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나 “그림책 작업이 나에겐 아이스크림”
신작 그림책 『이상한 손님』 펴내 모든 장면이 마음에 드는 이상한 그림
책을 구매하는 독자라면 주로 성인 독자이실 텐데요, 아이들이 그림책을 즐기듯 편안하게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책에는 공부하듯 파고들어 파악해야 할 의미나 교훈 같은 건 없거든요. (2018. 04. 06)
백희나 그림책은 언제나 얼빠진 표정으로 보게 된다. 애니매이션을 보는 마냥 혼이 쏙 빠져서 몰입하게 된다. 수공으로 인형과 소품, 세트를 만든 후 조명을 활용해 장면을 완성하는 백희나표 그림책. 『이상한 엄마』 , 『알사탕』 에 이은 신작 『이상한 손님』 의 등장이 여간 반갑지 않다. 『이상한 손님』 은 혼자 놀고 있는 소년에게 ‘천달록’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빵을 먹으려는 소년에게 ‘형아’라고 부르며 다가가는 주인공 ‘천달록’. 구름이를 타고 온 달록은 커다란 빵을 단숨에 먹어 치운 후 아주 요란한 방귀를 뀌고,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갑자기 달걀이를 쫓아가는 등 수상하고 이상한 행동을 이어간다. 이윽고 달록이는 잠투정을 부리다 또 다른 손님을 맞게 되는데.
해외에 있는 백희나 작가에게 이메일을 띄었다. 짧은 답변 속속들이 유머와 진심이 배어 나왔다. 그림책작가들과 인터뷰하면 공통점이 두 가지 있다. 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과대 포장하지 못한다는 사실. 좋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면, 이 덕목을 먼저 깨쳐야 하지 않을까. 날것으로 전하고 싶은 백희나의 이야기, 『이상한 손님』 의 뒷이야기를 들어보자.
음…… 마법입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봄을 보내고 계신가요?
작업을 끝내고 나면,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일상생활에서 구멍이 하나 둘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그 구멍들을 메우느라 바쁩니다. 저는 이걸 ‘생활의 복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작업에 집중할 때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면 우울증이 도지곤 합니다. 넋 놓고 있다가는 우울 구덩이에 빠지기 십상이지요. 그러지 않으려고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하면서 부지런히 일상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이상한 엄마』 , 이후 꾸준히 1년에 1권씩 작업하고 계세요. 『이상한 손님』 은 어떻게 구상한 책인가요?
원래는 ‘ 『구름빵』 의 구름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어쩌다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구름빵』 저작권이 제게 없어서, 그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궁리하다 보니, 『이상한 엄마』 가 먼저 나왔고 『이상한 손님』 이 다음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천달록’의 얼굴이 호빵 같기도 만두 같기도 눈사람 같기도 해요. 어떻게 만들어진 캐릭터인가요?
천달록은 아기 도깨비입니다. 도깨비에 대한 조사를 해 봤는데, 남아 있는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 패랭이를 쓰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었다고 하더라고요. 누렁이 냄새가 난다고도 하고요. 도깨비라지만 어린이들이 흥미로워 할 만큼만 무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호빵 같기도 만두 같기도 한 얼굴이 나왔나 봅니다. 아기이다 보니 바지저고리보다는 배냇저고리를 변형한 옷을 지어 입혔고요. 선녀님처럼 하늘에 사는 존재라서 소맷자락은 한삼자락처럼 길게 만들었어요. 이 긴 소맷자락을 아기 띠처럼 써서 하늘의 엄마가 달록이를 업어 주는 상상도 해 봤지요.
‘천달록’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하늘에 살고 있어서 ‘천’ 씨라고 지었습니다. 원래 도깨비는 ‘김서방’이라고도 불렸다는데, 김씨 성은 아무래도 이 존재를 지상에 묶어 놓는 느낌이었어요. 흔하지 않은 성을 붙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름은 알록달록한 하늘색 때문에 알록이와 달록이로 붙였고요. 워낙 도깨비가 알록달록한 알쏭달쏭 존재이기도 하고요.
“빗자루가 쓸데없이 고퀄이다”라고 트윗을 올리기도 하셨는데요. 이번 작품 역시 소품들의 디테일이 굉장합니다. 가장 힘들게 작업한 소품이 있다면요?
