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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어두운 날들은 어둡게, 추운 기억은 춥게

<월간 채널예스> 2020년 4월호 틸리 월든 만화 『스피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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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그래, 멋지구나.”이라고 대답하며 그를 꼭 안아주는 첼로 선생님 빅토리아의 모습은 인상 깊다. 누구나 자신의 길은 혼자 달려가게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링크 위에서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의 존재는 소중하다. (2020.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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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잠실에는 아이스링크가 있다. 거대한 유리 천장을 통해 자연광이 환하게 들어오는 곳이다. 넘어져있는 시간이 일어서 있는 시간보다 짧지만 연거푸 웃는 초보 어린이 스케이터들은 보고만 있어도 신난다. 얼음의 결을 고르는 정빙 시간이면 간식을 파는 가게들마다 주문하는 달콤한 목소리가 가득 찬다. 그런데 새벽과 한밤중이면 이 아이스링크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반인 개방이 종료되고 나면 이곳을 대관한 어린 선수들이 하나 둘 들어와 몸을 풀고 스케이트를 신는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훈련은 종종 아주 늦게까지 강도 높게 이어진다. 새벽 대관은 여섯 시부터인데 이 시간도 마찬가지다. 코치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얼음을 지치는 선수들의 칼날 소리만 들린다. 우연한 기회에 새벽과 한밤의 아이스링크에 앉아서 그들의 연습을 꾸준히 지켜본 적이 있는데 어슴푸레하면서도 서늘한 느낌을 잊지 못한다.

 

한 사람의 성장도 새벽 아이스링크가 품고 있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성장기 대부분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빙판에 혼자 발을 들여놓을 때처럼 캄캄하고 냉정한 순간으로 채워져 있다. 타인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이해받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이 칼날처럼 마음의 복판을 스치는 시기다. 링크 밖에서 날아오는 구령은 멈출 줄 모른다. 『스피닝』 의 작가 틸리 월든은 그 무렵의 얼음장 같은 시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응원으로 얼버무리지 않고 어두운 날들은 어둡게, 추운 기억은 춥게 그린다. 적정 온도로 유지되었던 캡슐에서 바로 꺼낸 것처럼 청소년기의 살아있는 감정들이 만져진다.

 

1996년에 태어난 틸리 월든은 데뷔작인 『여름의 끝(2015)』으로 스무 살이 되던 해인 2016년에 이그나츠 어워드의 뛰어난 작가상을 받았고 『아이 러브 디스 파트(2015)』 로 같은 해 같은 상의 신인상도 나란히 수상했다. 이어서 발표한 장편 그래픽노블 『스피닝(2017) 아카데미로 불리는 아이스너상을 받았다. 단편 『아이 러브 디스 파트』 청소년기의 불규칙하게 증폭되는 감정과 그 안에서 엇갈리는 사랑을 그린 간소하고 유려한 작품이다. 이 만화에서 영영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알리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퀴어 커플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이기도 하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널 어떻게 미워해.”라는 말로 자신들의 감정이 확고한 것임을 받아들인다.

 

『스피닝』 도 자전적인 이야기이지만 한결 본격적이다. 틸리 월든은 어려서부터 12년 동안 피겨 스케이팅과 싱크로나이즈드 스케이팅 선수로 지내다가 선수 생활을 접고 만화가가 됐다. 아무도 없는 새벽 링크에 가장 먼저 출석해 연습에 몰두했던 주인공은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어떻게 해서든 넘어지고 싶지 않아서 버티던 순간들을 수많은 컷으로 낱낱이 고백한다. 겨우 하나의 길모퉁이를 돌면 강해져야 할 이유가 기다리고 있었던 날들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있다고 믿었던 힘이나 속도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계속 스케이트를 타야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첫사랑도 스케이팅 못지않게 어렵다. 힘겹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그래, 멋지구나.”이라고 대답하며 그를 꼭 안아주는 첼로 선생님 빅토리아의 모습은 인상 깊다. 누구나 자신의 길은 혼자 달려가게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링크 위에서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의 존재는 소중하다.  

 

이 책은 ‘1장, 왈츠 점프’로 시작해 스크래치 스핀, 플립 점프, 악셀 등 스케이트 전문용어가 장 제목으로 등장한다, 맨 마지막 10장은 트위즐로 끝난다. 트위즐은 한쪽 발을 이용해 최소한  한 번 이상을 순방향 또는 역방향으로 빠르게 도는 아이스 댄스의 기술이다. 빙판을 떠나기로 결심한 주인공이 귀갓길에 눈을 크게 뜨고 우는 장면은 몹시 아프고 여운이 길다. 그러나 틸리 월든은 우리가 트위즐을 할 때처럼, 언제든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반대 방향으로 새롭게 회전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운동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여성 롤러더비팀 선수들의 성장을 그린 빅토리아 제이미슨의 그래픽 노블 『롤러 걸』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고교 1학년 컬링 선수 차을하의 이야기를 다룬 최상희의 『그냥 컬링』 도 흥미로운 스포츠 서사다. 조금 더 어린 독자라면 실제 어린이 여자 축구부 감독이었던 경험을 살려 쓴 유우석의 동화 『축구왕 이채연』 나 바닷가 마을 어린이 축구팀의 이야기를 다룬 김혜온의 동화 『FC 해평, 거북바위를 지켜라』 등이 연결해서 읽기 좋은 작품들이다.

 

 

 

 

 


 

 

스피닝 틸리 월든 글그림/박다솜 역 | 창비
피겨 스케이팅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겪는 폭력과 따돌림, 첫사랑, 커밍아웃 등의 사건들을 담담하게 서술하며 혼란스러운 성장기의 문턱을 넘어온 이들에게 아릿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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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거짓말하는 어른』을 썼고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인어를 믿나요』, 『홀라홀라 추추추』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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