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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베어야만 만들지만, 누구보다 나무를 사랑하는 책

『나무의 세계』 편집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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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작물의 유전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이 원하는 형질을 가진 식물을 얻기 위해 근친교배를 하다 보니 유전자 변이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찾아올 지구적인 변화에 반드시 필요한 대비책이다. (2020. 07. 01)


우리 집에 올리브나무를 들인 지 정확히 1년 9개월째다. 동네 식물 가게에 들어가 우연히 만나 데려온 아이인데, 나에게는 꽤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기특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올해 5월경에 조그만 꽃을 피우더니 지금은 ‘진짜 올리브’로 보이는 열매를 키우는 중이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직접 본 적 없던 나로서는 (비록 좁은 베란다라는 환경일지라도) 그 과정이 어떤 자연 다큐멘터리보다도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이런 나의 식물에 대한 관심은 『나무의 세계』를 작업하면서 한층 커졌고, 지금은 (나름 진지하게) ‘산림기사’ 자격증의 조건까지 검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나무 일러스트가 황홀하게 다가와 이 책을 선택했다면, 작업을 진행하면서는 나무들이 지닌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에 반했고, 완성된 책을 받아든 지금은 매일 나와 마주치는 나무들이 어떤 이야기를 지니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무를 베어야만 만들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있긴 하지만, 내가 나무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길은 『나무의 세계』 같은 책을 통해 식물과 공존해야 하는 필요성을 알리는 일일 것이다.

-    한소진, 편집자

2년 전 이 책의 의뢰를 받고 PDF 파일을 열자마자 이 책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 영국의 큐 왕립식물원 기념품점에서 보았던 식물 책들이 생각났다. 신기하게 컴퓨터 화면 속 글과 그림만 보고도 이 책의 종이질까지 느껴졌다. 내게 없는 재주를 가진 누군가가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넣은 원색의 식물도감이라면 출판사가 번역가에게 제공하는 작업용 원서를 받아 내 책장에 꽂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작업할 가치가 있었다. 굳이 내용을 읽지 않아도 가끔 꺼내 페이지를 넘기며 그림을 보는 것으로 힐링이 되는 그런 책이니까. 옮긴이가 아닌 독자로서 첫눈에 끌린 책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어차피 식물 분류는 내 전공이다. 모처럼 전공을 살리는 책을 작업할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책의 원제는 ‘Around the World in 80 Trees’다.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Around the World in 80days)』에서 따온 제목이다. 소설 제목에 맞춰 이 책의 제목을 번역하자면, ‘80일간의 세계 나무 일주’쯤 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80가지 나무가 나온다. 저자 조너선 드로리도 소설 속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처럼 자신이 사는 런던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움직이며 나무를 소개한다. 그런데 이 책이 그림 위주의 도감일 거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이 책은 ‘이야기’ 책이었다. 그리고 예민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것 같은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나무 그림들이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거들었다. 사실 저자가 ‘들어가는 말’에서 대놓고 이 책은 나무 이야기라고 했는데도 선입견에 사로잡힌 내 눈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어떤 나무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을까. 저자는 어떤 기준으로 그 수많은 나무 중에서 80가지를 정했을까. 내 생각에 그 기준은 철저히 인간적이다. 저자는 인간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무들을 골랐다. 그리고 그 관계의 성격은 ‘효용성’이다. 이 책은 인간에게 가장 효용 가치가 있는 나무들의 이야기다. 그 가치란 척박한 환경에서 식량을 제공하는 생존 수단(대추야자, 모파인나무)에서부터, 과실수, 식재료(올리브나무, 아르간나무, 중국왕초피나무, 호호바나무), 섬유(케이폭나무, 뽕나무), 향료(유향나무), 공예 재료(옻나무), 고무(파라고무나무), 치클(사포딜라), 타닌(탄오크), 사회적 윤활유(콜라나무, 빈랑나무), 정원수(서양회양목, 지중해사이프러스), 장난감 (마로니에), 니켈(세브블루), 가로수(단풍버즘나무, 자카란다), 염료(브라질나무), 카페인(요폰호랑가시나무), 건축 자재(오리나무, 잎갈나무), 치료제(흰버들, 용혈수), 최음제(마르멜로), 살충제(님나무), 절연제(구타페르카), 코르크(코르크참나무), 음향목(독일가문비나무)까지 물질적인 가치가 되기도 하고, 사생활 보호(레일란디측백), 수호의 상징(백자작나무), 회합의 장소(유럽피나무, 반얀나무), 숭배의 대상(바오바브나무, 인도보리수)까지 정신적인 가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산업적인 가치는 없지만 저자가 환경적인 가치가 뛰어나다고 본 레드망그로브도 있다. 블루콴동, 휘파람가시나무, 울레미나무처럼 인간에게 직접적인 효용성은 없지만 경이로운 진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간접적 가치가 있는 나무도 이 책에 등장한다.

이 책에 나오는 나무들은 참으로 고마운 나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가 나무 자신에게도 가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책은 인간에게 쓸모 있는 가치가 나무 자신에게는 독이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의 몇 군데에서 ‘몰락의 원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몰락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나무다. 나무가 수억 년 동안 저의 생존을 위해 키워온 능력이 어쩌다 인간의 눈에 들어 탐욕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몰락의 원인이 되고 만 것이다. 쓸모가 많은 나무일수록 말로는 처참했다. 씨가 마를 정도로 베어가는 바람에 수만 년을 자리 잡고 살아오던 터전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타향의 플랜테이션에서 클론으로 대량 재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재앙은 나무에게만 내리지 않았다. 잘나고 능력 있는 나무와 윈윈 관계를 유지하며 수천 수백 년 동안 조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삶의 수단이었던 나무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국의 나무들에게 터전을 내어주어야 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들에게는 발전한 과학과 기술을 토대로 타국의 나무에서 기가 막히게 쓸모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이들은 그 나무들이 제 것인 양 마음껏 가져다 쓰고는 채워두지 않았다. 훌륭한 목재였던 오스트레일리아 자라나무가 유럽에서 저질의 스웨덴 목재보다 싸게 팔릴 정도였으니. 그것도 모자라 남의 나무를 두고 저들끼리 전쟁까지 벌였다. 식민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었던 유파스나무와 반대로 식민 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말라리아 치료제 키나나무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안타깝게 읽힌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일까. 100년, 200년 전에 그렇게 인기 있던 많은 나무들이 지금은 합성물질로 대체되어 쓸모를 잃었다. 차라리 쓸모 있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내버려지고, 그렇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그렇지 않으면 플랜테이션에서 대량 재배되거나, 작물들은 근친교배로 유전 다양성을 완전히 잃고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식량 기계가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작물의 유전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이 원하는 형질을 가진 식물을 얻기 위해 근친교배를 하다 보니 유전자 변이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찾아올 지구적인 변화에 반드시 필요한 대비책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나무의 쓸모를 좀 더 현명하게 이용하자고 말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원색의 세밀화 뒤에 숨어 있는 이 책의 진정한 이야기일 것이다.

-    조은영, 역자



나무의 세계
나무의 세계
조너선 드로리 저 | 조은영 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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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소진(시공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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