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기 때문에 (G. 정유정 작가)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192회) 『완전한 행복』
지금 제 옆에 “작가보다 소설가로 불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최근 장편소설 『완전한 행복』으로 돌아온 정유정 작가님 나오셨습니다. (2021.06.16)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최 상사의 번호는 저장돼 있었다. 그녀는 번호를 누르기 전에 생각을 해봤다. 자신이 뭘 알고 싶은 것인지. 바라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땐 어찌할 것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다. 안다는 건,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중 어떤 유의 ‘앎’은 ‘감당’과 동의어였다. 최 상사에게 묻게 될 이야기가 바로 거기에 해당되리라고, 앎을 전문으로 취급해온 13년 차 기자의 촉이 단언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정유정 작가님의 새 장편소설 『완전한 행복』에서 한 부분을 읽어드렸습니다. 정유정 작가님은 『7년의 밤』, 『종의 기원』 등에서 인간이 가진 악의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 보였죠. 또 운명이 인생을 퍽 들이받았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꾸준히 질문해왔는데요. 『완전한 행복』은 그런 정유정표 스릴러가 어디까지 관심을 두고 있는지 가늠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정유정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작품만큼이나 강렬하고, 에너지 넘치는 정유정 작가님의 이야기,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오은: 앞서 “작가보다 소설가로 불리는 게 좋다”는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작가와 소설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유정: 작가는 글 쓰는 사람들을 다 아우르죠. 방송작가도 들어가고요. 드라마 작가, 시나리오 작가, 희곡 작가 다 들어가죠. 그러나 소설가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오은: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은 어떠세요?
정유정: 그게 제일 좋아요. 저의 장래희망이 진짜 이야기꾼이 되는 거거든요. 저를 이야기꾼으로 불러주시면 나중에 맥주 한잔 사드리겠습니다.(웃음)
오은: 작가님은 아무리 바쁘셔도 운동은 늘 챙기실 것 같은데요. 책 홍보로 바쁘실 때도 운동은 꾸준히 하시나요?
정유정: 머물고 있는 호텔에 피트니스가 있어요. 가서 근력 운동도 하고, 유산소도 하고, 요가도 하고 있죠. 열심히는 못하지만 한 시간씩은 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오은: 1시간씩이면 열심히 하는 거 아닌가요?(웃음)
정유정: 그 정도는 해줘야죠.
오은: 그렇게 체력 관리를 하는 것이 글 쓰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건가요?
정유정: 크게 도움이 돼요. 장편소설은 순발력이 필요한 작업이 아니고 지구력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그래서 체력이 있어야 돼요. 체력이 없으면 산을 넘어가야 되는데 산을 돌아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소설에 바로 나타나요.
오은: 소설마다 어떤 테마 음악을 정해두고 그 곡을 들으면서 작업하시는 걸로 알려져 있잖아요. 이번 소설 작업하실 때는 어떤 음악 들으셨어요?
정유정: 이번에는 테마 음악이 주인공마다 달랐어요. 어린 아이가 나오는데요. 그 부분을 쓰면서 람슈타인의 음악을 들을 수는 없으니까요.(웃음) 그때는 주로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소설을 읽으시면 이 곡이 얼마나 으스스 하게 느껴지는지 실감하시게 될 거고요. 화자인 여주인공은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주인공의 언니예요. 이 인물의 테마음악은 소설에서 계속 언급이 되는 패티김의 ‘사랑하는 마리아’였어요. ‘서러운 마음에 꽃을 심었다’는 내용의 노래죠. 또 남주인공이 있어요. 비련의 주인공입니다. 아주 슬픈 역인데요. 그 부분을 쓸 때는 김경호 씨의 ‘비정’을 많이 들었어요.
