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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의 짧은소설] 변해 가는 것들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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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죽고 난 뒤 시간이 좀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애써 기억할 필요도 설명해 줄 것도 없었다. 나는 멍하게 있다가 꼭 필요한 것만 남들에게 물어보았고 그마저도 점점 안 하게 되었다. (2022.08.05)


지하철역 앞에서 만난 로이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도 앱으로 동선을 확인한 뒤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맛집을 예약해 두었다며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맛이 깔끔해서 이모도 좋아하실 거예요.

얼마 전에 친구와 같이 밥을 먹었는데 내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생일날 이모가 퓨전 한정식 집에서 맛있게 드셨잖아요.

로이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뭉클한 데가 있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은 대로에서 골목으로 이어졌고 그 안에서도 여러 번 방향을 바꾸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밖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고층의 빌딩들이 사라지고 오래된 건물과 주택을 개조한 작은 가게들이 골목 안에서 성업 중이었다. 인테리어가 독특한 식당이나 카페, 잡화점에서 젊은 손님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오래된 것과 현대적인 것이 조화를 이룬 거리를 바라보았다.

동네 분위기가 좋구나.

이모가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요. 저도 이 동네가 좋더라고요.

로이가 휴대폰으로 골목의 풍경을 몇 장 찍었다.

로이가 말하는 좋음과 내가 느끼는 좋음이 정확히 겹치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같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나 젊은 감각이라고 하는 곳에 가는 것이 눈치 보였는데 걸으면서 모처럼 편안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밥 먹기도 힘들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런 곳을 좋아한단 말이지.

네. 요즘은 이런 데가 힙해요. 

식당에 도착해서 예약을 확인하자 직원이 임로이 씨, 두 분 세팅해 두었습니다 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큰언니가 죽은 뒤 조카는 중성적이고 외국에서도 쓸 수 있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며 로이로 개명했다. 원래 이름도 잘 어울렸는데 오래전부터 이름을 바꾸고 싶었노라고 털어놓았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이 개명 신청이에요.

로이는 회사에서 오래 쓰던 영어 이름이라 익숙했고 이름을 바꾸고 나니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모도 알겠지만 원래 이름은 엄마가 하고 싶었던 이름이라 나한테는 좀 무겁고 올드했거든요.

조카의 이름이 로이가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예전의 이름을 자주 부르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나에게도 이름을 바꾸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 보니 어느덧 이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쓸 일도 많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60대 중반이 되니 이름이 진지하게 사용되는 곳은 병원이나 은행, 관공서뿐이었다. 이제는 좋은 이름보다 이름을 잘 기억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고나 할까.

로이의 말대로 한정식 집인데도 메인 메뉴와 반찬이 전형적이지 않고 한식과 양식이 고르게 나와 먹는 재미가 있었다. 식당의 인테리어도 한옥을 현대적으로 개조해서 고풍스러움과 세련됨이 공존했다. 밥을 먹는 동안 로이는 칠순 생일 때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다. 파티를 하고 싶은지 여행을 가고 싶은지 얘기하면 자기가 알아보고 힘껏 돕겠다고 했다. 로이의 입에서 나오는 칠순이라는 말은 다른 세계의 언어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은 생각과, 자식이 있다면 조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마음이 뒤섞였다. 부를 사람도 없고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다고 하자 로이는 아직 몇 년 남았으니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지 않니 하고 말하려다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로이가 내 나이 정도 되어도 고령을 기념하는 행사가 남아 있을까. 삼십여 년은 긴 시간이 아니지만, 앞으로의 삼십여 년에 대해서는 짐작이나 상상하기 어려웠다. 미래는 지난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많은 것이 변할 것이었다.

식사를 마무리하며 어디에서 커피를 마실까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로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통화를 마친 로이가 울상을 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모, 미안해서 어떡하죠. 커피는 다음에 마셔야겠어요.

오후에 외근이라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회사에 일이 생겨서 들어가봐야 한다고 했다.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나쁜 일은 아니에요 하며 휴대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이모, 제가 주소 하나 보낼게요. 분위기 좋고 커피도 맛있는 카페거든요. 혼자라도 꼭 가보세요.

그러면서 택시가 너무 안 잡히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로이가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고 카페의 링크를 보내고 팀원의 메일에 답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식당에서 나와 로이는 예약한 택시를 탔고 나는 택시가 골목 밖으로 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잠시 서 있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앱으로 부르지 않으면 탈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집에 가려면 큰길 쪽으로 나가야 해서 나는 골목길을 걸으며 근처의 카페들을 둘러보았다. 아직은 커피를 한 잔 마셔도 밤에 잠드는 데 지장이 없을 시간이었다. 로이가 보내준 링크를 눌러 카페의 이름과 주소, 내부 사진을 보았다. 많은 방문자들이 아인슈페너 맛집이라고 후기를 올렸다. 사진을 보니 언젠가 로이와 같이 마셨던 찐득한 크림이 올라간 커피였다. 내가 맛있다고 했던 걸 기억하고 보내준 게 찡했다. 그런데 가게 이름이 표시된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방향이나 거리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편하게 커피 마실 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밖에서 혼자 커피를 마신 지 오래되었다. 누굴 만나지 않으면 외출을 하지 않으니 그런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괜찮아 보이는 곳이 나타나면 창밖에서 안을 살폈다. 젊은 사람들만 있는 곳은 들어가기가 망설여져서 걸음을 옮겼다.

