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씻었을까? 2
조선시대의 목욕용품과 온천
이외에도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인삼탕, 창포탕, 마늘탕 등이 목욕에 활용되었다. 인삼탕은 인삼잎을 달여서 넣은 것이고, 마늘탕은 찐 마늘을 목면으로 만든 망에 담아 식초를 함께 섞어 넣은 것이었다.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목간통 안에 들어가 몸 전체를 담그고 목욕을 즐기는 탕 목욕은 매우 지체 높은 일부 계급이나 혼례를 앞둔 규수처럼 특수한 경우에나 가능했던 일로 목욕물을 채운 통 속에 들어가 탕 목욕을 즐기는 경우라 해도 허리 위 반신욕 정도의 목욕이 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최고의 목욕용품, 곡물가루와 약초
이들은 얼굴을 닦을 때 사용하기도 했던 팥과 녹두를 갈아서 만든 가루를 목욕에도 사용하였는데 곡물 가루로 목욕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질이 제거되고 피부에 윤기가 돌게 되어 오늘날 스크럽제를 사용하는 미용 목욕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에 곡물가루는 정말 비싼 목욕용 소모품이었던 셈이다. 혼례를 앞둔 규수의 미용 목적이나 몸이 아픈 사람의 치료 목적으로 지체 높은 가문과 왕실에서는 각종 식물의 줄기나 잎, 열매, 뿌리 등을 이용한 일종의 허브액이나 농축액을 첨가한 목욕물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몸의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해주며 전신에서 그윽한 향기가 나도록 난을 넣고 달인 물을 섞어 난탕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어린아이를 둔 집이나 시집을 갈 규수들이 있는 집에서는 희고 뽀얀 피부를 위해 복숭아잎을 달여 만든 향기로운 복숭아탕으로 목욕과 세수를 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인삼탕, 창포탕, 마늘탕 등이 목욕에 활용되었다. 인삼탕은 인삼잎을 달여서 넣은 것이고, 마늘탕은 찐 마늘을 목면으로 만든 망에 담아 식초를 함께 섞어 넣은 것이었다. 창포탕은 창포의 잎과 뿌리를 삶은 물을 섞은 것으로 보통 쑥을 함께 넣어 만들곤 했는데 이 물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으면 윤기가 돌며 건강해진다고 알려져 있어 비교적 널리 애용되었다. 이 밖에 다양한 약효를 보여 병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전해지는 목욕방법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려움증을 치료하는 데 탁월하다 하여 동의보감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위령선, 영릉향, 모향 각 반 근씩, 건하엽, 고본, 곽향, 백지, 감송향 각 넉 냥씩을 구하여 썰어서 그중 넉 냥 분량을 물 세 통에 넣고 끓여 졸인 후(그것을 섞어) 방 안에서 바람을 피해 목욕을 하라”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쪽머리 모양을 보여주는
채용신의 운낭자상(출처-국립중앙박물관)
세정제 없이 물만으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조선시대의 씻기 문화 속에는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몸과 정신을 정갈하게 하는 목적 외에 각종 질병과 심신을 치료하려는 목적도 함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대로 조선시대에 전신욕은 연례행사 수준이어서 주로 음력 3월 3일(삼짇날), 5월 5일(단옷날), 6월 15일(유두날) 등 상대적으로 날씨가 후텁지근한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이루어졌다. 봄을 알리는 명절인 삼짇날은 제비가 돌아오고, 뱀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이니 본격적으로 따뜻해지는 앞으로를 대비해 묵은 먼지를 털어낸다는 의미로 목욕을 했다. 여성들의 명절이라는 별칭이 어울릴 만한 단옷날은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센 날로 파종이나 모내기를 끝내고 제대로 쉴 수 있는 짬이라는 의미로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물가에 가서 물맞이를 하곤 했으며, 유두날은 여름 더위를 이겨내자는 의미로 개울에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후에 유두 음식을 먹었다.
조선시대에 머리는 그리 자주 감는 것이 아니었다. 세정제의 도움이 없어도 깨끗한 물에 마리를 골고루 적셔 감고 빗질을 촘촘하게 해서 틀어 올린 모양이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일반적이었으므로 쉽게 더러워질 일도 없었고 생각만큼 냄새가 지독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샴푸 등의 세정제 없이 물만으로 머리를 감아서 빛나는 머릿결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성공담을 인터넷상에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염색도, 파마도, 열기구를 사용한 모발 손상도 없던 조선시대에 지금처럼 미세먼지와 화학적 헤어제품들로 범벅이 되지 않은 머리라면 물로 정성 들여 감고 말리고 빗는 과정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위생관리는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온천 따라 행궁까지, 조선시대 치료까지 담당했던 온천
조선시대에도 온천을 이용한 목욕이 이루어졌다. 조선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온양, 유성, 덕산, 수안보, 평산, 동래 등 31개의 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온천은 신분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일반인도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군역의 의무와 노동을 제공하는 요역의 의무 속에 대부분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고 식구들을 부양해야 했던 조선의 서민 남성이나 유교문화권에 살고 있는 조선의 서민 여성에게 온천욕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니 온천이 나오는 주변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노천에 흘러넘치는 온천물을 이용하는 수준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더 자주, 더 호화롭게 내 몸에 투자할 시간과 비용이 주어지는 기회는 신분계급의 높음과 경제적 여유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왕과 왕비는 몸이 좋지 않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도성에 있는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인 행궁에 머무르며 온천욕을 즐기기도 했다. 오늘날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충청남도 온양의 온천은 물이 워낙 좋다고 소문이 나서 온양행궁이 지어졌는데 그 안에 간단한 국가정무를 돌볼 수 있는 정치기구들까지 설치될 정도였으니 규모 면에서도 제법 격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왕가에서는 온천을 건강증진이나 질병치료에 활용하기 위해 온천물에 약재를 넣어 함께 몸으로 흡수되도록 하곤 했다.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의 왕이 온양행궁을 애용한 것은 실록을 비롯하여 공식적인 기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비운의 사도세자가 이곳에서 다리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려고 이용했던 기록이 온천일기라는 책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 36년인 1760년 다리에 종기가 생겨 치료를 위해 10일간 온양행궁으로 행차했는데, 당시 사도세자의 온천행차와 치료 내역이 『온천일기』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밖에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온천도 태조 이성계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즐겨 사용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오늘날은 가볼 수 없으니 궁금증만 더할 뿐이다.
소실된 온양행궁을 복원하여 이미지화한 온양행궁도
고려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했다. 외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사 및 통합사회 강사로 메가스터디, 비타에듀, 비상에듀 등의 유명 대형 학원과 EBS 등에서 두루 강의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전국 최고 사탐 강사 5인(입시타임즈 선정)에 뽑히는 등 수능 영역에서는 10년 이상 최고의 사회과 스타 강사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공무원 한국사 영역으로 강의 영역을 확장했으며, 현재는 TV 프로그램 ‘황금알’에 한국사 전문가로 출연 중이다. 『반주원 한국사』 시리즈, 『반주원의 국사 교과서 새로보기』, 『유물유적 한국사 1』 외 다수의 저서를 편찬·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