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거짓 안에도 진실이 있을 수 있다”
『친밀한 이방인』 진실을 담은 가짜 거짓말
어떻게 보면 대담함 같은 건데요. 아이 같은 대담함이죠.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돌파하거나 저질러버리는 습성 같은 것들이 저는 굉장히 흥미로워요. 제 자신이 불안과 겁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2017.12.04.)
세 남자의 아내,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사람. 피아노를 가르치는 대학 교수, 요양병원 의사, 작가 행세를 한 미궁의 인물. 『친밀한 이방인』에 등장하는 ‘이유미’라는 인물은 대학 입시에 떨어진 순간부터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가짜의 삶을 살아간다. 이 거짓말 하는 삶은 매혹적이다. 거짓 증명서 한 장으로 권위와 삶의 안정감, 사랑, 돈, 심지어는 세상의 호의까지 얻게 된다. 이유미라는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조건에 따라 그를 달리 보고, 이유미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점점 더 커지는 거짓말을 막지 못한다.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돌파하거나 저질러버리는 습성 같은 것들”에 흥미를 느낀다는 정한아 작가가 보여주는 거짓말이 남다른 것은 이 거짓 안에 진실됨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유미의 거짓말은 때로 누군가를 구원했고,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되었다. 진짜가 있는 거짓, 또는 거짓이 있는 진짜. 『달의 바다』, 『리틀 시카고』 이후 5년 만에 세 번째 장편을 써낸 정한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관통해온 ‘진실된 거짓말’에 대한 꽤나 무거운 질문을 독자 앞에 내놓았다.
이유미뿐 아니라 『친밀한 이방인』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특히 여성들은, “여성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로써 거짓말을 한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체감했다는 정한아 작가는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이 갖는 삶의 고통을 자신을 꼭 닮은 주인공과 자신이 꼭 닮았다고 느끼는 이유미를 통해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공고한 가부장제 안에서의 여성, 개성의 말살로 고통 받아야 하는 여성에 대한 관심은 지금의 정한아 작가에게 중요한 주제이다.
‘친밀한’ 이방인
거짓말하는 인물 혹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거짓말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이 소설은 조금 다른 거짓말을 얘기하는 듯했어요.
일단 현실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가는 인물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현실의 제약,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뚫고 나가는 주인공 말이에요.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게 거짓말이었어요. 단순히 사기꾼의 거짓말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진실됨이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인물에 동의하게 되는 그런 거짓말인데요. 연민을 느끼게도 하는, 그런 거짓말쟁이에 대해 쓰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거짓말 안에 있는 그 진실됨 때문에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요. 거짓말이 언제나 거짓말은 아니잖아요.
반대로 우리가 거짓이 섞이지 않은 관계라고 말하곤 하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관계라고 해도 사실은 거짓이 있죠. 그것처럼 거짓 안에도 진실이 있을 수 있는데요. 그 진실이 무엇일까,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질문 같아요. 인물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자면요. ‘나’와 ‘이유미’는 두 명이면서도 한 명인 인물로 구상했어요. 나이도 비슷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죠. 주인공은 아주 보편적이고 평범한 단계를 밟아 지금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요. 이유미는 주인공과는 정반대로, 사기꾼으로 살아가고 있죠. 그런데 이 둘 중에 누가 더 거짓말쟁이일까, 혹은 누가 더 진실될까 묻는다면 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작품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것과 저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많아요.
소설이 인터뷰로 구성이 되잖아요. 그런데 인터뷰이들이 이유미에 대해 추억할 때, 묘한 그리움이 있거든요. 당했음에도 그런 미묘한 감정이 있어요. 과연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죠. 관계 안에서 이들이 무언가를 나누었던 거잖아요. 꼭 진실과 거짓으로 양분해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인간관계에서는 있죠. 심지어 실연을 당하고 사기를 당했어도 어떤 부분은 진실되게 기억하듯 말이에요.
제목을 따져봐도 그렇죠. 소설에 들어갈 때는 ‘이방인’에 주목하게 되는데 점점 ‘친밀한’에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그런 변화가 흥미로운데요. 주인공 역시 점차 이유미에게 밀착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거잖아요.
