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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의 리걸 마인드] 가짜 노동이란 무엇인가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0월호
조직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노동자에게 기만당한 조직을 보면, 회사라는 공간이 규칙과 루틴으로 구성된 안정적인 곳이 아니라, 실제로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스펙터클한 무대로 보인다. (2022.09.30)
2004년 1월 16일 핀란드 헬싱키 세무서의 직원들은 나이 든 동료 하나가 책상에 엎드린 채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생각하면, 누구든 사무실에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결말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충직한 60세 직원의 죽음이 특수했던 점은 죽은 지 이틀 후에 발견됐다는 것이다.*
사무실이란 장소는 매정한 공기로 채워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옆에 있는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아무도 모를 수 있을까? 사적인 것이 뒤섞여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한국 오피스를 떠올려보면, 헬싱키 세무서 동료들의 무관심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우리 조직에도 구멍은 존재한다. 얼마 전 700억 원을 횡령한 대형 은행 직원은 무려 1년 동안 무단결근을 했음에도 회사의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은행원의 횡령 범죄의 대담함과 대비되는 조직의 무능과 무관심이 더 놀랍다. 조직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노동자에게 기만당한 조직을 보면, 회사라는 공간이 규칙과 루틴으로 구성된 안정적인 곳이 아니라, 실제로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스펙터클한 무대로 보인다.
눈을 돌려 일하는 우리 자신에게 주목해 보면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사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으면서도 돈은 더 많이 벌고 싶은 우리들은 '좋소 기업'(불합리한 노동과 임금을 강요하는 기업)보다는 남들이 보기에만 멋진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은, 그야말로 복잡한 개인이다.
동기란 인간의 모든 행동 뒤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원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진취적으로 보이고, 인정받고, 승진하고, 지루한 업무를 피하면서도, 또 너무 많이 일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자신의 직업, 집, 자가용을 지키기 위해서 일할 뿐이라고 해도 일터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여겨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행히도 큰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근로자일수록 시스템에 몸을 맡긴 채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이른바 무임승차자(free-rider)들의 전략***이 조직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다.(앞서 소개한 『가짜 노동』의 주제는 무임승차자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일부 화이트칼라들의 노동, 책의 표현에 따르면 '무대 뒤의 노동' 자체가 사회적으로 무임승차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에 가깝다)
거대 조직에 속하지 못하는 변호사들은 어떤가. 변호사는 일의 특성상 조직 안에 숨어 무임승차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큰 로펌 조직이라도, 고용된 '어쏘 변호사(associate)'는 자기를 고용한 '파트너 변호사(partner)'로부터 직접 일대일로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4주 단위로 돌아오는 변론 기일에 맞추어 법정에 출석해야 하고, 3일 안에 고객에게 납품하기로 한 의견서의 납기는 준수되어야 하므로, 무임승차식 처세로 조직에서 묻어 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동을 구성하는 속성이 노동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제도 있다. 근로 계약은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사용자는 이에 대하여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체결된 계약'이다.(근로 기준법 제2조 제1항 제4호) 그 계약서에는 근로 시간과 휴게 시간, 임금에 관한 사항과 더불어 근로 장소와 업무가 명시된다. 오전 9시까지 회사 사무실로 출근하여 오후 6시까지 일하는 것이 근로 제공의 일반적인 형태가 된 이유다. 할 일이 없거나 지난 며칠 열심히 야근해서 초과 근무를 했더라도, 매일같이 정해진 장소에 출근해야 하는 것은 근로자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어떤 의미 있는 노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지정한 장소에 출근하고 여덟 시간의 '근로 제공 상태'를 제공했다면 계약과 법률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월급 받을 자격이 있다.
이에 반해 변호사 역시 사장인 변호사와 근로 계약을 체결하지만, 그들의 일을 규정짓는 것은 근로 계약에 앞서 법률 사무소가 체결하는 고객과의 위임 계약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법률상 위임 계약이란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 대하여 사무의 처리를 위탁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기는 계약이다.(민법 제680조) 위임받은 자는 일의 완수를 보장하지는 않으며, 쌍방의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업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다.(법률 용어로 위임 계약에 따른 채무는, 결과 채무(완성)가 아니라 수단 채무(이행)로 분류된다)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의사 역시 질병의 완전한 치료와 같은 결과를 반드시 달성해야 할 결과 채무가 아니라, 환자의 치유를 위하여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가지고 현재의 의학 수준에 비추어 필요하고 적절한 진료 조치를 다해야 할 채무, 즉 수단 채무를 진다.(대법원 1993. 7. 27. 선고 92다15031 판결)
논리적인 차원에서 회사원의 일이 오후 6시에 끝나는 반면에, 변호사의 일이란 끝이 없는 것이 되는 것도 근로 계약과 위임 계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변호사들이란 끊임없이 수단 채무를 이행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진료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의사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 특히, 변호사들은 어떤 복잡한 사건을 마주쳤을 때엔 그 사건의 기록을 읽으면서 서면을 작성할 때뿐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점심을 먹다가 한담을 하면서도, 저녁 퇴근길에 멍하게 창밖을 바라볼 때에도, 자기 전 샤워를 할 때조차 그 사건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하라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사건의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몸을 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온 마음으로 사건에 경주한 만큼 그들은 승소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대부분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지난 변호사 생활의 경험이고, 그것이 우리 변호사들의 숙명이다.
『가짜 노동』은 법률가가 제공하는 노동 역시 여러 가짜 노동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문맥에 따라 이해할 구석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의 논지에 반사적으로 항변하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노동의 허위적 본성을 포함한 세계의 허위적 본성 자체가 문제'라는 진단도, '이때 필요한 건 진정성과 지적 명확성'이며 '우리는 인간의 삶에서 의미와 자율성을 극대화해야'한다는 인용된 주장(227쪽)도, 나의 구체적인 직업 경험을 바탕으로 온전히 수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가짜 노동』, 자음과모음, 2022, 69쪽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가짜 노동』, 자음과모음, 2022, 107쪽 ***사회적 태만 현상의 한 부분으로, 혼자일 때 더 잘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려는 의도로 여럿이 모이는 경우에는 힘을 덜 쓰는 현상.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opendict.korean.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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