글쎄요. 집중해서 봐 주십사 할 만한 것은 따로 없습니다. 저는 독자의 감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업하는 편입니다. 그러자면 한 장면 안에서 주인공이건 배경이건 소품이건 텍스트건 저마다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지요. 그 어느 것도 맡은 역할 이상으로 튀어서 주의를 끌고 감정선을 파괴하면 안 된다는 소리입니다. 빗자루가 쓸데없이 고퀄인 건 어찌 보면 제 잘못인 거죠. (웃음) 공을 들인 것은 인물들, 특이 주인공인 달록이의 표정이었습니다. 달록이의 감정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한편 독자를 즐겁게 해 주는 요소니까요. 가장 힘들었던 건 동생의 얼굴이었습니다. 표정별로 다른 얼굴을 만들었는데, 같은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좀 힘들었습니다. 만들다 보면 다른 사람이 되곤 해서요.
눈은 스폰지인가요?
음…… 마법입니다.
모든 장면이 마음에 들어요
(웃음). 작가님께서 달록이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화가 나 있습니다. 작가 역할과 주부 역할을 병행하다 보니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기가 힘든 데다,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것은 못 해 주고 있다는 생각에 쫓기며 사느라요. 어쩔 땐 얼굴에 스킨, 로션, 크림을 단계별로 바르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 『구름빵』 저작권 문제가 아직도 뒷덜미를 잡고 있습니다. 정말 커다란 모래주머니를 사지에 매달고 마라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스크림를 먹는 달록이의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작가님은 무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시나요?
그림책 작업이 저에게는 달록이의 아이스크림입니다. 정말 피곤하고 짜증이 나 있다가도, 작업을 시작하면 마음이 진정됩니다. 담당 편집자님과 일에 관한 문자나 통화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진정됩니다.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잠시나마 고된 일상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지요.
그림책 작업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지점은 무엇인가요?
작업 도중에 손을 놓아야 할 때요.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르고, 햇빛도 적당하고, 아슬아슬하게 배치해 둔 세트도 완벽해서,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완성 컷이 나올 것 같은데, 주부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도래하면 정말…… 그렇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3개만 꼽아주신다면요.
뻔뻔하다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다 마음에 들어서 어느 한 장면을 꼽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굳이 꼽아 본다면.
전체 이야기 흐름에서 제 역할을 잘해 준 장면입니다. 주인공을 소개하는 장면이면서, 독자가 주인공과 함께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지요. 주인공의 감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라 마음에 듭니다.
달록이가 화를 내면서 잔뜩 흐렸던 날씨가 쨍쨍 무더운 날씨로 바뀝니다. 이 장면은 그림처럼 예쁘게 나와서 마음에 듭니다.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쨍한 하늘도 잘 표현되었고, 후끈후끈한 열기도 잘 살았습니다. 햇빛 같은 조명도 마음에 들고요. 달록이의 얼굴, 누나의 트레이닝복 바지, 부엌의 찬장, 동생이 든 부채까지 여러 가지 색이 잘 배합되었고 콤퍼지션(composition)도 좋습니다. 처음으로 세 주인공의 마음 모아지는 순간이라 그럴까요? 모든 것이 잘 조화된 예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의 감정과 연결된 날씨 변화가 키워드인 책인지라, 조명이 잘 표현된 장면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맑은 봄 햇살이 잘 표현되어 좋습니다. 솜사탕 할아버지 캐릭터도 마음에 쏙 듭니다. 오른쪽 장면은 완성하고 보니, 의도치 않게 길모퉁이에 서 있는 볼록 거울에 담긴 이미지 같은 느낌이 나서 기뻤습니다. 할아버지는 달록이 일행을 보고 놀란 듯도 하고, 독자와 눈을 맞추는 듯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오른쪽 페이지의 볼록 거울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을 쳐다보는 듯도 합니다. 이런 우연한 효과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미디언이 나와서 경험담을 들려주듯 흥미진진하게
전작인 『이상한 엄마』 , 『알사탕』 리뷰 중에 기억 남는 평이 있었나요?