오은: 이제 정유정 작가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내 소설 안에서는 파리 한 마리도 제멋대로 날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소설가. 여섯 살 때부터, 오일장에 오는 약장수 서커스에서 들은 이야기를 동네 아이들을 소집해 들려주곤 했다. 그러면 만담꾼보다 잘한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누군가 "너는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으면 1초도 망설임 없이 "작가가 될 거예요"라고 대답하던 정유정. 무협지를 엄청나게 읽으며 성장했고, 학교 교지 가장 앞부분에 자주 글이 실리곤 하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왜 작가가 되고 싶은지는 알지 못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던 그 밤. 열다섯 정유정은 하숙집 식구들이 모두 도청으로 나가자 무섭고 불길한 상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대학생 오빠 방으로 간다. 그곳에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고 왜 작가가 되고 싶은지 깨달았다.
어머니의 강한 반대로 국문과에 가지 못하고 간호대학에 들어갔지만 국문과 친구들 강의를 대신 듣고, 과제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그때 들었던 '교양 국어'의 교수님이 "문장을 잘 쓰는 학생은 많이 봤지만 이야기를 할 줄 아는 학생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긴 세월 자신을 믿는 근거가 되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등단할 때까지 6년동안 공모전에 11번 떨어졌는데 자꾸만 떨어져 좌절하던 정유정을 일으킨 건 헌책방에서 발견한 스티븐 킹의 소설이었다. 『미저리』와 『사계』는 책장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읽었다. 인생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삶이 눈부셨던 순간은 없었다.
글을 쓸 때 정유정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커피를 진하게 타서 책상 앞에 앉아 메탈음악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초고는 늘 노트에 손으로 쓴다. 집에는 즐겨 쓰는 지브라 1.0 볼펜 심지와 색색의 노트가 몇 상자씩 쌓여 있다. 지하철도 못 탈 정도로 지독한 방향치. 고집이 아주 세다. 매우 기분이 안 좋을 때면 헤드폰을 끼고 리키 마틴의 노래를 연달아 들으며 춤을 춘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고 왜 작가가 되고 싶은지 깨달았다고 했는데요. 정유정 작가님이 왜 이 소설에 열광했는지가 지금까지 써온 소설을 생각니까 알 것도 같았어요. 그때 어떤 느낌이었던 건가요?
정유정: 시민군이 완전히 제압을 당했을 그날이에요. 아침에 도청으로 나갔던 하숙집 오빠들, 하숙집 주인 아줌마가 다 안 돌아왔어요. 늦게 돌아왔죠. 대학생 오빠들은 아예 못 돌아왔고요. 그 새벽에 아무도 없는 하숙집에서 책을 다 읽고 창문을 열어 밖을 봤는데 비가 그쳤더라고요. 그 순간 깨달은 게 총소리가 그쳤다는 거였어요. 밤새 콩 볶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딱 그친 거예요. 진압이 됐다는 얘기인 거죠. 그러자마자 아저씨, 아줌마가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면서 하숙집 아줌마, 아저씨가 나라의 총칼 아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다 겹쳤어요. 그때 제가 막 소리를 내서 창가에 엎드려 울었어요. 울면서 나 왜 작가가 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작가가 되면 나도 독자에게 이런 새벽을 주는 작가가 되어야지, 생각했던 기억이 있어요.
오은: 이제 신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요. 작가님에게 직접 『완전한 행복』이 어떤 책인지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정유정: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방식으로 불행의 요소를 하나씩 제거하는 방식을 택한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예요. 그 나르시시스트로 인해 불행해진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소설입니다.
오은: 제목을 보자마자 ‘없음’을 이야기한 소설이구나 생각했어요. 불가능하잖아요, 완전한 행복이라는 건. 완전히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정유정: 완전한 사람도 없죠.
오은: 작가님 책을 읽을 때마다 작가님은 장면에서 시작할까 인물에서 시작할까, 궁금했어요. 이 소설은 어땠나요?
