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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의 짧은소설] 무너지는 순간

<월간 채널예스>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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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어가 무너졌고 내 옆에는 옷 무덤이 쌓여 있는데 난 회복될 수 있을까. 회복할 수 있을까. 나는 옷이 아니라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2022.07.01)


행어가 무너졌다.

자다가 ‘쿵’ 소리에 놀라 눈을 떴고 지진이 났나 싶어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렸다. 소리가 더 이어지지 않아서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 겸 부엌의 불을 켠 뒤 화장실을 살펴봤고 옆방의 문을 열어본 뒤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벽 쪽에 세워둔 2단 행어가 무너졌다.

새벽 2시에 방은 옷들의 무덤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뒤에서 밀어버린 듯 행어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바닥에 널부러졌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무질서하게 엉켜 있는 옷 더미를 바라보았다.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지만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한숨과 탄식 같은 게 몸 안을 떠돌아다녔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눈에 띄는 옷만 몇 벌 건져낸 뒤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옷들이 다 구겨질 거라는 걸 아는데 차분히 앉아 정리할 기분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내 속에서도 무언가 무너져내렸다.

너는 내가 아니라 옷하고 같이 사는 것 같아.

지난주 토요일에 은색 캐리어를 꺼내 자신의 물건들을 챙기면서 케이가 말했다. 지난번보다 말투나 행동이 침착했다. 나는 케이의 뒤에 서서 그가 하나도 빠짐없이, 쓰던 칫솔까지 집어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년 전에는 면도기와 슬리퍼는 두고 갔는데 이번에는 빨래통 안의 셔츠까지 챙겼다. 나는 정말 가는 거냐고,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없느냐고 묻는 대신 그렇게 많진 않은데,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케이는 잠깐 손을 멈추었지만 나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짐을 챙길 뿐이었다.

이제 잔소리하는 사람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

차분하게 그 말을 한 뒤 케이는 현관문 밖으로 나갔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한동안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케이가 또 떠났고 이번에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케이가 떠나던 날에도 행어는 제법 휘어져 있었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윗단에 걸려 있던 옷을 케이가 챙겨 갔기 때문에 약간의 여유 공간이 생긴 상태였다. 나는 케이의 물건이 빠져나간 자리를 눈으로 짚었다. 철제로 된 2단 행어는 원래 쓰던 옷장의 옷걸이 봉이 부러지는 바람에 반년 전에 급하게 주문한 것이다. 조립하면서 튼튼하진 않다고 느꼈지만 반품하고 다시 주문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옷걸이에 걸려 있다가 추락한 옷들이 워낙 많기도 했고 케이가 집에 돌아오기로 한 상태라 빨리 짐을 정리해야 했다.

반년 동안 행어는 천천히 옆으로 휘어지고 앞으로 기울었다. 아침에 옷을 꺼낼 때마다 오늘까지만 버텨줘, 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 크고 튼튼한 행어를 주문해서 주말에 설치해야지, 다짐하며 회사에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는 동안 휘어진 행어에 대한 걱정은 저만치 밀어두었다. 그것은 왠지 내일도 그런 상태로 잘 버텨줄 것 같았다. 거리와 사무실에서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옷에 주목했다. 케이는 옆방 문을 열 때마다 행어가 많이 휜 것 같다고, 저러다 쓰러지겠다며 걱정했다. 나는 케이를 안심시키며 몰래 옷을 사다 한 벌씩 걸었다.

같이 살기로 결정하면서 케이와 나는 돈을 모아 이사 가기로 약속했지만 나의 마이너스는 조금씩 늘어났고 케이의 일거리는 들쑥날쑥했다. 내가 퇴근하면서 들고 오는 쇼핑백 안의 블라우스와 가방에 몰래 넣어 오는 티셔츠를 보며 케이는 그만 좀 사라고 소리를 질렀다. 연애를 시작할 때는 누나 진짜 멋쟁이야, 옷 입는 센스도 뛰어나고, 누나 보고 있으면 감탄하게 돼, 라고 하더니 같이 살게 된 뒤로 이러다 옷에 깔려 죽겠다며 내다 버리라고 난리를 부렸다. 케이와 나의 사랑은 밖에서 잘 차려입고 만날 때만 유지될 수 있는 건데 우리가 자신과 서로를 잘 모르고 사랑을 과대평가한 것 같았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변하길 바란 내가 미친 거지.

