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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위 고양이] 언젠가, 커피 - 오은

북크루 ‘작가 에세이 구독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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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여럿 있었다. 가령 이런 것.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커피는 내게 환대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2020. 06. 30)

언스플래쉬


북크루에서 만드는 에세이 구독 서비스 <책장 위 고양이>에서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에세이를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소개합니다. 

<책장 위 고양이>는 7명의 작가들이 돌아가며 1편의 에세이를 

매일 배달하는 구독 서비스입니다. 

//www.bookcrew.net/shelley


나는 늘 한 발 늦는다

얼마 전 정은 작가가 쓴 『커피와 담배』를 읽었다. 커피와 담배라니, 동명의 짐 자무시 영화가 떠오르다가도 이 둘의 조합은 언제부턴가 내 일상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담배부터 찾게 된 지, 그리고 커피를 마셔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고 느낀 지 제법 오래되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하루에 넉 잔 이상의 커피를 마셨던 것 같다. 출근길 각성을 위한 커피, 점심시간의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커피, 오후의 식곤증을 물리치는 커피, 야근을 위한 커피…

책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여럿 있었다. 가령 이런 것.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커피는 내게 환대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내 테이블에 커피가 놓이면 나는 잠시 동안 그 도시에 받아들여진 느낌이 들었다.” 커피는 여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기호식품이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것을 쫓고 쫓기듯 갈구했다. 에스프레소를 한 입에 털어 넣은 뒤, 카페인을 충족시켰으니 얼른 일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았다. 커피는 매일 “환대의 자리”가 아닌 ‘환멸의 자리’에 놓였다.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커피 기구를 사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게 되면 사라진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이고 드리퍼와 여과지를 구입했다. 캡슐 커피 머신과 수동 그라인더까지 사고 나니 나만의 커피 라이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았다. 이런 기세라면 바리스타 자격증도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동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가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원두의 고소한 냄새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갈리는 소리도 참 좋았다. 21세기의 맷돌이 수동 그라인더가 아닐까 생각하고 웃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커피 기구를 사면 살수록 여유는 점점 부족해졌다. 비단 시간적 여유뿐 아니라, 주방 공간의 여유도 덩달아 사라졌다. “이건 또 언제 샀대?” 서울에 올라온 엄마가 찬장을 열어보고 혀를 끌끌 찼다. “한 번도 안 쓴 거네. 먼지 보관 용기야?” 엄마의 쓴소리는 에스프레소 더블 샷보다 더 썼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치커피 기구를 구입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커피 기구 구입을 멈추었다. 한 방울 한 방울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빨리 더 빨리’, ‘많이 더 많이’의 세상에서 장시간에 걸쳐 우려내는 방식은 시간을 거스르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사를 하면서 사 모았던 커피 기구들을 주변에 나누었다. 어느새 나는 커피를 좋아하다가 어떤 계기 때문에 갑자기 싫어하게 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커피를 좋아하지만 커피 만드는 공정을 싫어한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수동 그라인더를 건넬 때 망설임의 시간이 가장 길었다. ‘커피콩 가는 시간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와 ‘좋은 추억이 있을 때 빨리 넘겨!’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수동 그라인더를 받은 친구는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전동 그라인더 사는 거야?”

수동 그라인더를 넘기고 돌아오는 길에는 드립백과 더치 원액을 구입했다. 최소한의 수고를 들여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게 나란 인간이다. 이걸 깨닫기 위해 시간과 자본을 과하게 투자한 셈이다. 『커피와 담배』를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리질하게 된 부분이 있다. “커피는 유일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영역이고 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었다. 커피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대접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커피는 민주적이다. 커피는 쉽게 손을 내밀어준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발을 반쯤 걸치고 삶의 여유를 꿈꿔볼 수 있게 한다.” 구구절절 맞는 소린데, 나는 왜 커피와 여유를 맞바꾸었을까.

커피가 담배를 부르고 담배가 영화를 부르듯, 간만에 나는 커피를 마시며 뭉게뭉게 상상의 구름을 피워 올린다. 더치커피 기구를 받은 친구는 지금도 그것을 잘 사용할까? 한 방울 한 방울 가까스로 떨어지는 커피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수동 그라인더를 받은 친구는 하루 중 언제 커피콩을 갈까? 커피콩이 갈릴 때 나는 소리 덕분에 괜스레 미소를 짓곤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전동 그라인더의 가격은 얼마지? 정신 차리자. 상상의 구름이 먹구름이 되기 직전, 나는 현실로 귀환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건 나뿐이다. 나는 늘 한발 늦는다.


<오은 작가의 말>



진희경과 하유미가 나오는 <커피 카피 코피>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15세 관람가’라고 되어 있지만, 열세 살 때 이 영화를 보았다. 커피를 마시면서 좋은 카피를 쓰기 위해 코피를 쏟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던 나는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다. ‘열다섯 살이 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한발 앞섰다고 생각했을 때조차 한발 늦었던 셈이다.


<셸리의 말>



짐 자무쉬 좋아하오? 나 셸리는 그의 《커피와 담배》를 좋아하는 고양이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휴가》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도 애호하오. (내 보기에 바이런과 매리 셸리가 누구인지를 구태여 주절주절 설명하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국문 자막은 다소 구질구질했소만, 하기사 목숨이 아홉 개가 아닌 까닭에 그들과 벗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유용한 구석이 있었겠구려.) 실상 금주의 주제가 《커피》로 정해진 이상 충분히 기대할 바였겠으나 그래도 오은 작가가 짐 자무쉬와 《커피와 담배》를 언급해주니 반갑소.

각설, 《커피가 담배를 부르고 담배가 영화를 부르듯》이라는 오은 작가의 말이 기분 좋소. 나 셸리는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는 까닭에 그 담배와 영화로의 연쇄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은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난 후니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싶어지는 것이오. 느긋하게 영화를 보며 늘어져 있고 싶은 날이오.

그대는 영화를 좋아하오? 커피도 좋아하오? 커피를 마시면 담배 생각이 나고 영화 생각이 나고 하오? 시시콜콜하더라도 좋으니 shelley@bookcrew.net으로 기별해주시오. 게시판에 글을 써주는 일도 좋소. 오늘의 추신은 나 셸리의 기분대로, 그저 짐 자무쉬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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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은(시인)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너랑 나랑 노랑』 『유에서 유』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등을 썼으며,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커피와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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