주인공이 이유미에게 친밀함을 느꼈던 건 여성의 서사인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이 두 여성이 동시대를 살아가는데 한 명은 부르주아 계층의 부모님과 환경에서 자랐고, 다른 한 명은 고아 출신, 장애를 가진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잖아요. 그럼에도 이 둘이 공통점을 갖게 되죠. 거짓말인데요. 이것이 여성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회에는 여성의 역할, 여성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요. 여성은 그것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맞추어나가요. 주인공은 그런 면에 아주 탁월하게 거짓말을 한 사람이고, 실패했죠. 그런가 하면 이유미는 사랑받고 존중받는 관계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정상적인 방식의 소통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말로 계층적인 배경을 이용해요. 배경을 이용했을 때 사람들은 좀 더 쉽게 관계 맺음을 하잖아요. 특히 여성적인 어떤 것을 이유미는 지어내거든요. 그런 것들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는 면에서 두 인물이 닮았죠.
성장 배경이나 초기 삶의 경험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이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으로 놀랍도록 비슷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안에서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공들여 그린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두 번째 장편 『리틀 시카고』와 이번 『친밀한 이방인』 사이에 5년의 공백이 있었는데요. 그동안 결혼과 출산을 했어요. 저는 사실 여성으로서 사회적인 패널티를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늘 학교 안에 있었고, 어렸을 때 등단을 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요. 물론 무의식 안에 떠도는 여성성의 억압이 저에게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저를 현실적으로 제압하거나 제약이 된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 정말 체감을 했어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붙박여야 하는 자리가 있다는 사실,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느꼈죠. 다른 게 아니라 발화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는 것에 고통을 느껴야 했는데요. 그런 면이 주인공의 서사에 많이 드러나 있어요. 주인공이 광기와 불행으로 떨어진 이유는 이 사람의 결혼생활이 남달라서가 아니죠. 자기의 불행과 외로움을 발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점은 자전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소설을 쓰면서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했나요?
네, 사실 이유미를 쓸 때는 굉장히 신났어요. 거침이 없었는데요. 주인공의 이야기를 쓸 때 쉬우면서도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요. 바로 그런 면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쓸 때는 더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게 항상 어려운 것 같아요.
결혼과 출산, 육아에 있어 여성은 많은 부분 소외당하는 사람이에요. 전담자로 격리되고, 정형화된 이미지로만 존재해요. 그 안에서 여성은 고립되고 서로 만나지도 못하죠.
소설은 언제나 내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는데요. 소설가로서, 제가 느끼는 소수성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러니까 고통 받을 때, 고통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원인을 찾아 나가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 원인에 대해 발화를 하기만 해도 어떤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을 언어화 하지 못하고,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 속에 있을 때 사실은 일말의 자존감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으로 추락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여성에게 있어 가장 비극적인 지점이고요. 이 작품을 쓸 때는 한 번 끝까지 써보자, 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앞서 자전적 요소가 있을 거란 말씀을 하셨는데요. 특히 육아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들이 그럴 것 같아요. 부탁할 때, 구체적으로 알려줄 때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남편, 아이 키우느라 보낸 시간을 경력 삼을 수는 없다는 말까지 그야말로 몸의 언어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같은 여자들끼리도 말하지 못하죠. 내가 괴물처럼 보일까봐. 아이를 위해 보내는 시간을 내가 낭비라고 느끼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사실은 다들 느끼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나는 어머니다, 어머니로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 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여성이 이 시대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들 굉장한 괴로움과 불안감을 느끼는데 그것을 발화할 수 없는 거죠. 어머니의 위대함을 거스르는 말을 자기가 할 수 없고요. 무엇보다도 나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것이 도리어 나에게 패널티로 작용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다들 있는 것 같아요.
그 모든 생각들 때문에 벗어버리지 못하는 코르셋도 존재하고요.
그렇죠, 자기 검열 같은 것이 있죠. 혹은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 정말 괜찮다고 느낄 수도 있긴 할 것 같아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차마 얘기할 수 없는 것도 있고요. 다만 그 상태에서 안간힘을 다해 자기최면을 걸겠죠.
개인으로서 여성이 겪는 그런 어려움을 사회가 너무 외면하고 있는 게 또 현실이죠.
주인공의 어머니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파탄을 맞잖아요. 저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결혼제도라는 것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왜냐하면 굉장히 견고한 역할 분담인데 그것은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에요. 한 인간이 그렇게 규격화된 존재가 아닌데 어떻게 그 역할에 딱 맞추어 행복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회의가 많이 들어요. 가정 안에서의 가사 노동과 양육 노동의 덧없음과 무의미함 같은 것들을 남편은 잘 모르죠. 숱한 보이지 않는 노동 속에서 가정들이 유지되고 있는 거거든요. 개성의 말살과 한 여성, 어머니의 희생으로 말이에요.
