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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개발의 역사를 새롭게 쓴 수학자 캐서린 존슨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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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은 97살에 우주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은 뒤, 지난 2월 24일 101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20.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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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에서 근무 중인 캐서린 존슨

 

 

영화 <히든 피겨스>는 첫 장면부터 내 마음을 울렸다. NASA의 계산원 캐서린 존슨(배우 타라지 P. 헨슨)이 서류뭉치를 가득 들고 건물들 사이를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 생활을 10년 이상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서류뭉치나 보이지 않는 버거운 일거리를 가슴에 품고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자신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내몰아 보았을 것이다.


그런 고비를 넘기며 버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사회이고, 조직이고, 기업인 것인가. 특히 캐서린 존슨처럼 ‘흑인, 여성, 세 아이의 싱글맘’이라는 트리플 악재를 지닌 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그 여정이 유독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에도 고금리, 고유가, 달러약세가 찾아들면, 트리플 악재보다 더한 트리플 쓰나미가 몰아친다고 한다. 어찌 보면 캐서린의 삶은 인종차별과 성차별로 얼룩진 트리플 쓰나미를 극복해낸 전설이라 할 만하다.


<히든 피겨스>의 첫 장면에서 캐서린이 서류뭉치를 안고 애타게 달려간 곳은 어이없게도 옆 건물의 화장실이었다. 흑인 직원들과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백인들 때문에, 캐서린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다른 건물의 ‘유색인 전용’ 화장실로 뛰어가야 했다. 그런데 왜 서류뭉치를 들고 뛰었던 것일까? 아마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도 아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캐서린은 집에서 세 아이가 기다리는 싱글맘인데다가 교통비를 아끼려고 동료들과 함께 카풀 출퇴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 시간에 최대한 많은 일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려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야 하는데, 화장실이 다른 건물에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다행히도 이때 ‘유색인 전용 화장실’이란 간판을 철거하는 분노의 방망이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캐서린의 속사정을 알게 된 상사가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만이라도 차별을 없애기 위해 나선 것이다. 물론 백인 남성인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아니 미국에겐 소련과 우주 개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캐서린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포스터.jpg
영화 <히든 피겨스> 포스터

 

 

캐서린 존슨은 10살에 고등학교 입학자격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초등학교로 학업을 마칠 뻔하기도 했다. 당시는 인종 분리 정책이 심할 때라 대부분 중학교에서는 흑인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열이 높았던 캐서린의 부모님은 이런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흑인을 받아주는 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결단을 내렸다.


캐서린은 15살에 웨스트버지니아 주립대에 입학 허가를 받아 수학과 과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이 학교의 유명한 수학자였던 클레이터 교수는 오직 캐서린 한 사람을 위해 해석기하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할 정도로 어린 제자를 아꼈다. 그리고 이때 배운 해석기하학은 나중에 캐서린이 NASA에 들어가 우주선의 비행 궤도를 계산할 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캐서린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사위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냈다. 그것은 남편으로서 아내 캐서린의 공부를 전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맹세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아이 셋을 남긴 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캐서린은 공부는커녕 당장 세 아이와 살아가기 위해 교사로서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NASA에서 계산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한 것이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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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에서 함께 일한 동료들. (앉아 있는 이가 캐서린 존슨)

 

 

수학 실력이 뛰어났던 캐서린은 비행경로를 설계하는 부서에 배치되어 계산을 맡았다.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기술자들과 연구원들은 캐서린이 처음으로 회의에 참석하자, “여자를 어떻게 회의에 참석시킬 수 있는가?”라며 강력히 항의했다고 한다. 인종차별을 받으며 화장실, 식당, 커피포트를 따로 쓰는 설움을 받은 것도 모자라, 이번엔 성차별이 캐서린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엔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 자체가 드물었고, 어렵게 일을 시작한 여성 연구원들도 남성 동료의 보조업무를 하다 결혼할 때쯤 퇴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흑인인데다가 여성인 캐서린이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 하자, 남성 동료들의 반발은 거셌다.


캐서린은 “여자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불법입니까?”라고 응수하며 버텼고, 다른 연구원들이 쩔쩔 매던 문제들을 척척 풀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후 캐서린은 NASA 최초로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여성 연구원이 되어 눈부신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개발된 초기 컴퓨터는 캐서린처럼 해석기하학을 적용한 풀이 방식을 도저히 구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요 우주선의 비행 경로는 전적으로 그녀의 계산에 의지했다.


미국인 최초로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한 우주비행사 존 글렌도 이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항상 비행 직전에 “컴퓨터가 계산한 숫자를 캐서린 존슨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분이 옳다고 하면 출발하겠다”고 말했다. 1969년 인류 최초로 달 착륙을 가능하게 했던 아폴로 11호 역시 캐서린이 설계한 궤도를 따라 비행에 성공했고, 그 결과 미국은 우주개발 경쟁에서 처음으로 소련보다 확실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후 아폴로 13호가 산소 탱크 폭발로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캐서린이 설계한 항로로 달을 선회 비행해 비행사 전원이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캐서린은 35년 동안 NASA에서 일하면서 많은 일을 수행했고,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출근하기 싫은 날이 없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자신의 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야말로 화장실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인종 차별과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성차별을 거뜬히 이기도록 만든 힘이었던 것 같다. 캐서린은 97살에 우주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은 뒤, 지난 2월 24일 101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0여 년 동안 이 땅에서 캐서린 존슨이 보여준 삶은 어떤 차별도 이길 수 있는 인간의 고귀한 능력과 열정이 세운 기념비라 할 만하다.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유윤한 저 | 궁리출판
평소 과학기술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와 이해를 높이고 사고력과 응용력을 키워주는 교육인 ‘STEM 교육’이 왜 우리나라에서는 좀더 활성화되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어온 저자가 특히 여학생들을 위한 과학교육이 좀더 다양해지기를 바라며 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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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윤한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양 과학 책을 쓰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궁금했어, 인공지능』 『궁금했어, 우주』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카카오가 세계 역사를 바꿨다고』 『생활에서 발견하는 재미있는 과학 55』 『매스히어로와 숫자 도둑』 『몸이 보내는 신호, 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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