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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백일해 백신 개발자 펄 켄드릭과 그레이스 엘더링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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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펄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백일해 환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인지 우울증 환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했다. 코로나 19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 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얼핏 겹치는 모습이다. (2020. 03. 16)

연구실에서 실험자료를 관찰중인 펄 켄드릭.jpg

연구실에서 실험자료를 관찰중인 펄 켄드릭

 

 

요즘은 듣기 어려운 말이지만, 예전엔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여성의 자존감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이 속담의 뿌리는 아주 깊다. 선사 시대 인류가 사냥감으로 연명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절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몸이 약한데다가 아이 낳고 키우느라 다른 데 힘쓸 여력이 없었으므로 남성의 리더십에 순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사냥감을 쫓든, 적을 쫓든, 삶이 전투의 연속이었던 남성들은 지배와 피지배가 전부인 수직적 리더십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회질서상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기어오르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수탉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4차 산업 혁명의 기술 혁신에서 뒤지 않으려면, 지배와 피지배의 질서보다는 창의성과 협업이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21세기는 3F시대라고 한다. 남성 지도자들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3F, 즉 여성성(Feminity), 감성(Feeling), 상상력(Fiction)을 기반으로 한 수평적 리더십을 이 시대가 필요로 하고 있다.

 

 

펄 켄드릭.jpg

펄 켄드릭

 


백일해 백신 개발자 펄 켄드릭은 이런 리더십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 미국 일리노이 주 휘튼에서 태어난 펄 켄드릭은 어린 시절 백일해를 앓고 겨우 살아남았다. 당시엔 공기를 통해 무서운 속도로 퍼지는 전염성 질병인 백일해의 마땅한 치료약과 백신이 없어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자가 꿈이었던 펄은 1919년 뉴욕 주 보건부의 연구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남성 과학자들이 전쟁터로 떠난 연구소에선 생각지도 못한 기회의 문이 여성을 향해 열리는 일이 많았다. 성실한 펄은 곧 연구소의 최고관리자로 승진해 주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소중한 연구 파트너 그레이스 엘더링이 있기 때문에 더욱 힘이 났다. 그레이스는 연구소의 자원봉사 인턴을 하기 위해 교사라는 직업과 고향까지 버리고 올 정도로 과학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1932년 연구소가 있는 그랜드 래피즈 지역에 백일해가 크게 번졌다. 이 질병이 미국 전역을 휩쓸며, 수많은 어린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펄은 정부에 백신 개발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렇게 하고 싶은 연구라면, 근무 시간 외에 하라"였다. 대공황기에 최소 인원으로 운영되던 보건 연구소에는 이미 할 일이 넘쳐났기 때문에, 정부에선 펄이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정부가 준 답은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때에 따라 완곡한 허락으로 받아들일 여지도 충분했다.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전적으로 펄 켄드릭 자신이 선택할 문제였다. 펄은 후자를 택했다. 이것은 펄이 백일해 백신을 개발하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길이기도 했다.

 

 

백일해 백신에 대해 이야기중인 연구진들. 앞줄 왼쪽부터 로니 고든, 펄 켄드릭, 그레이스 엘더링.jpeg

백일해 백신에 대해 이야기중인 연구진들. 앞줄 왼쪽부터 로니 고든, 펄 켄드릭, 그레이스 엘더링

 


펄과 그레이스는 하루 업무를 마친 뒤 등유 램프를 들고 백일해 환자가 있는 집을 찾아가는 일부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릴 때 따뜻한 불빛이 넘실거리는 램프를 들고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 모습은 어찌 보면 낭만적이지만, 그 안에선 죽음과 싸우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아이들로부터 세균 샘플을 모아야 했다.


대공황 때라 실직한 아버지가 발작적인 기침을 하는 자녀를 돌보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도 많았다. 나중에 펄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백일해 환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인지 우울증 환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했다. 코로나 19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 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얼핏 겹치는 모습이다.


펄은 지역 의사들에게도 ‘기침판 샘플’에 백일해 세균을 모아달라고 부탁했고, 그레이스와 함께 그것들을 가지고 밤낮을 잊은 채 수많은 실험을 거듭했다. 드디어 백신의 윤곽이 드러났고, 이제 안전을 검증하기 위해 임상 실험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펄과 그레이스 두 사람이 근무 시간 외에 노력하는 수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고민 끝에 펄은 당시 영부인이었던 엘레노어 루스벨트 여사를 실험실에 초청했다. 루스벨트 여사는 열세 시간 넘게 펄과 함께 지내며 설명을 들었다. 남편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아마비를 앓았기 때문에 전염성 질병에 관심이 많았던 엘레노어는 펄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며 자금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펄은 백신 연구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자라고 소문이 난 로니 고든을 영입했다. 로니는 흑인인데다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당시 극심했던 인종 차별과 성차별의 이중피해자로서 실력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펄은 더 나은 조건으로 로니를 데려와 그녀가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로니는 백일해 세균을 더욱 잘 자라게 할 수 있는 배양액을 개발해 아주 강력한 백신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레이스 엘더링.jpg

그레이스 엘더링

 


펄과 그레이스가 이끄는 연구팀이 개발한 이 백신은 지금까지 1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두 사람은 백신에 대한 특허를 냈더라면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그때마다 주변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백신이기 때문에 그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개인적인 인터뷰에는 일절 응하지 않아 자신들의 공로를 드러내는 일도 피했다. 스스로 좋아서 한 일이므로, 주변으로부터 쏟아지는 지나친 칭찬은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두 사람에 대해 미시간 대학의 리처드 레밍턴 박사는 “그들이 가져간 소박한 대가는 수십만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뿐이었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이렇게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두 사람도 여성 과학자로서 살아남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선 이렇게 한 마디를 남겼다. 
 
”남자들이 주름잡는 분야에 여자가 함께하려면, 항상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잘 해야 합니다.”
-그레이스 엘더링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유윤한 저 | 궁리출판
여성 과학자들 중에는 핵물리학자 우젠슝처럼 딸을 위해 학교를 세울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부모를 둔 경우도 있는가 하면, 탐험가 매리 킹슬리처럼 딸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집안일만 시키며, 학교에도 보내지 않은 부모를 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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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윤한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양 과학 책을 쓰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궁금했어, 인공지능』 『궁금했어, 우주』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카카오가 세계 역사를 바꿨다고』 『생활에서 발견하는 재미있는 과학 55』 『매스히어로와 숫자 도둑』 『몸이 보내는 신호, 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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