아이 같은 대담함
등장인물 중 주인공의 아이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요. 가부장제 아래의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사실 모두가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러다보니 진실된 관계맺음이 없고요. 개개인의 욕구나 진실된 관계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해결이 안 되는 거죠. 점점 더 편협하고, 피상적인 관계맺음만 가능해지는 거고요. 진짜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마저도 말이에요.
주인공의 어머니 역시 아버지와 이혼하려는 속내를 딸에게 모두 얘기하지 않죠. 모두 같은 맥락이에요.
되게 어려운 일이에요. 자기 언어를 가져야만 발화가 가능하잖아요. 특히 어머니 세대, 중년 여성에게는 자기 언어가 정말 없어요.
한편 이유미가 첫 번째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게 다름 아닌 ‘입시’라는 점도 눈길이 가요. 더구나 이유미가 다음 단계의 거짓말로 넘어갈 때 각종 수료증, 증명서 등을 위조하는데 참, 쉽죠. 권위, 배경 등에 기대는 사회의 허점을 잘 보여줍니다.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있으면 그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관계 형성이 가능해져요. 그것에 기반해 이유미는 결혼도 하잖아요. 저는 그런 점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참 사람을 쉽게 믿거든요. 그 권위가, 그것이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하고요. 작가의 말에 거짓말쟁이, 사기꾼에 대한 애정을 적기도 했는데요. 저는 굉장히 생명력이 강한 어떤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커요. 그것들이 저에게 오래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일종의 삶의 의지로 해석하는 면도 있는 것 같고요. 물론 도덕적으로는 틀렸지만, 불법행위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의지 같은 데에 시선이 가요. 한계 앞에서 보통은 멈추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항상 더 애정이 가는 것 같아요. 드라마를 보더라도 악역들에게 저는 더 매력을 느끼거든요.
비록 일그러진 삶의 의지일지라도 말이죠.
어떻게 보면 대담함 같은 건데요. 아이 같은 대담함이죠.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돌파하거나 저질러버리는 습성 같은 것들이 저는 굉장히 흥미로워요. 제 자신이 불안과 겁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면이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질서를 자발적으로 깨트리는 사람들이잖아요. 바이러스 같은(웃음) 존재들이죠. 그런데 그런 바이러스들이 인류의 생명력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가 축사에 갇혀서 규칙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존재들이 있어서 인간의 의외성들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요.
『리틀 시카고』도 기지촌이라는 소재를 다루셨는데요. 중심부에서 벗어난 다른 존재들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였겠군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이번 책에서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보니 역사적으로 정말 유명한 거짓말쟁이들이 많았더라고요.(웃음) 인간 습성의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시대별로 굵직한 거짓말쟁이들이 많은데요.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다 거짓말을 통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갈 수 없었던 곳에 갔다는 거예요. 발도 데마라라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이야기로 영화도 찍었는데요. 학교 선생님, 군의관, 철학과 교수, 교도소 소장 등을 가짜 증명서로 해냈어요. 이 사람과 이유미가 비슷한 속성이 있는데요. 자기의 출신과 계층을 벗어나기 위해 전문성을 위증했죠. 그로 인해 삶이 굉장히 외로웠고요. 증명서들이 요구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걸 위해서 굉장히 공부도 열심히 했거든요.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올라가야 하니까요. 그런 것들이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슬퍼 보였어요. 거짓말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더라고요.
맞아요, 이유미라는 인물을 얘기할 때 외로움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어요. 거짓말이란 자기 존재의 부정인데요. 자신을 의심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봐야 하니까 자아가 얼마나 고립되겠어요.
진실된 자신의 모습으로는 관계맺음이 아예 안 되는 거죠. 나를 계속 가짜 인물로 만들어야만 관계맺음이 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하고 왜소해져요. 그렇죠, 이유미는 그런 존재죠.
중제목 중에 ‘가짜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이 절묘한 표현이 소설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이 소설을 읽고 난 독자들이 ‘나도 속았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저한테 되게 중요했거든요. 그러려면 거짓말이라는 것의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했는데요. 그런 부분을 뒤에 등장하는 ‘진’과 이유미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들로 보여준 거죠. 이유미는 진이라는 인물을 살리는 거짓말을 했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가짜 거짓말은 독자들을 속이는 장치로써 표현한 말이에요. 결국 진짜라고 했을 때 그 안에 거짓말이 있고, 가짜라고 했을 때 그 안에 진짜가 있고, 그런 것들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이유미의 대학 제자는 그에게 구원받았다고까지 말을 하잖아요. 진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거짓말이 어떤 거짓말이냐를 짐작하게 돼요.
