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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자격?!

누군가는 선택적으로 하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는 하고 싶지만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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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충분히 연애할 수 있는 조건, 즉 연애의 자격은 입에 올리는 순간 속물 취급 받기 일쑤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은 언제나 호소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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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_ 1927년 잡지 ‘별건곤’ 삽화. 동아일보 자료 사진

 

비연애인구 전용잡지라고 이름 붙이고, ‘연애하지 않을 자유’라는 부제의 독립출판물 <계간홀로>가 곧 3주년을 맞는다. 처음 이 잡지를 만들 때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말하려는 메시지가 온전히 전달될까?”였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라는 말 자체는 지금도 낯선 개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나에게서 어떤 ‘하자’를 찾아내려고 한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란 ‘충분히 연애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자발적 솔로라는 말에는, 자신의 비연애 상태가 연애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는 강박감이 묻어난다. 그런데 정작 충분히 연애할 수 있는 조건, 즉 연애의 자격은 입에 올리는 순간 속물 취급받기 일쑤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은 언제나 호소력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목을 매는 연애는 사실 근대적 개념으로, 발명되고 학습된 것이다. 이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자연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과 연애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에는 연애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선교사 메드허스트가 <영화사전>이라는 책을 펴낼 때 사랑love을 연애라고 번역했다는 말이 있고, 또 혹자는 1870년 경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love를 연애라고 번역한 것이 첫 용례라고 말하기도 한다. 1890년을 전후로 일본에서 일반화된 이 단어는 1910년 말 처음 한국으로 번역, 도입되었다. 식민지 조선은 대부분의 서구 개념이나 근대 문물을 일본을 거쳐 받아들였는데, ‘연애’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서구에서 낭만적 사랑은 신흥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계급과 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혼하던 귀족과 달리, 부르주아들은 개인 간의 사랑을 통해 결혼하고 가정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근대화가 진행 중이던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했다. 연애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도, 부모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는 연애를 통해 부모님이 정해주는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사람과 이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다. ‘나’가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지, ‘나’는 무엇을 중시하는지, ‘나’가 어떤 만남을 꾸려가는지 등은 모두 ‘나’라는 인간의 특성이며, 고유한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연애를 통해 개인이 ‘발견’되었다. 연애는 당시 함께 수입된 개념 즉 확고부동한 자유 의지와 이성으로 무장한 ‘자아’의 탄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연애는 조혼과 대가족으로 상징되는 전통적 권위에 저항하는 기제이자, 정체화의 중요한 방편이었다.


이 자유연애를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이자 그 당시 국민 오빠(?)였던 이광수는 소설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윤광호」에서 주인공 윤광호는 열렬한 편지로 구애하지만 단호박을 과다 섭취한 P에게 뻥 차이고 괴로워하다 목숨을 끊는데….

 

 

익일에 편지 답장이 왔다. 그 속에는 광호가 자기를 사랑하여 줌을 지극히 감사하노라 하여 훨씬 광호의 비위를 돋운 뒤에 이러한 구절을 넣었다.


‘대저 남에게 사랑을 구하는 데는 세 가지 필요한 자격이 있나니 차 삼자를 구비한 자는 최상이요, 삼자 중 이자를 구한 자는 하요, 삼자 중 일자만 유한 자는 다수의 경우에는 사랑을 얻을 자격이 무하니이다. 그런데 귀하는 불행하시나마 전자에 속하지 못하고 후자에 속하니이다.’


하고 한 줄을 띄워놓고,


‘그런데 그 삼자격이라 함은 황금과 용모와 재지(才地)로소이다. 차 삼자 중에 귀하는 오직 최후의 일자를 유할 뿐이니 귀하는 마땅히 생존 경쟁에 열패할 자격이 십분하여이다. 극히 미안하나마 귀하의 사랑을 사퇴하나이다.’


하고 혈서도 반송하였다.


