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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궁극의 글쓰기 장소를 찾아서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12화 (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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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새로운 환경이, 더 확실한 자극이 있어야겠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집을 나가야겠다. (2021.05.14)

궁극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도대체 기차를 얼마나 타야 이런 놀라운 작품을 쓸 수 있는 걸까.

또 시작이다. 시나리오가 안 풀린다. 자꾸 제자리만 맴도는 느낌. 너무 갑갑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름대로 환기를 해본다. 책상을 벗어난다. 소파에서 써본다. 침대에서도 써본다. 안 풀린다. 카페에서 써보고, 공원에서 써본다. PC방에서도 써보지만 계속 안 풀린다.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해본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등산을 다녀온다. 그래도 안 풀린다. 잠을 늘어지게 자고,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술도 취할 때까지 마셔본다. 그래도, 하나도, 안 풀린다. 헐. 큰일이다. 마감이 코앞인데. 이제 더는 가볼 곳도, 해볼 것도 없는데! 아무래도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환기가 필요한 것 같다. 더 새로운 환경이, 더 확실한 자극이 있어야겠다. 그러니까 이를 테면…… 집을 나가야겠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에서 뭘 하면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려 술술 시나리오를 쓰게 될까.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면 금세 포기하고 돌아올지도 모르니, 우선 경기도와 충청도는 제한다. 강원도는 친구들이 있어 심리적으로 가까우니 제하고, 경상도는 멀지만 영화제를 다니느라 꽤 익숙한 곳이 되었으니 역시 제한다. 확실히 지금은 더 낯선 풍경과 더 새로운 공기가 필요하다. 지도를 한참 보다보니 전라도에 시선이 고정된다. 가볼 기회가 많진 않았지만 갈 때마다 좋은 기운을 받아왔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첫 장편을 준비하다 심신이 무너졌을 때, 충동적으로 전라도 여행을 가서 큰 위로와 용기를 받아온 기억이 있다. 좋다. 전라도로 가자. 그때보다 더 큰 에너지를 더 많이 받아오자. 어쩐지 벌써 느낌이 좋다. 

다시 지도를 들여다본다. 지난번엔 북도에 가서 힘을 얻었으니 이번엔 남도가 어떨까 생각한다. 바다도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니, 목포와 순천, 여수가 눈에 들어온다. 목포! 늘 궁금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에도 자주 나왔고, 다녀온 이들에게 좋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제한다.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더 좋은 날, 더 좋은 이유로 가리라 마음먹는다. 그래. 이번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보상으로 놀러 가자.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는 여행은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만으로도 부쩍 힘이 난다. 

선택지는 순천과 여수로 좁혀진다. 두 도시 다 음식도 맛있고, 걸어 다니기에도 편한 재밌는 도시라고 들었다. 생각해보니 여수는 한 번 가본 적이 있긴 하다. 그런데 크게 구경은 못하고 돌아와 많이 아쉬웠다. 이번에 제대로 가볼까. 어쩌면 완전히 낯선 순천보다는 조금은 익숙한 여수가 좀 더 편할 지도 모르겠다. 순천보다 여수가 좀 더 멀기도 하고. 좋다. 여수에 가자. 가서 바닷바람 잔뜩 쐬면서, 맛난 음식도 종류별로 먹고, 구석구석 많이 돌아다니자. 편안한 자유를 만끽하다보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려나갈지도 모른다. 진짜 신난다.  

교통편은 어떻게 할까. 서울에서 여수까지는 35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꽤 먼 거리다. 이동하다 지치지 않아야 한다. 비행기를 타면 45분밖에 걸리지 않고 가격도 괜찮다. 하지만 공항과 도심을 오가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으므로 제한다. 남은 건 기차와 버스. 보통 기차는 시간을 절약하고 버스는 돈을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내겐 그보다 중차대한 이슈가 있다. ‘화장실에 언제든 편히 갈 수 있는가(기차)’와 ‘휴게소에서 호두과자를 사 먹을 수 있는가(버스)’의 문제다. 늘 화장실이 이기지만, 이번만큼은 갈증을 참고 따끈한 호두과자를 먹어볼까 고민해본다. 벌써 군침이 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일화가 떠오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기차를 타고 출장을 오가던 중,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인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구상하고 완성했더라는…… 지체 없이 기차를 선택한다. 그리고 편안한 좌석에 앉아 접이식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치는 나를 상상한다. 서울을 벗어나기도 전에 영감이 솟구쳐 바깥 풍경을 볼 새도 없이 자판을 두드리게 될 지도 모른다. 여수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작업을 반 이상 마치고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게 될지도. 너무 좋은데? 가슴이 뛴다. 