반년 전에는 너는 약간 미친 것 같아, 라고 말하며 캐리어를 꺼내던 케이가 반년 만에 말의 방향을 바꾸며 다시 짐을 챙겼다. 나는 달라진 케이를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싸우거나 따질 힘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체념하는 케이보다는 소리 지르는 케이가 나은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옷하고 같이 살아. 거기에 너를 잠깐 끼워준 것뿐이야. 너도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항변하고 싶었다. 볼품없는 사람이라 그냥 나로 사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려주고 띄워 줄 날개가 필요했다. 그게 하루만 지나면 사라져버릴 마법일지라도 잠시 건져 올려줄 아름다운 날개가 필요했다.

반년 전에 옷과 돈과 수납공간 때문에 다투었을 때 케이는 단단히 화가 났고 손에 집히는 대로 캐리어에 담은 뒤 나가버렸다. 그때 나는 옷도 중요했지만 케이도 사랑해서 빈자리를 견디기 힘들었다. 케이는 내가 전화와 메시지로 여러 번 사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와인바에 앉아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어, 라고 하자 케이는 내가 울먹이며 했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네가 옆에 있으면 나는 달라질 수 있어.

그 말을 돌려주는 케이의 눈이 촉촉했다. 망가진 관계를 돌이키고 싶어서 했던 많은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도, 그 말이 케이를 건드렸다는 것도 몰랐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케이는 그 말이 진심이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런데 반년 만에 다시 떠나면서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변하지 않을 거야, 이제야 그걸 알게 됐어.

케이가 떠나기 전까지 나는 옷이 많다고 느끼기보다 옷장이 부족한 거라고, 저 옷들을 잘 걸어두고 아름다운 옷들을 더 사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가고 내게는 그것이 아름다운 옷일 뿐이라고. 그것에 몰두하는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케이에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을까.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행어가 쓰러진 걸 확인한 뒤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들었고 네 개의 알람이 울린 뒤에야 겨우 일어났다. 새벽에 목격한 장면이 꿈이길 바라며 옆방의 문을 열었다. 바닥까지 퍼진 옷 더미를 확인하곤 멍하게 서 있었다. 누가 와서 이걸 싹 다 치워줬으면. 원래 없던 것처럼 말끔하게. 그러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사 모으고 아끼던 옷들인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에 옷장의 옷걸이 봉이 부러졌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서둘러 행어를 주문했고 옷이 상할까 봐 밤새워 정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어가 앞으로 쓰러질 때 내 안의 어떤 부분도 같이 무너져버린 것 같았다.

일단 출근을 하자. 가라앉았던 기분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시폰 블라우스를 입는 순간 나아졌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잠시 구원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의욕을 회복했고 날개를 단 것처럼 비루한 몸뚱이와 휘청거리는 일상, 미래에 대한 불안 위로 살짝 날아올랐다.

퇴근 뒤에는 튼튼한 행어를 사러 복합 쇼핑몰에 갔다. 가구 매장을 돌며 1인용 가죽 소파에 앉아보았고 대리석 식탁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아름답고 안락한 것들이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가구들은 심플하고 제 기능에 충실했다. 아름다운 것은 좋고 옳지. 어쩌면 나는 커다란 소파를 살 수 없어서 티셔츠를 사는지도 모른다. 집과 가구는 멀고 옷은 가까이에 있으니까. 낮에는 아름다운 옷을 집 삼아서, 퇴근 후에는 인테리어가 멋진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인생을 지나가는 것이다.

