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미의 짧은소설]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월간 채널예스> 2022년 9월호
얼음들을 씹어 먹었다. 모니터를 보며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동안 어떤 통쾌함이 느껴졌다. (2022.09.22)
제주 공항은 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캐리어를 끌고 나가면서 나는 야자수 너머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벤치에 앉아 렌터카 회사의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늘을 보았다. 입체감이 선명한 뭉게구름들이 눈앞에서 느리게 이동했다. 하늘을 보는 동안에 목과 어깨와 손목은 부드럽게 풀어졌다. 구름의 행렬은 내가 신입의 메일이나 회사의 상황과 상관없는 공간에 와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평일 오후에 나는 휴가지에 도착했고, 렌터카를 받아 숙소로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지난주에 휴가를 신청하러 갔을 때 오 이사는 책상 위에 놓인 오일 버너램프를 보고 있었다. 캔들의 불은 작지만 힘 있게 타올랐고, 방 안에는 아로마 향이 진하게 퍼져 있었다. 창문을 가린 블라인드와 책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나무 화분들 덕분에 오 이사의 자리는 요새처럼 보였다. 오 이사는 자기 방에서 일하면서도 마스크를 챙겨 썼고 점심 식사 후에는 양치질을 한 뒤, 새 마스크로 바꾸어 썼다. 핸드크림 바르는 건 잊어도 소독 젤은 수시로 챙겨 발랐다.
다음 주에 휴가를 쓰고 싶다고 말하자, 오 이사는 오일 램프를 보다가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같이 일하는 동안 나는 갑자기 결근하거나 휴가 일정을 바꾼 적이 없었다. 오 이사는 탁상용 캘린더를 넘겨보며 스케줄을 확인하더니 다음 달 초에 쉬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때쯤이면 중요한 일도 대충 마무리되니까."
나는 그렇게 하겠다는 말 대신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하다고, 업무는 차질 없이 마무리해 놓겠다고 대답했다. 쉬어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 이사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신입의 일에 대해 털어놓을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휴가는 쉽게 얻을 수 있겠지만, 팀장의 자질과 팀을 잘 이끄는 노하우에 대한 지루한 조언을 들을 각오가 필요했다. 오 이사는 업무 다이어리를 꺼내 살펴보더니, 알겠다며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염색할 때가 지난 정수리 부분이 희끗희끗 드러났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오 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 팀, ... 건강 잘 챙겨."
뒤돌아보니 오 이사는 다시 오일 램프의 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오 이사의 방에는 화분을 비롯한 힐링 아이템이 꾸준히 늘어났다.
"이런 것들을 봐야 버틸 힘이 생겨."
화분을 들일 때마다 오 이사는 든든한 표정을 지었다.
건강을 챙기라는 말은 뜻밖이었고 그 말에 마음의 눈금이 조금 이동했다. 오 이사와 같이 일하는 십 년 동안 상황과 대처와 반응에 따라 감정과 관계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오갔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자주 출렁거렸고, 이삼 년 전부터는 어느 쪽으로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제로에 가까워진 상태로 각자의 자리에서 일했다. 회사 생활에서 제로를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주에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방패처럼 두르고 탕비실에 들어가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얼음을 씹는 순간의 해방감에 대해 알게 된 뒤, 나는 수시로 탕비실을 드나들었다. 답답할 때는 잠시 동안이라도 차갑고 단단한 것을 부수는 감각이 필요했다. 오 이사의 말대로 건강을 생각하면 그만두어야 하지만, 순간의 갑갑함을 해소할 수 있다면 더 크고 단단한 얼음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음을 깨물어 먹으며 휴가에 대해 생각하다가 신입이 보낸 세 번째 메일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쉬고 싶으면서도 그걸 해결해야 홀가분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용을 다시 살펴본 다음 모욕감을 느꼈다면 사과하겠다고 썼다. 팀장으로서 상황을 중재하고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지만 서류를 공유하지 않은 건 명백한 잘못이고 문제는 내가 끄집어낸 게 아니라 드러난 거라고 덧붙였다. 나에게는 팀원이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이라는 문장은 타이핑했다가 지웠다. 일을 빨리 수습하고 싶은데 문장을 이어갈수록 사과에서 멀어졌고, 이렇게 원하는 답을 주고 마무리하는 게 맞나 의심이 생겼다. '이 문제에 대해 팀원들과 같이 얘기해 볼까요'라고 썼다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목과 어깨가 단단하게 뭉치는 것 같았다. 나는 임시 저장 버튼을 누른 뒤 뻣뻣해진 손목에서 힘을 뺐다.
