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무덤 곁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선산에 먼저 들렀다. 무덤은 세 구역에 걸쳐 몇 구씩 배치되어 있었고 어떤 무덤은 뒤편에 무덤을 보호해 주겠다는 듯 작은 토성이 쌓여 있기도 했다. 어린이가 흙동산을 가만두었을 리 없다. 나는 사촌동생들과 함께 토성을 타넘어 다녔다. 어른들이 정성껏 돌보는 무덤 봉분에 올라탈 용기는 없었지만 토성은 흙더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녔다.
어느 날엔가는 다소 상기된 얼굴의 어른들과 선산에 들렀는데, 쉬쉬하며 속삭이는 어른들 말씀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큰할아버지의 무덤을 멧돼지들이 파헤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봉분 아래 정말로 큰할아버지가 잠들어 있다는 실감이 들었고 놀이터와 같았던 선산이 갑자기 엄한 얼굴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실감은 사촌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깃들었는지 그날 우리는 선산에서 거의 어른처럼 굴었다. 절을 하라면 절을 했고 제기와 남은 과일 정리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으며 토성을 타넘어 다니며 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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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관해 말하자면 2년 전쯤 일어난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나와 배우자는 1년 동안의 양봉 교육을 받고, 처음으로 우리만의 양봉장을 꾸리기로 하였다. 교외에 그린벨트로 지정된, 할아버님의 땅이 있었고 그곳에서 양봉을 작게나마 계속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개발 금지 구역이었기에 야산이나 다름없는 땅이었다. 산림욕장과 인접한 땅이었는데 올라가는 내내 ‘무연고 묘지 이장’에 관한 현수막이 붙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묘지에 관한 현수막을 유심히 보았던 건 양봉을 배울 때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물이 가까이에 있고 볕이 잘 드는 평지, 그러니까 묫자리와 같은 장소라면 벌들이 무리없이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는 말.
우리는 깃발과 끈 울타리로 표시된 할아버님의 땅을 돌아다니며 벌통을 두기에 적합한 곳을 탐색하였다. 몇 군데가 후보로 떠올랐으나 완벽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도중 무덤 하나가 보였다. 나무가 우거진 다른 구역과 달리 그곳은 묫자리답게 평평하였고 무덤 둘레에는 나무 한 그루 없이 볕이 잘 들었다. 할아버님께 여쭈어보니 땅을 샀을 때부터 있었던, 그러니까 아마 수십 년 전부터 있었던 무연고 무덤이라고 하였다. 땅을 획득한 이래로 누구도 그곳에 찾아오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게 할아버님 말씀이었다.
그보다 나은 곳을 찾지 못한 우리는 무덤과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자리에 벌통을 두고 양봉을 재개하였다. 때죽나무가 많은 산, 5월이면 무덤가에 꿀이 가득 모였다. 벌들도 금세 잘 적응한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산 밑에서부터 나무를 짓밟으며 포크레인 한 대가 무덤가에 올라왔다. 서로가 서로를 방치된 무덤, 방치된 땅이라 여겼던 우리는 당황한 얼굴로 대면하였다. 허가 없이 포크레인을 끌고 들어왔지만 무덤을 이장해 가는 대신 땅을 마저 평평하게 다듬어 주겠다는 그쪽의 제안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알고 보니 200년은 족히 되었다는 무덤. 우리는 이장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쪽에서는 무사 이장을 기원하는 제사가 치러지고 있었다. 무덤가 아늑한 양봉장이 다시금 그 아래 묻힌 것을 드러내며 얼굴을 무섭게 바꾸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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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에는 또 다른 무덤을 찾았다. 청동기 시대 권력자들의 무덤인 고인돌 유적을 바라보기 위해 강화도로 향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탁자식 고인돌이 있다는 설명대로 두 개의 돌기둥 위에 두껍고 납작한 돌판이 올라선 고인돌이 잔디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탁자식 고인돌
다른 방문객이 서너 명 정도뿐인 고요한 유적이었다. 고인돌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내게 무덤은 늘 의외의 아늑함을 선사하다가 갑작스레 무서운 얼굴을 들이미는 장소였으므로, 고인돌에서는 과연 어떤 얼굴이 떠오를까, 나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탁자식 고인돌뿐만 아니라 설명 없이 바라보면 그저 거대한 바위로만 보이는 유적지 내 다른 고인돌, 그리고 마을과 인접한 곳에 방치된 모양으로 놓여 있는 고인돌까지 천천히 둘러보았다.
고인돌이라니 고인돌인 줄 안다
고인돌이라 하여도 어쩐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이건 고인돌이라고 안 하면 그냥 사람들이 위에 걸터앉아 쉬기에 딱 좋아 보인다.
응, 마을 평상처럼.......
친구와 시덥지 않은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고인돌의 무표정은 계속되었다. 마을에 사는 개가 나와 친구를 한참 동안 따라와 준 덕분에 우리는 고인돌의 옆에서 돌을 보았다, 하늘을 보았다, 강아지와 놀았다 하며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는데도 고인돌은 내게 어떤 얼굴도 내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곳에선 고인돌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다음 행선지에 발을 들이고 난 뒤에야 나는 왜 고인돌이 얼굴이 없었는가 어렴풋한 결론에 이를 수가 있었다.
우리가 고인돌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고려 궁지. 고려 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활용되었던 궁궐 터로, 독특한 점은 궁궐 뒤편에 조선 시대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던 외규장각이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에만 청동기 시대의 최고 권력자, 고려 시대의 최고 권력자, 조선 시대 최고 권력자 들의 흔적을 모두 돌아본 셈이었는데 그러자 고인돌의 얼굴 없음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다.
고인돌은 살아 있는 무덤이라기보다는 권력자의 무덤임을 상징하기 위한 목적이 너무 커서, 그 상징에 많은 것들이 잡아 먹히고 말아 얼굴이 없었던 것....... 왜인지 그 아래 묻힌 자의 삶은 잘 짐작이 되지 않는다. 위세가 대단한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저 멍해지는 것이다. 나는 관계 없는 남으로서 무덤가를 지나쳤다. 아늑함과 무서움, 삶에 관한 감각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고인돌이 그런 생각을 이어 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정기현
2023년 문학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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