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좋은 빵 나쁜 빵 이상한 빵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8화
넌 대체 내 삶에 어떤 은유가 되려고 온 거니.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요망한 빵! (2021.03.19)
영화 <우리집>의 프리프로덕션으로 한참 정신없던 봄날, 하루는 영화사 아토의 김지혜 대표님이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조용히 불러다 앉혔다. ‘대표님’이란 호칭보단 ‘언니’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한 그녀는 걱정대장인 나를 늘 다독이며 안심시키는 든든한 선배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생전 처음 보는 깊은 수심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지금 정도면 나름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진짜 아니었나……?? 불안이 용암처럼 샘솟아 식은땀이 다 났다. 심각한 표정의 그녀를 훔쳐보며 손톱만 깨물었다.
뭘까? 뭐가 문제지? 어디서 비슷한 영화가 먼저 나왔나? (누가 이런 걸 만드니) 갑자기 제작지원금이 취소됐나? (그럴 리가) 스태프가 문제라도 일으켰나? (너무 열심인 것도 문제라면) 배우가 못 하겠다고 했나? (어제도 리허설했는데) 콘티 회의가 너무 길어지고 있나? (설마 그런 이유로) 시나리오 수정이 잘못되고 있나? (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혹시 내가 중심을 못 잡고 있나? (아니 나도 사람이니까 가끔은) 나의 자질 부족을 드디어 알아차린 건가? (어떻게 벌써 알았지) 나 오늘…… 짤리나? (제발 정신 차려)
점입가경으로 요란해지는 걱정 퍼레이드를 막지 못한 채, 일단 무릎부터 꿇고 읍소할까 싶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문득 대표님이 한숨을 푹 쉬며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감독님, 제발 빵 좀 그만 사와요…… 저것 봐. 많아서 다 먹지도 못해!”
작은 사무실 안, 탕비실 역할을 하고 있는 긴 테이블 위에 내가 한 주 내내 사온 빵 다섯 봉지가 나란히 줄지어 놓여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서로 다른 빵집에서 데려온 다양한 종류의 맛있는 빵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사이좋게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왜 자꾸 사비로 간식을 사? 우리 돈 있다고! 자꾸 이러면 나 정말 속상해!”
그랬구나. 그거였어. 그녀는 내가 넉넉지 않은 저예산 작업에도 기꺼이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 고마워 매번 비싼 간식들을 사와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나를 그렇게나 세심하고 따뜻한 감독으로 생각해주다니. 정말 감동이었다. 감동인데 언니…… 그런 의도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대체 왜 매번 빵이겠어…… 정말 중요한 건 빵이라구 언니…….
사실 매일 빵집에 들러 빵을 구경하고, 맛보고, 사오는 일이, 당시 나의 가장 강력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마침 사무실도 맛난 빵집들이 즐비한 동네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괴로움이 치사량에 달할 때면 황급히 달려 나가 응급처치할 곳들이 사방에 넘쳐났다.
빵집에 관한 한 모든 순간이 사랑이고 평화였다. 빵집 문을 여는 순간 버터향이 충만한 갓 구운 빵 냄새가 솔솔 풍겨오면, 종일 빳빳하게 굳어 있던 목덜미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게 한껏 부풀어 오른 아름다운 모양의 빵들, 입속에 넣을 때 얼마나 따끈따끈하고 촉촉할지, 목구멍을 넘어가면서는 또 얼마나 고소하고 달콤할지 절로 상상이 되는 빵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시끄럽고 복잡했던 속이 잠시나마 고요해졌다. 거의 명상에 가까웠다. 나는 놓아버리고 빵을 채워나가는 복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은혜로운 빵들을 하나하나 골고루 다 맛볼 수 있다면 나는 또 얼마나 단순해지고 행복해질까. 그렇게 세상의 모든 시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더 기쁜 마음으로, 더 좋은 작품을,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도 진정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이미 빵이 한가득 담긴 봉지를 들고 빵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세상을 구한 기분으로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빵을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빵에 대한 나의 애끓는 진심이 무색해질 만큼, 빵은 내 몸에 꽤 해로운 음식이다. 이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진실이 매일 충돌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내 인생에 이보다 더 큰 딜레마는 아마 없을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백하면 다들 빵 터지며 웃고 마는데, 내겐 정말 빵이 터져버린 것처럼 지극히 슬픈 현실이다. 헤어나오기 힘든 고통이다. 빵을 먹으면 먹을수록 내 몸은 점점 약해진다. 일단 소화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눈이 종종 붓거나 시리고, 피부가 가렵고 따갑고 화끈거릴 때도 있다. 근육의 힘도 점점 빠져나가 작은 활동에도 쉽게 지친다. 기분은 끝없는 우울로 계속 가라앉는다. 대체 요즘 왜 이러지 싶어 돌아보기 시작할 때는 이미 온몸의 면역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뒤다. 발견은 늘 너무 늦고(빵 먹느라),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건강을 다시 회복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빵과 작별해야 한다).
빵이야 말로 내 인생 최고의 미스터리다. 입에는 최고의 기쁨을 선사하면서, 왜 몸속에만 들어가면 최악의 사태를 일으키는 걸까. 신은 왜 내게 빵을 즐길 수 없는 몸을 주시고, 어찌하여 빵맛은 골고루 잘도 알게 하셨나. 매혹과 혼돈의 빵이여. 넌 대체 내 삶에 어떤 은유가 되려고 온 거니.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요망한 빵!
나의 한계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빵에 대한 애정 역시 놓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양손 가득 빵을 산다. 내가 먹을 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선물할 빵을 산다는 것(그리고 나는 그냥 맛만 볼 거라는 것……). 그보다 더 좋은 핑계를 아직 찾지 못했다. 빵을 고르는 내내 나는 몸에게 말한다. 에이. 괜찮아. 걱정 말래도. 이건 정말 나를 위한 게 아니야. 사람들을 위한 거라고. 생각해봐. 친구들이 이렇게 맛난 빵을 먹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겠어? 지친 동료들이 이 빵을 배불리 먹으면 얼마나 힘이 나겠냐고! 나는 그냥 누군가 권하면 한두 조각 먹는 척만 할 거야. 진짜야. 아니 그걸 어떻게 거절하겠어? 내가 사갔는데, 나만 안 먹으면 좀 이상하잖아. 딱 거기까지야. 그 정도는 맞춰 줘야지. 안 그래?
아…… 쓰다 보니 또 빵 먹고 싶다. 작품 준비를 더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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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