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오늘은 내 하루치 봄날

도서관에도 단골이 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이 구절에서 진심으로 놀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감탄’하기 위해 읽는 것이 시다! (2018. 04. 05)

 22222.jpg

                                      언스플래쉬

 

 

봄이 오면 소풍을 많이 다니겠노라, 호기롭게 한 다짐은 지키기 어렵게 됐다. 미세먼지 탓이다. 괜찮은가 했더니 오늘 다시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 수준이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소득이 없어 시무룩해진 도둑처럼 집밖으로 나온다. 슈퍼에 들어가 과일을 살펴본다. 좀 비싸다. 싸고도 실한 과일은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가게 주인의 말.

 

 “애기 엄마, 오늘 딸기 세일이에요”

 

태연하게 과일을 고르는 척 하지만 당황한다. 딸기 쪽은 아예 보지 않는 것으로 소심하게 불만을 내비친다. 내가 어딜 봐서 아기 엄마야? 불만을 가지려다 그만 둔다. 아이는 없지만 있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 미처 깨닫지 못한 내 모습, 나만 모르는 나, 그런 건 항상 남이 깨우쳐준다. 구미가 당기는 과일이 없어 도로 나온다. 어깨엔 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한 짐이다.

 

아직 도서관에 갈 마음이 없다. 마스크 안에서 호흡을 쌕쌕이며, 전진한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순으로 피어난 꽃들. 아직 꽃 피지 않은 벚나무가 더 많지만 머지않아 죄다 필 것이다. 어쩌지? 저것들이 다 피면 어쩌나? 어쩌긴 뭘 어쩐단 말인가! 아아, 감탄하겠지. 꽃이 우르르 피어나면 그 황홀함을 감당하지 못할까봐, 좋으면서도 조바심치는 건 내 취미다. 목련나무 앞에 멈춰 선다. 겨우내 이 나무가 목련나무인 줄 모르고 지나다녔다. 언제 이 뾰족하고 부드러운 것이 돋아난 걸까?

 

아직 도서관에 갈 마음이 없다. 동네 카페 ‘식물도감’에 들어간다. 커피맛과 주인 마음씨가 일품인 곳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주인아주머니와 수다를 떨면서, 새로 들어온 봄옷과 린넨 소품을 구경한다. 살 마음은 없었는데(정말?) 짙은 초록색 린넨 셔츠와 행주를 사기로 한다. 


 커피와 새로 산 셔츠와 책 보따리를 끌어안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예닐곱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우르르 몰려나온다. 마스크를 쓴 아이가 대부분이지만 몇몇은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간다. 저 아이들에게 봄은 미세먼지와 황사로 기억될 것이다. 문득 서늘하다. 

 

도서관에도 단골이 있다. 자주 보던 사람들이 앉아있다. 낯은 익지만, 그 밖의 것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 눈이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고, ‘저이가 또 왔군’ 가만히 생각하는 사람들. 태평한 자세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읽거나 끼적이거나 끔뻑끔뻑 조는 사람들. 나도 그 중 하나다. 자리에 앉아 시집을 읽는다.

 

 “모든 나무가 지구라는 둥근 과녁을 향해 날아든 신의 화살이었다 해도”
(신용목 시 ‘절반만 말해진 거짓’ 中)
 
이 구절에서 진심으로 놀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감탄’하기 위해 읽는 것이 시다!

 

창밖을 보니 미세먼지를 뒤집어 쓴 신의 화살들이 비스듬히 서있다. 지구가 한 덩이 사과라면, 저 나무는 신의 화살이고, 나는 소풍을 가지 못해 시무룩한 얼굴로 시를 읽고 있는 미세먼지다. 그렇다. 지구 입장에선 나도 미세먼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슈퍼에서 청송사과를 한 봉지 샀다. 청송은 여기서 얼마나 먼가? 예전에 누가 나보고 청송사람 아니냐고 끈질기게 물었는데(아니라고 해도!), 그이는 잘 있나? 청송사람은 어떤 사람인 걸까?

 

목련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나리도 개나리대로 하루치 봄을 사는 중이다. 오늘은 내 하루치 봄날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오늘의 책

수학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표 유아수학 공부

국내 최대 유아수학 커뮤니티 '달콤수학 프로젝트'를 이끄는 꿀쌤의 첫 책! '보고 만지는 경험'과 '엄마의 발문'을 통해 체계적인 유아수학 로드맵을 제시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수학 활동을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아이도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나를 바꾸는 사소함의 힘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인 시대. 불안과 번아웃이 일상인 이들에게 사소한 습관으로 회복하는 21가지 방법을 담았다. 100미터 구간을 2-3분 이내로 걷는 마이크로 산책부터 하루 한 장 필사, 독서 등 간단한 습관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을 느끼시길.

지금이 바로, 경제 교육 골든타임

80만 독자들이 선택한 『돈의 속성』이 어린이들을 위한 경제 금융 동화로 돌아왔다. 돈의 기본적인 ‘쓰임’과 ‘역할’부터 책상 서랍 정리하기, 용돈 기입장 쓰기까지, 어린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저마다 삶의 궤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비슷한 생애 주기를 거친다. 미숙한 유아동기와 질풍노동의 청년기를 거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늙어간다. 이를 관장하는 건 호르몬. 이 책은 시기별 중요한 호르몬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 노화에 맞서는 법도 함께 공개한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