언젠가 이런 기차를 타고 이런 곳에 가서 명작을 쓸 수 있겠지.
(사진_ 언스플래쉬)

이제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았다. 최상의 숙소를 찾아야한다! 잠시지만 집이자 작업실이 될 공간이니 모든 조건을 세심하게 파악해야 한다. 보자. 일단 차가 없으니 걷기 편하고 대중교통이 쉽게 닿는 곳이면 좋겠다. 또 여자 혼자니 객실 수가 너무 적지 않고 안전한 지역에 위치한 곳이면 좋겠다. 그리고 글을 써야하니 당연히 좋은 책상이 있으면 좋겠고, 숙면을 취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니 좋은 침대가 있으면 좋겠다. 기분 전환을 위해 욕조가 있으면 좋겠고, 기왕 바다 옆으로 가니 오션뷰라면 더 좋겠다. 그렇게 온갖 ‘좋겠는’ 조건들에 부합한 아름다운 숙소들의 목록을 천천히 바라본다. 나는 그냥…… 돈이 많으면 좋겠다.

다시 검색을 시작한다. 결과를 ‘추천 많은 순’에서 ‘가격 낮은 순’으로 살포시 바꿔 본다. 그래도 최후의 소신은 지키려 노력한다. 분명 여인숙의 외관인데 호텔이라 우기는 곳, 도보 이동이 가능하다며 산골짜기에 위치한 곳, 하나뿐인 만점짜리 리뷰에서 사장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곳 등은 제한다. 그러자 5분 전에 충분히 감상한, 훌륭하지만 충격적으로 비싼 호텔들을 다시 만난다. 어렵다. 여기서 막힐 줄이야. 이건 절대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민이 깊어진다. 글을 쓰기 위해 이렇게 과한 지출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글을 쓰러 가는 건데 일정 지출은 필요하지 않을까. 자아가 분열한다. 그런데 또 갑자기 이런 일화가 떠오른다. 김영탁 감독님이 여행하던 중, 스리랑카 콜롬보의 한 아늑한 호텔에서 꼬박 40일 동안 써 내려간 소설이 바로 희대의 명작 『곰탕』이라는…… 망설임 없이 제일 ‘좋겠는’ 호텔에서 묵기로 결심한다. 지옥의 도돌이표 같은 작업에서 빠져 나와 위대한 작품을 쓰는 비용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합리적이다 못해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좋다. 최고의 호텔로 가자. 가서 최고로 멋진 글을 써 오자! 만세!


김영탁 감독님의 『곰탕』. 마침 부산 출장 중에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손을 놓을 수 없어 밤을 꼴딱 새워 다 읽었다. 소설은 마지막 문장까지 좋았고, 일은 하나도 못했던 기억. 

이제 결제만 남았는데 벌써 자정이 넘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눈이 감기더라니. 하루 종일 좋은 작품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짜느라 정말 고생했다. 이렇게 분명한 결정들을 시원시원하게 내려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다 드디어 한 발 앞으로 나아간 기분도 든다. 정말 기분이 좋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나머지는 이부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내일은 새벽 5시쯤 일어나야지. 얼른 샤워를 하고 짐은 단출히 싸자. 옷가지랑 세면도구랑 노트북이랑 책도 몇 권 가져가고 싶은데 너무 무거우려나. 역시 차가 있어야 되나……. 그러고 보니 기차 예약도 아직 안 했네. 몇 시 차를 타야 하나. 호텔 체크인 시간에 맞추면 좋은데……. 그냥 호텔 예약까진 하고 누울 걸 그랬나. 그러면 얼리 체크인을 요청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요즘 호텔들 사람 많으려나. 코로나 시국인데 나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거 아냐. 시나리오 좀 안 풀린다고……. 생각해보니 그러네. 작품과 건강을 바꿀 순 없는데……. 오며가며 피로만 쌓일 수도 있는데……. 아…… 알람 맞추기 귀찮다……. 그냥 집에서 쓸까……? 다시 힘내서 잘 해보면 되지 않을까……? 역시…… 집이 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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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가은(영화감독)

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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