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은의 인생책] 코로나를 향한 두 가지 시선 - 『얼굴 없는 인간』,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2월호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를 손에 잡은 것은 일정 부분 그런 동기 때문이었다. 악명 높은 아감벤의 『얼굴 없는 인간』을 읽은 뒤, 아감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지젝의 저작을 만나보고 싶어 좀이 쑤셨다. (2021.12.02)
프로이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들뢰즈의 저작 『천 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정신분석은 엉터리 학문이구나! 그것도 모르고 프로이트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네! 앞으로 정신분석학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천 개의 고원』의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허겁지겁 집어먹었다. 몇 년 뒤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프로이트의 저서를 손에 잡게 되었다. 공부하던 코스의 필수과목이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나한테 이런 무의식이 있었구나! 그때 내가 그런 행동을 했던 게 그런 무의식 때문이었구나! 나를 포함한 사피엔스 종 일반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데에 정신분석학처럼 좋은 도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왜 정신분석학을 엉터리라고 치부했지? 짚어보니 몇 해 전 읽었던 들뢰즈의 책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정신분석을 엉터리 학문이라고 결론 내렸다는 사실이 감겨왔다.
사회학, 철학, 심리학 책을 넘나들다 보면 저명한 학자들끼리 서로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처음에 나는 학자들이 전개하는 비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책이 무가치하고, 얼토당토않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 단정했다. 시간이 흘러 읽었던 책들이 내 정신의 밑바닥에 차근차근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을 때에야 알았다. 학자들의 비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학자들이 다른 학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건 다른 학자의 주장을 진정으로 형편없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제가 하는 주장을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식이라는 게 본래 비교와 대조를 경유할 때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까다로운 대상이기에, 누군가의 주장을 반대하는 포즈를 취하며 포문을 열어야 했던 것이다. 몇몇 표제 문장을 통해 다른 학자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여도, 포장을 들춰보면 그 저자 또한 사실상 같은 맥락에 놓인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범인들이 보기엔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학자들끼리는 작은 차이도 크게 보고 흥분하는 경향도 있었다. 또한 학자들의 내면 깊숙이엔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겠다는 인정욕구가 범인들 못지 않게, 아니 범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있는 듯 했다. 이래저래, 그럴싸한 문장들 아래에 흐르는 저명한 학자들의 내밀한 욕망을 살펴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때로는 오직 그 욕망을 살피기 위해 책을 손에 드는 경우가 생겨날 정도로.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를 손에 잡은 것은 일정 부분 그런 동기 때문이었다. 악명 높은 아감벤의 『얼굴 없는 인간』을 읽은 뒤, 아감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지젝의 저작을 만나보고 싶어 좀이 쑤셨다. 『얼굴 없는 인간』이라는, 찬사와 악평을 동시에 받는 유명한 책을 어떻게 비판했는지 궁금증이 치솟았다. ‘철학자’라는 타이틀로 전지구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마지막 두 사람으로 평가되는 이들이기에, 그런 마음이 더욱 강했다. 유명 스포츠 선수들의 타이틀 매치를 보는 기분이랄까.
『얼굴 없는 인간』을 읽을 때는 ‘그래! 인류가 죽음과 유리된 문명을 이룩한 나머지 너무 생물학적 생명에 집착하고 있어. 이제 실체가 확실치 않은 병(코로나)을 가지고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모든 활동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해야 해!’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을 손에 든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생각이 뒤집혔다. 지젝은 아감벤처럼 ‘코로나가 그리 심각한 병이 아니고 인류는 하루빨리 인간다운 삶을 되찾아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지식이 우리의 일상적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가하려 할 경우, 오히려 바이러스에 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가 나타난다”고 표현한다. “바이러스에 관한 자세한 지식이 우리가 자유롭고 기품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협하는 조치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마치 아무런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자본이나 국가 같은 거대한 타자가 우리를 조종해 별 것 아닌 바이러스를 굉장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타자 또한 다른 타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존재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일축한다.
