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위로는 공감에서 나와”
에세이 『쓸 만한 인간』 발표한 배우 박정민
제 글은 다른 이를 위로하거나 응원하고 싶어 쓴 게 아니에요. 누군가를 향한 외침이 아닌, 자신을 위해 외친 주문이라 보는 게 맞겠죠. 그런데도 제 글에서 위로받았다고 말씀해주시는 건, 아마 고민하는 제 모습에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지난 20일, 경의선 책거리 공간산책에서 배우 박정민이 『쓸 만한 인간』의 저자로서 독자들과 만났다. 소규모로 진행된 행사는 박정민 작가와 책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였다. 좋아하는 저자와 만날 수 있다는 청중들의 기대가 한껏 고조된 가운데, 박정민 저자가 시간에 맞춰 등장했다. 최근 대세임을 증명하듯 그가 나타나자 청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보냈다.
“제 글은 다른 이를 위로하거나 응원하고 싶어 쓴 게 아니에요.” 영화 <동주>로 남우신인상을 수상한 배우이자 에세이 『쓸 만한 인간』의 저자 박정민이 말했다. 그는 책에 실린 글들이 자신의 고민의 흔적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저자의 담담한 고백과 다르게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쓸 만한 인간』은 출간 20일 만에 3쇄를 기록했고,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독자들이 줄을 이었다. 저자의 말을 따르면 ‘자신을 위해 외친 주문’일 뿐인 그의 글에, 사람들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건 왜일까.
박정민 저자는 청중들에게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고는, 행여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스스럼없는 그의 태도에 행사는 밝은 분위기로 시작됐다. 저자는 먼저 사회자와 문답을 주고받고, 청중들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답했다.
작가는 아니다
<topclass>라는 잡지에서 연재하던 글들이 모여 책이 출간됐습니다. 작가님의 글만으로 구성된 책이 처음 생긴 셈인데, 기분이 어땠나요?
창피했죠. 글을 배운 사람도 아니고, 취미로 쓰던 글을 모아 책을 내자니 조금 망설여졌어요. 하지만 활동을 하다 보니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분들께 이 책이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내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지만, 뿌듯했어요.
머리말에 ‘작가는 아니다’라고 쓰셨는데, 그런 표현을 쓰신 이유가 있나요?
몇 년 동안 쓴 글을 모으는 작업이었는데도 책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책 한 권을 만드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가는지 처음 알았죠. 책을 계속해서 내시는 작가님들이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겨우 책 한 권 냈다고 작가라고 불리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작가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자기 검열을 거친다고 합니다. 작가님의 책에는 솔직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글을 쓸 때 자기 검열을 하는 편이신가요?
물론이죠. 있는 그대로의 제 이야기를 적었다면 시중에 판매되지 못했을 거예요. (웃음) 제 직업이 남들 앞에서 어떠한 인물을 보여줘야 하는 배우인 만큼, 제 전부를 대중들에게 보여줘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나오는 배우들에게 집중이 잘 안되거든요. 이런 점을 고민하고 철저한 자기검열을 거쳐 글을 실었습니다. 용기가 없고 눈치도 많이 보는 제게 (나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글을 쓸 때는 오직 나와 글뿐이라는 생각에 솔직한 이야기를 적을 수 있었죠.
『쓸 만한 인간』을 보면 작가님의 예전 고민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요즘은 어떤 고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하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요. 배우로서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답을 찾진 못했어요. 제 일을 충실히 하는 것 외에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요즘은 철학책을 읽으며 그 답을 찾아보려 해요. 보면 무척 우울해지긴 하지만요. (웃음)
‘가끔씩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집착하는 건 아닐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230쪽)’는 구절이 있어요. 이 말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전 잘하지 못하는 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몇 년째 하고 있어요. 연기를 못한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죠. 스트레스를 무척 많이 받아요. 배우는 감정에 몰입을 잘할 수 있어야 하는 직업인데, 제게는 그런 재능이 없거든요. 인물에 단번에 몰입하는 배우들을 보면 무척 부럽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 같아요.