일하는 엄마인 데다 어리광부리며 기댈 대상이 없는 분이었는데, ‘이상한 엄마’가 절실하다는 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라도 가서 돕고 싶었습니다. 『알사탕』 리뷰 중에는 7년째 발달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 엄마의 글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들도 세상과 제대로 소통하는 날이 오기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고 쓰셨지요. 그림책 속 동동이처럼요. ‘더할 나위 없이 개성 있고 독창적이라서 강렬했던 『구름빵』 이 아니어도 새롭게 읽은 백희나의 이야기와 이미지는 여전히 나를 울리는 힘이 있었다. 예전만큼 이슈가 되느냐 아니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시처럼 멋진 리뷰에 저도 눈물이 났더랬습니다.
‘이상한’ 시리즈는 또 이어지나요?
일단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그림책은 그동안 나왔던 책에 등장했던 여러 캐릭터 중 하나가 주인공이 되어 나올 것 같습니다. 시리즈처럼 얽혀 있는 세상의 한 조각을 보여 드리긴 할 텐데 딱히 ‘이상한’이 붙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백희나 작가님 책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하는 독자가 많아요. 그림책 독자 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저는 책을 만들 때 독자를 굉장히 의식하면서 만드는 편입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줄 때, 반응을 살펴가며 더 즐겁게 들을 수 있도록 신경을 쓰며 읽어 주는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 책을 내놓고 나면 독자 리뷰를 정말 샅샅이 다 찾아 읽어 봅니다. 리뷰에 달린 댓글까지도요. 책을 구매하는 독자라면 주로 성인 독자이실 텐데요, 아이들이 그림책을 즐기듯 편안하게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책에는 공부하듯 파고들어 파악해야 할 의미나 교훈 같은 건 없거든요.
작가님의 트위터를 보니 ‘책읽는곰 = 최고의 출판사’라고 하셨어요. 이유는 무엇인가요?
창작 그림책이라곤 『구름빵』 한 권 달랑 내고 7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제 능력에 대한 많은 의심과 회의가 있었겠지요. 그 7년 동안 저는 당장 돈이 될 수 있는 하청 작업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암흑의 시절에 저를 믿고 기다려 준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의 믿음 덕분에 저 또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지켜갈 수 있었습니다. 『구름빵』 으로 처음 입문한 출판계는 저에게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내놓으면 그냥 빼앗기고 만다.’는 피해의식이 저를 지배했더랬습니다. 자신감도 많이 잃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그 누구에 대한 신뢰도 없었기에 1인출판사로 재기했습니다. 말이 1인출판이지, 그 뒤에서 궂은일을 도와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재활 치료’를 마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리며 손을 잡아 준 출판사가 책읽는곰입니다. 그림책 작업에 대해 제가 바라보곤 곳에 시선을 맞춰 주면서 책의 완성을 위한 정확한 피드백을 주는 출판사는 이곳이 처음이었습니다.
광속으로 늙어간다고 하셨는데요. 그림책을 계속 만들면, 늙음의 속도가 조금은 지체되지 않을까요? 그림책작가로서 나이 드는 것의 장점이 있다면요?
지체되지 않고 가속됩니다. 일단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이니까요. 더더군다나 입체로 만들어서 촬영을 해야 하니 작업량이 엄청나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에 약해지고, 세련된 맛이 없어지겠지요. 타성에 젖을 테고 게으름이 익숙해질 테고요. 장점이라면 여유가 생기는게 아닐까 싶은데요. 힘을 줘야 하는 부분과, 힘을 빼고 여유를 남겨 둬도 되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요.
현재 작업 중인 책이 있나요?
『알사탕』 작업할 때 얻은 구상이 있는데, 발전시키는 중입니다.
만화책을 즐겨 보시는 것 같아요. 최근 인상 깊게 읽은 만화책 혹은 그림책을 소개해주신다면요?
『당신을 그렇게까지는』과 『프린서플』 작가 이쿠에미 료가 좋습니다. 특히 『프린서플』은 펜으로 슥슥 그려 나간 느낌인데도 안에 인물의 표정과 동작이 정말 잘 표현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이상한 손님』 을 어떻게 읽어주면 좋을까요?
코미디언이 나와서 경험담을 들려주듯 흥미진진하게 부탁드립니다. (웃음)
이상한 손님백희나 글그림 | 책읽는곰
둘이 힘을 모아 위기를 넘겼던 일만큼은 남매에게 오래도록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누나가, 동생이, 내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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