『얼굴 없는 인간』을 읽을 때 아감벤의 기품 있는 언어들에 반한 나머지,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안도한 나머지,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읽으면 코로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단정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을 손에 잡자마자, 아감벤의 주장이 가진 단순성,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의지, 몇몇 사람의 조종에 의해 세계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성이 곧바로 인식되었다. 아감벤의 책을 읽을 때는 전혀 보지 못했던 부분이, 지젝의 문장 몇 개에 의해 단박에 가시성을 띠고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코로나는 너무나 치명적인 질병이니 이 무시무시한 적군을 쳐부수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모든 일상을 접은 채 영원히 칩거하자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아감벤의 주장을 우스꽝스럽고 무책임하다고 일축하는 것도 아니다. 아감벤 같은 이들의 주장이 딛고 선 기본전제에 난 커다란 구멍을 보여주되, 그 주장에 담긴 중요한 알맹이들의 일부는 수긍하고 힘을 보탠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놓고 이분법적인 사유를 하기보다, 그런 이분법적 사유를 포함해 더 넓게 사유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팬데믹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 간의 갈등은 서로 다른 의학적 견해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심각한 실존적 갈등이다. 애리조나주에서 대담쇼를 진행하는 브렌든 딜리는 “멍청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말로 자신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말했듯, 그가 마스크 쓰기를 거부한 까닭은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다시 말하지만, 인간적 삶을 향한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에 달렸으며, 이러한 태도들은 무엇이 인간 존재인가에 관한 각기 다른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_『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164쪽
코로나가 심각한 질병이네 아니네를 따지지 않고, 코로나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초점을 두고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지젝의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하나의 장치였을 뿐, 지금 일어나는 상황들은 모두 잠복해 있다가 코로나의 출현과 함께 일제히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어떤 다른 질병을 붙잡고, 혹은 어떤 자연재해를 붙잡고, 이런 상황이 필수적으로 전개됐으리라는 생각.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 마음은 지젝의 주장 쪽으로 살짝 더 기울어 있었다. 『얼굴 없는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코로나를 일관되게 공포심의 산물로만 간주했기에, 그런 주장까지 포함해 더 넓은 차원에서 서술한 지젝의 저서가 더 설득력 있게 읽히는 건 내정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얼굴 없는 인간』이 형편없는 책이라거나 아감벤의 주장에 1도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마음의 상당 부분은 아직도, 『얼굴 없는 인간』의 주장에 동조하며 지젝의 ‘이도 저도 아닌’ 주장을 무책임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은 지젝의 책에 더 손을 들어주게 됐는데, 수치화하자면 49:51 정도였다.
어쩌면 그것은 코로나가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류의 수많은 문제를 성실하게 짚으며 문제라고 커다랗게 외쳐 보여주는 지젝의 서술방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지젝의 책으로 인해 아감벤의 주장에 내재된 유아성과 황당함을 볼 수 있었으나, 역시 지젝의 책 덕에 아감벤의 주장을 인간다운 삶에 대한 성의 있고 간절한 지향성으로 읽을 수 있었던 된 것이다.
『얼굴 없는 인간』은 문학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문장에 인류가 이루어온 문명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읽히는 아름다운 저서이다. 특히 대지를 죽은 자들의 영토인 크토니아와 수목과 꽃이 만발한 지상의 가이아로 나누어 우리가 사유해야 할 세계를 지하 깊은 곳까지 확장한 후반부의 챕터들은 압도적이었다. 메멘토 모리의 정신을 이보다 더 문학적인 필치로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강렬하고 의미심장한 책의 약점은 과학과 기술과 자본을 하나의 단일한 인격체로 상정하고 인류가 그 단일한 인격체에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유아성이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간의 간극을 또렷하게 형상화해 보여주며, 인간인 이상 끝까지 놓을 수 없는 물성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지를 밝히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논할 때 거리두기의 주체는 누구로 상정되는가? 배달하는 이, 돌보는 이, 물건을 만드는 이들은 어떻게 거리를 둘 수 있는가?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이들 혹은 심신이 건강한 이들의 눈에 비친 코로나와,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 혹은 상시폭력에 시달리거나 심신이 약한 이들의 눈에 비친 코로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현재의 모습을 구석구석 뜯어서 분리해 볼 수 있게 만든 이 명철한 저서의 약점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는 해법을 너무 단순하게 들이댄다는 점이다. 책을 쓴 목적이 대안 제시에 있지 않다고 판단해서일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대안을 너무 납작하게 제시해 오히려 역효과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석학이 누리는 세계적인 명성을 참고해보며 행간에 놓인 석학들의 무의식, 그러니까 ‘이렇게 쓰면 이렇게 읽히고 내 이미지는 이렇게 자리 매김 되겠지’라는 의도를 파악해가며 읽는 것은 독서에 따라붙는 부록 같은 별미다.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는 시대, 지구상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피엔스 종이라면 누구나 읽고 이 ‘견뎌내야 하는 시기’에 일용할 양식으로 삼을만한 책이다. 다만 반드시 두 권을 세트로, 틈을 두지 말고 연달아 읽으시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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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잠실동 사람들』등과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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