그것이 『달의 바다』 때부터 저의 화두 같아요. 거짓말인데 굉장히 진실된 거짓말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요. 이유미에게는 굉장히 상반된 여러 가지 속성이 있잖아요. 그것은 또 한 마디로 말하면 이유미라는 인물을 하나로 수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누군가는 이 여자로 인해 구원 받았지만 한편에서는 이 여자에 대해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고요. 타자성이죠. 이유미라는 인물을 하나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데요. 그것은 모든 인간이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끝까지 가는 사람들과 타자성, 복잡성과 같은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가요?
아까 이야기한 소수자성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민감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작가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고통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그런 소수성으로 인해 발화할 수 없는 아픔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것 같아요. 얼핏 보기에는 범법자거나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는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그래서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고요. 어떤 동료의식 같은 걸 느껴요. 실은 주인공에게 자전적인 요소가 훨씬 많이 들어있는데도 저는 이유미를 저인 것처럼 느끼거든요. 그것은 제가 가지는 정체성의 문제 같아요. 아직도 내가 소수자라고 느끼는 그런 부분들 말이죠.
그것은 아마 여성이라는 것과 떨어질 수 없는 거겠죠?
아마 그렇겠죠. 글쎄요.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좀 더 구체화되어서 지금의, 30대의 저에게는 여성이라는 것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된 것 같아요.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평범하게 걷고 있는 길 위의 풍경처럼 그들의 결혼생활도 그랬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133쪽)
결국 진짜 삶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한 그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가짜 관계 속에서 가짜 이야기를 하다가 죽음에 맞닥뜨리는지 생각했어요. 얼마나 후회스러워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것,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 정말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과 같이 하지 못하고 무엇을 위한 연극인지 모를 연극을 하다가 죽음에 다다르게 되지 않나 생각하면 말이에요.
그런데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잖아요. 외면하는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그게 절대 좋은 방법이 못 돼요. 결국 그게 자기를 소외시키거든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으면 내가 나를 소외시키게 돼요. 그러면서 결국은 병으로 빠지게 돼요. 광기이든, 이상한 사람으로 변화하든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자유와 정반대의 의미에서 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민감하게 깨어있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이고, 내가 지금 옳게 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만 하죠. 안 그러면 나도 불행하고, 관계도 불행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질문은 참 어려워요.
굉장히 피곤하고요. 너무 에너지 소비도 많아요. 그냥 정해진 공식대로 사는 게 훨씬 편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불안한 거고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 괴로운 고민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굉장히 힘들지만 어찌보면 꽤나 건강한 태도 같기도 한데요. 작가의 삶에 있어 소설가의 정체성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나요?
뗄 수 없죠. 이 소설 안에서도 주인공이 소설쓰기 흥미가 떨어지니까 곧장 추락하잖아요. 지금까지 나를 구성하고, 나를 끌고 다녔던 것이 없어졌을 때 길을 잃은 것처럼 느끼는데요. 그리 부지런한 작가가 되지는 못하지만 저 역시 그런 것 같아요.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쓰고 있다는 위안이 저의 삶을 지탱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예요. 다른 작가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사실 정말 보상이 없는 일이거든요.(웃음) 그 작업의 기쁨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무섭죠. 그 기쁨이 얼마나 크기에 보상도 없는데 다들 그렇게 쓰나, 싶고요.
주인공이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소설쓰기에 대해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생각하잖아요. 그런 질문을 작가 스스로도 당연히 하셨을 것 같아요.
아이러니 한데요. 소설을 그만 쓸 수 있게 될 거란 생각을 정말 계속 하게 돼요. 등단했을 무렵에 선생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잘 이해를 못했거든요. 왜냐하면 그때 저는 모든 걸 다 잃어도 계속 이걸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랑과 같죠. 예전에 조경란 선생님이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이 안 될 때도 있는 거다, 라는 얘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요. 30대가 넘어가면서 체감이 되더라고요.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내적인 동기 외엔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제가 그만 쓴다고 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지도 않고요. 그저 쓴다는 정체성과 동기부여가 전부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또 밥을 먹고 일어나게 돼요. 그런 시기 같아요.
친밀한 이방인정한아 저 | 문학동네
한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을 훔친 비밀스러운 인물의 행적을 추적해나가는 이 유려한 미스터리는 때로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침없이 삶을 뒤엎는 한 인물의 일생을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겹쳐가며 복원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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