큰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용기를 내어 테이블을 하나 차지했을 것이다. 언니는 호기심이 많아서 새로운 곳에 가거나 안 해본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했다.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고 궁금한 건 나와 로이에게 물어서라도 해결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언니의 검색창과 안내자 역할을 했다. 그 집 이름이 뭐였지. 딤섬 맛있던 집. 앱은 어떻게 까는 거야. 여기서 바로 돈을 보낼 수 있다는 거지. 로봇 청소기는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거니. 내게 묻는 것과 로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달랐다. 큰언니 앞에서는 나이 든 티를 낼 수 없었다. 언니가 죽고 난 뒤 시간이 좀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애써 기억할 필요도 설명해 줄 것도 없었다. 나는 멍하게 있다가 꼭 필요한 것만 남들에게 물어보았고 그마저도 점점 안 하게 되었다.

나는 손님이 별로 없는 카페의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골목을 지나며 만났던 개성 넘치는 가게들과 달리 간판과 내부 모두 특색 없이 심플했다. 커피 종류도 많지 않고 커피 값도 비싸지 않아 혼자 마시고 가기 괜찮아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는데 처음으로 혼자 커피를 마셨던 날이 떠올랐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큰언니가 봄옷을 한 벌 사주겠다고 해서 명동의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버스를 타고 갔는데 다방 안에 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약간 긴장한 상태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패브릭 소파의 무늬와 나무 테이블의 질감, 다방 안에 퍼져 있던 담배 연기와 커피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웅장하고 감미로운 팝송이 흘러나왔고 나는 음악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출입문 쪽을 바라보며 언니를 기다리는 동안 팝송에 취하는 것 같았다.

음악을 듣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나왔다. 카운터에 전화 와 있습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어리둥절해하는데 다시 한번 카운터에 와서 전화를 받으라는 안내가 나왔다. 다른 손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지나 카운터로 갔다. 걸어가면서 칸막이 안쪽 소파에 앉아 있던 연인들이 격렬하게 입맞춤하는 것을 보았다.

조끼를 입은 웨이터가 검은색의 묵직한 수화기를 건넸고 전화기 너머에서 큰언니는 퇴근이 좀 늦어지니 아무거나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목소리는 멀고 잡음이 많이 섞여 있었다.

파르페가 제일 비싸니까 그거 먹고 있어. 계산은 내가 가서 할 테니까.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와.

나는 이런 곳에 자주 오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전화기의 줄을 꼬며 여유로운 척 대답했다.

자리로 돌아와 웨이터가 가져다준 메뉴판 안의 음료 이름과 가격을 하나하나 살펴보았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언니가 말한 파르페를 발견했다. 쌍화탕보다, 커피 두 잔을 합친 것보다 비싼 음료의 정체가 궁금했다.

처음 만난 파르페는 모습과 맛 모두 감탄이 나올 정도로 화려했다. 기다란 유리잔에 들어 있던 붉은색 체리 주스와 과일 통조림, 그 위에 꽉꽉 눌러 담은 아이스크림의 조합도, 아이스크림 위에 꽂혀 있던 긴 막대 과자와 작은 종이우산 장식도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했다. 나는 그 풍성하고 오묘한 조합의 음료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퇴근 뒤에 뛰어온 언니는 우리 막내 혼자 괜찮았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음악을 들으며 기다란 스푼으로 처음 보는 달콤한 음료를 퍼먹느라 혼자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날 언니가 사주었던 체크무늬 모직 치마와 스웨터는 아껴 입었는데도 팔뚝과 허벅지 부분에 보풀이 생겼고 입을 때마다 떼어내느라 바빴다. 청바지와 티셔츠도 물이 빠지고 목이 나달거릴 때까지 오래 입었다.

그 후로 한동안 어떤 음료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파르페라고 대답했고 작고 화려한 종이우산을 서랍 한구석에 모아두었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보니 직원이 아닌 키오스크와 커다란 커피 머신이 두 대 있었다. 벽에는 한글과 영어로 된 간단한 설명서가 붙어 있었다. 키오스크로 결제한 뒤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눌러 커피를 직접 추출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설명서와 커피 머신을 번갈아 보다가 주문 표시를 터치하고 음료를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제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뜨거운 커피가 아니라 아이스커피가 들어 있었다. 뜨거운 것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지 못해 취소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도했다. 이것은 거대한 커피 자판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도 그다음에는 결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계속 오류가 났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던 20대부터 다방과 커피숍, 커피 전문점과 카페를 지나왔다. 그러면서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주문을 받으러 오고 음료를 테이블까지 가져다주고 치워주던 시대를 거쳐 카운터에 가서 직접 주문하고 음료를 받아 오고 직접 반납하는 시대를 지나 사람이 아닌 기계를 통해 주문하는 시대에 도착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변화 같으면서도 빠르고 급작스러웠다. 지난 시대의 변화에 비하면 그랬다. 이제 그만 하고 말하고 싶어도 그걸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버티고 거부하는 것보다 변화를 익히는 편이 낫고 빨랐다.

혼자만의 커피 타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무인 카페의 시스템에 다시 도전해 볼지 다른 카페에 갈지 고민했다.

이모, 커피 잘 마시고 있어요? 다음에는 꼭 같이 마셔요.

로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라고 답을 보낼까 망설이는 동안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능숙하게 주문을 마친 뒤 커피를 뽑아 자리에 앉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피 타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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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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