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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의 잘 읽겠습니다] 뭐였을까

<월간 채널예스> 2020년 4월호 신해욱 시집 『무족영원』, 『syzy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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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쯤의 시간이 더 지나고 얼마 전 출간된 신해욱의 시집 『무족영원』(문과지성사, 2019)을 읽었다. 마지막 시 「여름이 가고 있다」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는데, 이런 구절들 때문이다. (2020.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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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처음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읽었을 때 나는 좀 슬펐다. 이 세 쪽짜리 소설의 줄거리는 어렵지 않게 요약될 수 있다.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하는 시골 사람과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는 문지기. 시골 사람은 허가를 받을 때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도 봤다가,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해 값진 물건을 바쳐도 봤다가, 그의 기분을 관찰하다 외투의 벼룩까지도 알아볼 지경이 된다. 하지만 결국 시골 사람은 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평생을 서성이다가 시력도 잃고 몸도 스러져간다. 시골 사람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입장에 실패한다. 추구하는 바로부터 거절당하고, 닿으려 할수록 멀어지고,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세계가 이렇게 짧은 줄거리에 응축되어 있다니. 슬프지만 납득은 되었다. 어쩌면 삶은 이런 대화의 영원한 반복인 것이다. : -들어가도 됩니까? -아니요.

 

그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고 신해욱의 시집 『syzygy』 (문학과지성사, 2014)를 읽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가 부제로 달린 「문지기」에서 시골 사람은 “스물 몇 개의 꿈을 한꺼번에 꾸다가 힘에 부쳐 기절을 한 것처럼” 쓰러져 있다. 법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에 부려진 채로. 카프카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신해욱의 시에서도 세계는 미지의 것, 모호한 것, 닿을 듯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것 같다. “들어가도 됩니까?”라는 물음에 영원히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문지기처럼, 너무 명백한 거부여서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알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세계.

 

이를테면 「이렇게 앉은 자세」도 그렇다. “땅속에는 깊은 줄거리가 있다고 하지.//실을 따라가듯 줄거리를 짚어가면/나는 제3의 인물이 된다고 하지./줄거리의 끝에서/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고 해.” 만약 이 세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면, 땅 속 깊은 곳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줄거리가 아닌 다른 줄거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실을 붙잡듯 그 이야기를 따라갔더니, 그 세계에서는 내가 나 자신에게도 알 수 없는 제3자로 배제된다고 한다. 그리고 너와 나는 서로를 알아볼 수도 없이 멀어져 있다고 한다.

 

그쯤의 시간이 더 지나고 얼마 전 출간된 신해욱의 시집 『무족영원』 (문과지성사, 2019)을 읽었다. 마지막 시 「여름이 가고 있다」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는데, 이런 구절들 때문이다. “여름이 가고 있다 여념이 없었지//여름이 가고 있다 뭐였을까//뭐라도 하며 나는 그의 환심을 사고 싶었지만 같은 시간의 같은 사건 속에 우리가 엮일 수는 없었습니다//(..)//여름이 가고 있다 우리를 이루는 서로 다른 물질//(..)//놓고 왔을 리가 없다 뒤를 돌아본다//놓고 왔을 리가 없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 그의 곁에 있었던 지난여름을 기억해보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와 나는 서로 너무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엮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놓고 왔을 리가 없다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묻는다. 뭐였을까. 지난여름은 뭐였을까. 가끔은 이것이 불가해하고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대하는 최대치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꿈결인 듯 뒤를 돌아보면서 가까스로 이렇게 말해보는 것. “들어가도 됩니까?”라고 물으면 여전히 “아니요.”라는 말을 듣겠지만, 그러니까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는 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남겨둔 듯 뭐였을까 하고 돌아보는 일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 아름다움을 신해욱의 시가 알려주었다.

 

 

 

 


 

 

syzygy 신해욱 저 | 문학과지성사
섬세하고 견고한 구조주의자답게 시인은 각각의 장에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담아놓고 있다. 여기에 동참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다음 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무족영원 신해욱 저 | 문학과지성사
지금껏 시도해온 ‘1인칭의 변신술’을 오롯이 체화하여 스스로를 “반원”(「π」)의 형상에 가둔다. 다리 없이, 앞을 내다보는 눈도 없이 땅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무족영원류가 되어 자신만의 웜홀을 통해 “세계의 심장”(「영구 인플레이션에서의 부드러운 탈출」)을 찾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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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인아영(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비평집 『문학은 위험하다』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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