오전에 탕비실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휴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출근한 직원들이 경쟁하듯 커피를 내리고 탕약을 데우고 복사를 한 뒤 자리로 돌아간 10시의 탕비실은 한산했다. 환기를 시키지 않은 두 평 남짓한 공간에는 마실 것들의 냄새와 복사기의 열기가 떠다녔다. 나는 냉장고 뒤의 작은 창문을 연 뒤 마스크를 벗었다. 뺨과 입가에 초봄의 바람이 닿았고, 탕비실 안에 갇혀 있던 공기도 느리게 회전했다. 오래된 기계들이 이따금 소음을 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평화로웠다.
정수기에서 바로 얼음이 나왔다면 오 이사에게 휴가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려도 창문 앞에서 기지개를 몇 번 켠 다음,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두통약을 한 알 삼키고 커피 맛이 밴 얼음을 맹렬하게 깨물어 먹으며 신입이 보낸 메일에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온수와 냉수 버튼 옆의 '얼음 준비 중' 표시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얼음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지개를 켠 뒤 옆으로 살짝 돌아간 스커트 선을 바로잡았다. 텀블러에 얼음을 가득 담기 전까지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기를 바라며, 파쇄기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탕비실의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아침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욕설이 오가는 사무실 분위기에 놀라 '죄송합니다'라고 적은 쪽지만 남겨둔 채 도망치던 스무 살 때로부터 20년이 지났는데, 불쑥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겨둔 채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처음 메일을 받은 건 두 달 전이었다. 수습 기간이 끝난 신입이 처음 팀 회의에 참석했던 날이었고, 메일에는 다른 팀원의 발언에 대해 지적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질문과 건의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비난과 공격이 빽빽하게 이어졌다. 두 번째 메일은 한 달 전 새벽에 도착했다. 발신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목 뒤가 뻣뻣해졌다. 새로운 업무를 배정받은 신입은 회사의 시스템과 사무실 분위기, 업무 분업과 다른 팀원들에 대한 불평을 길게 쏟아냈다. 누구를 향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불분명한 분노가 느껴졌다. 매달 이런 메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정신을 차리고 메일에 답을 하기에도, 수면제를 한 알 삼킨 뒤 자버리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신입은 나이도 많고 회사에 오래 다닌 팀장이 이런 메일을 받을 때마다 불면에 시달린다는 걸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어떤 마음이 새벽에 그런 문장들을 타이핑해서 보내는 건지 나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때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내리러 탕비실에 들어갔다가 얼결에 얼음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동그란 얼음들이 텀블러 안으로 쏟아졌다. 신입의 메일에 답장을 쓰다가 속이 답답해서 입안의 얼음들을 씹어 먹었다. 모니터를 보며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동안 어떤 통쾌함이 느껴졌다. 회의실에서 나온 오 이사가 "김 팀장 아직 젊네, 얼음도 씹어 먹고" 하면서 지나갔다.