남들처럼 잘하려면 부단히 노력해야겠지만, 노력한다 해서 재능이 쉽게 키워지지는 건 아니에요. 막 데뷔했을 때는 굳어버린 습관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전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이해가 잘 가지 않거든요. 여전히 이 직업이 제게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가 연기를 계속하는 건 이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열심히 하다 보니 다행히 예쁘게 봐주시는 분들도 생겼어요. 앞으로도 제가 연기를 못한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위로는 공감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보고 위로를 느꼈다고 말씀해주시는 독자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썼는데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제 글은 다른 이를 위로하거나 응원하고 싶어 쓴 게 아니에요. 누군가를 향한 외침이 아닌, 자신을 위해 외친 주문이라 보는 게 맞겠죠. 그런데도 제 글에서 위로받았다고 말씀해주시는 건, 아마 고민하는 제 모습에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풀리지 않는 현실에 고민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제 모습을 보며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작가로서 작품 중 애착이 가는 부분이 있나요?
오랜 시간을 걸쳐 쓴 글들인 만큼 모든 글에 애착이 가요. 굳이 꼽자면 가끔 ‘그분’이 오셨을 때 쓴 글들이 있어요. 그런 날 글을 쓰면 탈고도 안 하고 한 번에 써내려 나가죠. 신기하게도 독자분들도 그런 글을 더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머리 아플 때까지 오래 쓴 글들은 싫어하시고요. (웃음) 부담 없이 한 번에 쓴 글이 반응도 좋고 제게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작가님에게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돼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들은 잊어버리게 마련이죠. 그렇게 단어와 글을 놓치고 나면 너무 아쉬워요. 하지만 한 번 놓친 글을 돌릴 수는 없는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게 글을 쓴다는 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과정이에요.
이런 정리는 연기에 도움이 되기도 해요.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이상한 길로 접어들기도 하지만, 예전 글을 들춰보며 정리를 하면 새로운 길이 보이기도 해요. 그래서 평소에도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죠.
사회자와의 대담이 끝나자 청중들의 질문 시간이 이어졌다. 여러 사람이 모인 만큼 질문의 종류는 다양했다. 그들은 작가에게 책에 대해 질문했고, 배우로서의 행보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독자의 질문
지금 하는 일이 좋지만,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나요? 혹시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해요.
아직도 가끔 그런 마음이 들어요. 재작년에는 전셋집 보증금이라도 빼서 해외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죠. 그때 마침 제게 <동주> 대본이 들어왔고 운 좋게 촬영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잘 풀렸죠.
정말 연기를 싫어했더라면 진작에 이 일을 그만뒀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오면 넙죽 받아들였습니다. 김영아 작가님이 하신 말씀 중에 ‘예술가는 되지 말아야 하는 몇백 개의 이유보다 되어야만 하는 이유 하나로 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어요. 배우를 그만둬야 할 이유는 무척 많지만,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일을 하고 있고, 이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가능하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시기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작가님 이름으로 책을 또 낼 생각이 있으신가요?
여행 관련 에세이 책은 내지 않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여행을 가면 의무감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아지죠. 그래도 책을 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그때그때 떠오르는 시나리오나 시놉시스를 써놓기도 했고요. 비록 지원을 못 받아 무산되긴 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단편으로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가벼운 농담부터 미래에 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어느 질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예정된 질의시간을 넘길 정도로 청중들의 질문들에 성의 있게 답했다. 10년, 20년 후의 영화계에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냐는 독자의 마지막 질문에 작가는 오랜 생각 끝에 답했다.
가장 큰 목표는 10년, 20년 후에도 연기에 흥미를 느끼는 거예요.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상황은 피하고 싶어요. 결혼해도, 아이가 생겨도 이 일을 정말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단 하나라도 좋으니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가장 잘하는 한 가지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쓸 만한 인간박정민 저 | 상상출판
매거진에 실린 기존의 글들에 새로운 이야기를 더한 『쓸 만한 인간』에는 배우라는 직업군에서 겪는 이야기부터, 낯선 땅에 다다른 여행자로, 누군가의 친구로, 철없는 아들로, 그리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이야기를 전한다.
<박정민> 저11,700원(10% + 5%)
쓸 만한 인간, 박정민이 말하다 시작은 단순했다. 영화 「파수꾼」의 홍보용 블로그에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를 연재하면서 글 좀 쓰는 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13년부터 매거진 『topclass』에 칼럼을 실으며 독자층을 넓혀 갔다. ‘말로 기쁘게 한다.’는 언희(言喜)라는 필명처럼 재치 있는 필력과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