케이가 떠난 다음 날부터 퇴근 뒤에 매일 쇼핑몰 안을 걸어 다녔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고 데이트 앱에 접속하는 사람도 있고 폭식을 하거나 친구들과 만나서 미친 듯이 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 세계에서 받는 고통 속을 무언가와 함께 지나간다. 나에게는 그것이 옷일 뿐이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을 하며 괴롭게 시간을 통과하느니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고 감탄하며 지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지하 매장부터 천천히 구경하며 한 층씩 위로 올라갔다. 액세서리 전문점에서 팔찌를 차보고 피팅 룸에서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새 옷은 나를 연하의 애인을 잃은 사람의 불행에서 잠시 건져냈다. 원래의 옷을 입은 나보다 새 옷을 입은 내가 좀 더 괜찮아 보였다.

케이는 32인치의 은색 캐리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챙긴 뒤 차분하게 끌고 나갔다. 짐도 더 늘거나 줄지 않았고 옷차림과 신발도 처음에 들어왔을 때 그대로였다. 투룸의 빌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케이의 흔적이나 공백은 금세 지워지고 사라졌다. 나는 케이가 캐리어에 챙겨간 물건들의 부피만큼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고 나만의 방법으로 마음을 달래던 일주일 동안 행어가 감당해야 할 무게는 계속 늘어났다. 결국 사들인 옷을 감당하지 못하고 새벽에 어둠 속에서 무너져버렸다. 다행이라면 케이가 떠난 뒤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가구 매장에서 옷장이 보일 때마다 문을 열고 옷걸이 봉이 얼마나 튼튼한지 만져보았다. 온몸으로 매달려서 흔들어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맘에 드는 행어는 찾지 못했다. 걸어둘 데가 없어서인지 옷을 보아도 시큰둥했다. 나는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다른 건 사지 않고 간단한 저녁 거리만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다. 밤거리는 어두웠고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케이는 어디에서 지낼까, 궁금해하다가 케이의 휴대폰 번호가 그대로일까, 에 생각이 닿았고 이제는 하소연할 말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달라질 거라는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 달라질 자신도 없었다. 변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지내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케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회색 셔츠 두고 왔어. 행어 윗단 오른쪽에 걸려 있어.

지하철 보관함에 넣어놓고 메시지를 주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행어 윗단에 어떤 옷들이 걸려 있었는지 눈을 감고도 넘겨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케이가 말하는 회색 긴팔 셔츠는 오른쪽에서 세 개의 셔츠를 넘기면 보이는 자리에 걸려 있었고 같이 살기 시작한 뒤 처음 맞은 생일 때 내가 선물한 것이다. 케이는 이렇게 비싼 셔츠는 처음 가져본다고 했고 입어본 다음에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하면서 웃었다. 케이는 아끼는 외출복 몇 개만 행어에 걸어두었고 나머지 옷들은 작게 접어 서랍에 보관했다. 나는 케이의 티셔츠 위에 남아 있던 접힌 자국을 기억했다. 그런 케이에게 행어가 무너져서 옷을 찾기 어렵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방문을 연 채 안을 들여다보았다. 휙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케이의 셔츠를 찾을 수 없었다. 차분하게 앉아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바닥에 쌓여 있는 옷 더미와 휘어지고 무너진 옷걸이 봉을 보는 게 힘들었다. 같이 사는 동안 케이가 나를 오래 참아주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옷 더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지하 식품 매장에서 사 온 초밥을 하나씩 집어 먹었다. 이 옷들이 행어에 매달려 있을 때 잠시 동안 나를 구해 주었지만 지금 나는 혼자 남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쇼윈도 너머에 있고 내 손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만 몇 개 남았다. 비루함과 비참함만 생생하게 나의 것이었다. 다행스러운 건 이제 떠날 사람도, 더 휘어질 것도 무너질 염려도 없다는 것이다. 더 나빠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자 차라리 차분해졌다. 케이에게는 뭐라고 할까.

곧, 아니 이번 주까지, 내일까지, 조만간, 보관함에 넣어둘게.

케이에게 보낼 메시지를 여러 번 지웠다가 다시 입력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케이야. 행어가 무너졌고 내 옆에는 옷 무덤이 쌓여 있는데 난 회복될 수 있을까. 회복할 수 있을까. 나는 옷이 아니라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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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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