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도하타 가이토 저/김영현 역 | 다다서재
우리는 늘 뭔가를 많이 한다. 할 것이 있어야 어딘가에 있는 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책은 묻는다. ‘있기’가 괴로워서 ‘하기’로 도망치고 있는 거라면?
나만 ‘있기’를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있기’가 괴로워서 이런저런 환청을 듣고야 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돌봄 시설이란 그런 곳이었다. (47쪽)
학부와 대학원, 9년간의 공부 끝에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진정한 일류 심리상담사가 되어 궁극의 임상심리학을 연구하고야 말겠다는 야심 찬 포부로 첫 직장, 정신과 클리닉에 취업한다. 저자는 병원에서 다양한 환자들을 치료하며 실력을 쌓아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을 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먼 지역 오키나와에 있는 병원 부속 돌봄 시설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설상가상으로, 부양할 가족과 함께였다. 이 책은 4년간 저자가 정신장애인을 돌보는 시설에서 근무하면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배웠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가 근무한 곳은 조현병, 양극성 장애, 발달장애 등을 가진 사람들이 아침에 출근하듯 모여서 함께 하루를 보내고 귀가하는 주간 돌봄 시설이다. 저자는 첫 직장에서 우아하게 가운을 입고 전문가의 포스를 뽐내며 밀실 같은 상담실에서 어디서도 나눌 수 없는 ‘깊이 있는’ 대화를 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설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자나 상담사가 아니라 그들과 같이 있어 줄 수 있는,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곳은 사회 복귀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돌봄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가 아니라 ‘있기’였다.
‘있기’가 목표인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10시간을 보내는 돌봄 시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자유시간’으로, 무엇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가만히 ‘있는’ 시간이다. 사람들과 그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특별히 할 일 없이 ‘다만 있기’란 얼마나 곤혹스럽고 어려운 일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저자는 공연히 자료를 읽거나 정리하고 바삐 무언가를 하는 척하다가 더는 정말로 할 일이 없어 책상 상판의 나이테가 몇 줄인지 세는 일에 골몰하기에 이른다. ‘유능한 심리전문가’로 활약할 것을 꿈꿨던 그는 잘할 수도 없고, 잘할 필요도 없는 환경에 던져진 것에 당혹스러워한다.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는 사람들과 나란히 TV를 보거나 공을 차거나, 함께 밥 먹고 청소하고 꾸벅꾸벅 같이 조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앉아 있기’라는 최종 필살기를 체득했다. 주간 돌봄 시설에서 일한 지 4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48쪽)
저자는 서서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가 ‘치료’가 아니라 ‘돌봄’이며 그들과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돌봄 시설의 멤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이나 변화가 아니라 ‘안전한 일상’이었다. 각자 자신의 수준에 맞는 평형을 찾아가고 생존이 가능하도록 지탱해 주는 것, 눈에 보이는 치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돌봄’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자문하게 된다. 왜 가만히 있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있기’는 왜 어려울까?
현대인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유를 저자는 두 가지로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돌봄 실패의 흔적이다. 저자는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이 말한 ‘참된 자기’ 개념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되는 순간들의 핵심을 매우 날카롭게 포착한다.
“어려운 말이니 쉽게 풀어보겠다. 위니컷의 말은 아기가 엄마에게 완전히 의존했을 때 ‘참된 자기’로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앙!”하고 울면 마법처럼 수유를 해주고, “꺄아!”하고 외치면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준다. 이처럼 아기는 완전한 돌봄을 받는 시기를 겪는데, 이때 ‘뭐든 맘대로 된다’는 전능감을 느낀다. ‘참된 자기’란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다.
‘참된 자기’라고 하면 고독한 고민 끝에 “사실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 같은 ‘자신의 진심’을 깨닫는 두근두근한 상황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것은 참된 자기가 아니다. 역시 어느 지점에서는 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아기가 엄마의 돌봄을 받을 때처럼 무언가에 내 몸을 전부 맡겼을 때 ‘참된 자기’가 나타난다. 즉 무리하지 않고 존재하는 자신이다. 그래야 비로소 ‘있기’가 가능해진다. (...)
반대로 엄마의 돌봄이 실패해서 아기가 더 이상 자신을 맡길 수 없어지면 아기의 마음은 무너질 위기에 놓인다. 생존이 위험해지고, ‘있기’가 위협을 받는다. 그러면 아기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고 엄마를 기쁘게 하려 노력한다. 위니컷에 따르면, 그럴 때 ‘가짜 자기’가 나타난다.
내가 나무 책상의 나이테를 헤아리고 준코 씨가 주방 보조를 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환경에 내 몸을 맡길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며 가짜 자기를 만들어내고, 어떻게든 그곳에 ‘있으려고’ 노력한다. 살아남으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 온전히 기댈 때, 의존할 때는 ‘진정한 자신’으로 있고, 그럴 수 없어지면 ‘가짜 자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있기’가 괴로워지면 ‘하기’를 시작한다. (53-54쪽)
진범은 따로 있다
여기서 저자의 분석이 그쳤다면 그냥 보통의 심리학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간다. 사회의 문제, 구조적 모순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안목과 감수성으로 저자는, 우리가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드는 진범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자본의 목소리임을 간파해 낸다. 매일매일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하고 자원과 노력의 ‘가성비’를 따지는 검열과 감시의 눈이라는 것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근거와 효율을 묻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는 비생산적인 나’를 견디지 못한다. 일하지 않고, 쓸모를 발휘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라치면 ‘그래도 괜찮을까?’라는 자기 검열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들려온다. 쉬는 데에도 ‘재충전’이라는 이유를 달고, 미래를 위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식의 명분을 계속 만들어낸다. 세상 모든 가치 기준을 흡수해 버린 상업주의, 자본의 논리가 우리 안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탓이다.
‘있을 곳’은 어디인가
저자는 무언가에 내 몸을 전부 맡겼을 때 ‘참된 자기’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내 마음’이 아니라 ‘몸’을 말하고 있다. 엉덩이를 내려놓고 쉴 곳, 있기 위해 내 역할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곳, 무리하지 않으면서 맘 편히 ‘있을 곳’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우리는 ‘있기’와 ‘하기’ 사이에서 무수한 물음을 던지는 저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간다.
그 모든 노력은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필자 | 변지영
작가, 임상·상담심리학 박사. 『우울함이 아니라 지루함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나에게』 『내 마음을 읽는 시간』 등을 썼다.
변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