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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키(KEY), 왜 VHS냐면
키(KEY) 정규 2집 <Gasoline>
키에게 B급 영화는 자기 긍정을 그려내기 위해 선택된 소재고, <GASOLINE>은 이를 심화하며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실존주의적 결단을 선언하는 앨범이다. (2022.09.07)
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을 꾸준히 보다 보면 그중 상당수가 결국 B급 영화 혹은 드라마라는 체감을 하지 않기 어렵다. 봉준호나 데이비드 린치 등 명장들이 라인업에 올라 있음에도 말이다. 주류 흥행작이나 명작들과 썩 구별되지 않고 OTT에 진열되는 B급 작품들이 과거에 대중을 만나던 장소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비디오 대여점이었다. 키의 <GASOLINE> 앨범 'VHS 버전' 패키지가 재현하는 표준화된 레이아웃의 빨간색 VHS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들이 '극장 개봉작'이라는 광고 문구가 붙은 작품들 틈새에 꽂혀 있었다.
과잉의 미학이라는 케이팝에서도 극단적인 수준이다. 키(KEY)의 '가솔린' 뮤직비디오는 성깔 있으면서도 단아한 아티스트의 얼굴 위에 화려한 머리 장식 열전을 펼치며 우주적 규모의 신화적 상상력을 조금의 아낌도 없이 퍼붓는다. 곡은 정확한 맥락을 전달하지는 않지만 화학 연료를 과소비하며 패기와 투지를 불태우는 인물을 그린다. 날렵한 비트 위에 '더 이상 센 척 안 해'라던 2018년과는 (사이에 병역이 있다고는 해도?) 조금 온도 차가 있다고 해도 좋겠다.
<GASOLINE> 앨범의 '부클릿 버전'은 인쇄소에서 색지 커버에 인쇄한 호러 무비 팸플릿을 테마로 하고 있고, 특히 'VHS 버전'은 앞에서도 말했듯 아예 B급 비디오 케이스다. 패키지 속 모든 시각 요소가 지글지글한 고전 B급 영화를 강렬하게 지향하고 있고, '이래도 느낌이 안 오느냐'고 묻기라도 하는 듯 아티스트 본인이 온몸을 바쳐 B급 호러, B급 SF, B급 판타지를 재현한다. 작년 미니앨범 <Bad Love>에서도 보였던 취향이다. 키는 과연 'B 무비 아이돌'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그런데 정작 타이틀곡 '가솔린'과 이 패키징 콘셉트의 연결점은 얼핏 그리 두드러지지 않아 보인다.
이를 이해하는 한 열쇠로 5번 트랙 'Guilty Pleasure'를 제안해 본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어가 되다시피 한 '길티 플레저'는 남에게 알리기 부끄러운 즐거움을 뜻하지만, 점차 남부끄러운 취향을 방어하는 표현이 되었다.
"누구나 '길티 플레저' 하나쯤은 있잖아요! 어쩔 수 없는 거니 욕하지 마세요!"
그러나 키는 이를 '본능이 된 이끌림'으로 정의하되, '더 많은 것을 잃어도' 기꺼이 선택한다고 말한다. 그의 길티 플레저는 정당화를 바라지 않는다. 숙명론적 욕망이지만 또한 희생을 감수하고 스스로 결단하는 대상이다.
그런 비장미는 도처에 있다. 속삭이는 듯한 퇴폐미의 'Bound'도, 상처와 비극을 노래하는 음악으로서의 하우스를 선보이는 'Burn'도 그렇다. 앨범에서 가장 디스코적으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번득이는 'Another Life'도 다른 행성, 다른 삶을 향해 묵직하게 탈출한다. 심지어 'Villain'이라는 곡도 있는데, 케이팝에서 '좀 있어 보이는' 다크 콘셉트의 만능열쇠인 양 남발되던 이 키워드가 드디어 제대로 된 의미를 갖는다. 뻔한 주역에게 쓰러지고 가려지지만 새로움과 과감함을 가져올 수 있는 '대안'적 인물로서의 빌런이다. 앨범 전체에서 키는 명쾌하면서도 차라리 정직한 특유의 음색으로, 숱한 상처로 뒤덮인 채 자신의 미래를 결단하는 인물을 노래한다.
정상성 혹은 주류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웬만한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의 '비주류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드라마 주인공이나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스타트업 대표(단, 잘나가는), 재벌 3세보다 자신이 부족하고 어긋났다는 기분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거기서 누군가는 '길티 플레저'나 'B급'이라는 키워드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것은 때로 무책임하기도 하다. 그러나 키의 비주류성은 적어도 이 앨범 속 주인공에게는 상처의 배경인 동시에, 결단의 핵심이다. '가솔린'의 호전적인 결의와 'B급' 테마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다.
<GASOLINE>의 'VHS 버전'이 의미 있는 것은 그래서다. 얼핏 흔한 뉴트로와 흔한 B급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사실 서른, 마흔이 넘어서도 '철이 없다'는 말로 자신을 형용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B급'이란 얼마나 자주 (그리고 뻔한 의도로) 등장하는 말인가. 그러나 키는 고민 없는 페티시즘으로서의 복고와 무책임한 자가 면죄부로서의 B급-비주류 기호, 양쪽 모두의 혐의를 우아하게 돌파해버린다. 키에게 B급 영화는 자기 긍정을 그려내기 위해 선택된 소재고, <GASOLINE>은 이를 심화하며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실존주의적 결단을 선언하는 앨범이다. 이를 통해 청자는, 비디오 대여점을 찾는 비주류 자아들이 대여 기록 속의 상상된 공동체에 받던 위안을 초연결성 시대의 케이팝으로 다시 만나게 되기도 한다. '가솔린'의 절정부에서 그는 '기적을 보여주겠다'(I can show you a miracle)고 노래한다. 환경 재앙의 시대에 대체 연료를 권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믿는다, 당장의 기적이 아니라도 좋다'는 대답을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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