정유정: 저는 공간을 먼저 장악해야 돼요. 공간 장악이 되지 않으면 캐릭터를 어디 세워야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공간을 먼저 세팅을 완벽하게 한 다음에 캐릭터를 세워놓죠. 그 다음 상황을 생각하는데요. 상황 같은 경우, 어떤 작가는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시작하고 어떤 작가는 사건의 한 발 앞에서 시작해요. 저는 주로 한 발 앞에서 시작하는 편인데요. 이번에는 사건의 한가운데서 시작했어요. 이유는 소설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오은: 기존에 사이코패스를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하셨는데요. 이번에는 나르시시스트예요.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어떻게 나르시시스트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정유정: 여기 등장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악성 나르시시스트예요. 어떤 증상이 있어서 그것을 나르시시스트의 증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요. 스펙트럼이거든요. 보통의 사람도 이런 면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안 가지고 있으면 큰일 나죠. 건강한 자존감을 위해서 자기애가 있어야 하는데요. 이게 새카만 쪽으로 가면 그때부터는 병리적인 징후를 띠게 되는 거예요. 이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의식은 수치심이에요.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한다든가 잘못을 해서 자기 잘못이 드러나면 보통은 사과를 하거나 해결을 하겠죠.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들은 그걸 부정하거나 남에게 뒤집어씌우거나 감춰요. 그러기 위해서 거짓말을 너무 잘하고요. 또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게 공통점인 것 같아요.
오은: 사실 외양 묘사가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을 좋아하고 결국 그 인물에게 조종당하게 되잖아요.
정유정: 이 사람들은 자아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나고 상대는 ‘나를 돌봐주는 나’로 인식하는 사람들이죠. 타인과 나의 경계선이 없는 거예요. 타인을 나를 돌봐주는 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나를 돌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만들기 전까지 상대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빠르게 파악하는 재주가 있다고 해요. 다 맞춰주는 거죠. 소울메이트처럼 구니까 친해져서 마음도 주고, 돈도 주고, 뭐든 다 주게 돼요. 화장실 앞에서 핸드백 좀 들어달라고 해서 잠깐 들어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 사람의 모든 짐을 이고 지고 따라가게 되는 상황이 되는 거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에요. 사실 이런 경험은 대부분 다 있어요. 저도 그렇고요. 우리가 이런 큰 상처를 안 받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성격이 있다는 걸 알면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도망가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오은: 말씀하신 대로 세 명의 입과 눈을 통해 ‘신유나’라는 주인공이 보이는데요. 세 개의 스펙트럼 통해서 보니까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게 있더라고요. 주인공의 입에서 직접 어떤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도 다른 세 명의 시선을 종합해 보면 정말로 입체적인 인물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정유정: 이게 저한테는 문학적인 과제였어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이번에 해보겠다는 의도를 갖고 한 건데요. 이 미션을 제대로 완수했는지는 독자 분들의 평가가 나오면 알 수 있겠죠.
오은: 지금까지 나온 소설들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시켜내려 애쓴 사람들이라고 예전에 인터뷰집에서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인간은 왜 자기가 생각하는 걸 꼭 이루고자 이렇게 다른 사람은 희생해서까지 애를 쓰는 걸까요?
정유정: 인간의 욕망의 동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욕망 시리즈’ 아니겠습니까.(웃음) 그런데 이번에 나르시스 행복에 대한 욕망을 쓴 것은요. 지나친 행복에 대한 강박이 많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어요. 인간은 각자의 인간은 다 자기 자신이에요. 고유한 존재죠. 그러나 특별하지는 않아요. 누구나 다 고유성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성은 없거든요. 자기가 특별하다고 하는 환상이 집단적으로 나타났을 때 굉장히 위험해져요. 이번 소설에서 이런 부분을 한 번쯤은 짚어보고 싶었어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유정: 『니클의 소년들』을 추천하고 싶어요.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감화원을 무대로 해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요. 무서운 속도감과 흡입력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에요. 또 굉장히 감동적인 반전이 숨어 있거든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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