흐름은 영화 원작과 같다. 다만 드라마는 '30년 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정식 속편인 만큼, 전에 없던 여자 캐릭터들을 통해 달라진 그리고 달라져야 할 시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자는 도효에 올라갈 수 없어"라는 대사가 나오던 시대의 영화 <으랏차차 스모부>에서 여자라곤 남장을 하고서야 시합에 출전할 수 있었던 마사코, 명예 매니저로서 누구보다 스모를 좋아하지만 영화 엔딩에 이르러서야 시코를 배우게 된 나츠코 둘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드라마 <으랏차차 스모부>에는 매니저는 물론 담당 교수, 주장, 부원, 취재하는 기자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여자 캐릭터가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다. 실력과 정신력 모두 단단하게 무장한 스모부의 주장 호노카, 다음엔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주고받는 라이벌 마유, 패배해도 재밌었다며 웃을 줄 아는 사쿠라코, 그리고 배경을 채우는 여성 부원들이 바뀐 시대를 가늠하게 해준다.

"언젠가 남자도 여자도 같은 도효에 서고 같은 스모부 동료로서 겨룰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럴 날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어."

이 대사가 현실이 되길. 그렇게 영화에서 드라마로 이어진 <으랏차차 스모부>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30년 후가 아니라 조금 더 가까운 미래에, 더 많은 여자들과 함께. 여자든 남자든 '1승은 1승'이니까,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 이길 수 있는 평등한 도효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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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혜경(광고AE, 작가)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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