그날 이후로 출근하면 아이스커피부터 만들었다. 2월에 얼음을 씹어 먹으면 속이 얼얼해지고 머리가 띵해지는데도 얼음에 집착했다. 가끔은 얼음 정수기만이 이 갑갑함을 함께 지나가는 진정한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이 되기 전에는 파쇄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 복사기 옆 상자에 쌓이는 이면지들을 정기적으로 처리해야 했는데, 다들 좁고 냉난방도 안 되는 탕비실에 오래 머무는 걸 싫어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파쇄기 앞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 문서의 스테이플러를 하나하나 제거한 뒤 A4 용지를 두세 장씩 기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천천히 반복해야 하는 일이라 박스의 반도 비우기 전에 어깨와 허리가 뻐근해졌지만 외부의 소리를 지우는 기계음과 함께 상자 안의 서류들이 정직하게 줄어들고, 잘게 쪼개지는 걸 보는 게 좋았다. 파쇄기 안에 서류와 이면지만 넣은 것은 아니었다. 일하면서 주머니에 다급하게 구겨 넣었던 불쾌함, 모욕, 오해와 같은 감정들과 메일과 메시지에 쌓여가는 다양한 요구와 질책도 가만히 흘려 넣었다. 그것들이 소음과 종이 먼지 속에서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늘게 쪼개지기를 기다렸다.
세 번째 메일에는 팀원들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들춘 건 너무했다며 사과하라는 요구가 길게 적혀 있었다. 나는 모욕과 사과라는 단어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신입은 거래처에 보내야 할 서류를 깜박했고 회의 시간에 그 일로 곤란해진 다른 팀원에게 사과했다. 실수는 사소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평소에 신입이 다른 팀원들이 실수할 때마다 따지고 들었기 때문에 다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실수 자체보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가혹한 신입의 태도가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신입은 그 자리에서는 수긍하고 넘어가더니 새벽에 따로 메일을 보내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태도 앞에서 겨우 유지하고 있던 인내심이 끊어졌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니, 신입이 적대적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모든 상황이 피곤했고 아이스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얼음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파쇄기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오 이사에게 할 말이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렌터카를 받자마자 가까운 해변으로 갔다.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며 얼음을 추가했다. 바닷가에는 햇빛과 바람이 충만하고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젖지 않으려고 도망치며 웃는 사람들과 모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풍경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닿는 수평선을 보고 있으니 너무 아득했다. 내가 모래 위에 앉아 이 모든 걸 보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여기에 앉아 있는 게 내가 맞나. 진짜 나는 탕비실에서 텀블러에 얼음을 담고 있거나 메일을 열어 읽고 지우고 더하는 짓을 반복하고 있을 것 같았다.
휴가를 얻은 뒤 나는 신입에게 모욕을 느꼈다면 사과하겠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비행기에 타기 전날까지 낮에는 팀원들과 회의를 하고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일했고, 밤에는 메일 창을 열어놓은 채 감정의 물결에 따라 문장을 즉흥적으로 더하거나 덜어냈다. 나도 어느새 새벽에 그런 문장들을 타이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바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채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고 파도가 친 뒤에는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파도는 일정한 리듬으로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바람은 여기를 지나 다른 곳으로 갔다. 파도가 치면 가까운 곳의 모래는 반복적으로 젖고 먼 곳의 모래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멀리 왔고 밀려올 때마다 뒷걸음질하는데도 파도가 가까이까지 밀려와 발이 고스란히 젖는 기분이었다. 지나가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알 수 없었다.
탕비실의 파쇄기 앞에 앉아 있던 시절에 나는 파쇄기의 하단에 'paper’s partner'라고 조그맣게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종이가 잘게 쪼개지는 동안 나는 그 문구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탕비실에 들락거리는 사람들마다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고생이 많다고 했지만 파쇄기 앞에 앉아 있던 시간 덕분에 회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업무의 실수도, 의례적인 격려나 다짐도, 희미하게 형성된 유대감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파쇄기에 들어갈 것들이었다.
바닷가에서 씹어 먹는 얼음은 통쾌하거나 홀가분하지 않았다. 나는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바짓단과 운동화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자, 손바닥에 마른 모래가 들러붙었다. 모래의 질감이 느껴지는데도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바다 너머의 집, 회사의 책상 위에 두고 온 일과 해결해야 할 관계가 모두 꿈같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바닥을 비벼 모래를 털어냈다. 이제 나에게는 얼음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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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