광호는 ‘옳다, 나는 황금과 미모가 없다’하고 울었다. 울다가 행리 속에서 특대장과 우등 졸업 증서를 내어 쪽쪽 찢었다.


‘재지는 최말이라, 재지는 사랑을 구할 자격이 없다.’
하고 그 찢어진 종잇조각을 발로 비비고 짓밟아 돌돌 뭉쳐서 불에 태웠다.

 

-이광수, 「윤광호」, 『청춘』, 1918, 4.

 

요즘 같았으면 P는 저 편지가 캡쳐 당하고 인터넷에서 신상이 털리며 ‘삼자격女’ 같은 타이틀을 얻으며 무수한 패러디를 낳았을 것이다. 역시 한국 여자는 속물이라고 부들부들 떨 분들을 위해 미리 결정적 스포를 하자면, P는 남자다. 윤광호도 남자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연애를 가로막는 것은 성별이 아니라, 오히려 P가 세 가지로 압축한 소위 ‘연애의 자격’이다. 이 ‘삼자격’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는 연애의 조건이기도 하니, P는 근대 연애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것은 낭만적 사랑으로 둔갑한 근대 자유연애의 실체를 까발리는 진술 정도로 볼 수 있다. 저 세 가지 다 있어야 연애하면, 인구 대다수가 연애하는 세상은 엄친딸과 택기아(택시 기사님의 아들 : 택시만 타면 기사님들이 아들 자랑을 해서 내가 한 번 만들어보았다)만 살게?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판타지는 달콤하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연애를 더욱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요소이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면 배신의 아이콘이 되지만 생김새에 연연하지 않고 내면의 순수함을 알아보는 것은 진짜 사랑이다. 가진 것 없어도 나만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본다. 그러나 결국 연애에는 저 세 가지 조건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황금이나 용모, 재지는 그 사람의 특성이 아닌가? 연애에서 조건을 따지는 것이 속물적이라기보다, 영혼이나 심성 이외의 것을 보면 무조건 속물이라고 몰아붙이는 편협한 판단 기준이 더 문제이다. 오로지 순수한 영혼만이, 착한 심성만이 사랑의 조건이라면 영혼결혼식 하지, 왜 “너의 눈, 코, 입, 날 만지던 니 손길” 하면서 연애하냐고요. 누군가에게는 상대방의 황금이 영혼일 수 있고, 용모나 재지가 뛰어난 것이 진실된 성품이나 착한 것일 수 있다. P는 윤광호가 연애의 자격 중 하나만을 갖추었기 때문에 거절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일 것이다. 어떤 조건을 최우선으로 치는가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래서 ‘연애의 자격’은 현실에서 100% 들어맞지는 않는다. (클럽에서 여자들에게 명문대 학생증을 보여준다는 도시 괴담 속 남자들도 아마 자신의 ‘재지’가 연애 자격의 우선순위라고 생각해서…?)


‘연애하지 않을 자유’는 연애의 자격을 다 갖춘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연애의 자격이 확보된 사람이 연애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생각, 즉 ‘연애=좋은 것’, ‘할 수 있으면 안 할 리가 없는 것’, ‘할 수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연애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연애는 발명되고 학습된 것으로서, 한국에서의 역사는 겨우 백 년 남짓 되었고, 절대적이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연애는 때로는 자본주의와 공모하고, 때로는 자아 발견 욕구와 만나고, 때로는 국가 통치 정책과 공명하기도 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저출산 대책이랍시고 남녀 집단 미팅을 제시하는 사례를 보면, 이를 노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연애가 쓰고 있는 낭만과 당위의 베일을 벗겨내면 ‘연애 하지 않을 자유’를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수월해진다. 누군가는 선택적으로 하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는 하고 싶지만 못할 수 있다. 그 상태를 일일이 십자가 밟기처럼 ‘너 연애 안 하는 거야, 못하는 거야? 연애 자격 까봐!’ 하고 검증할 필요는 없다. 비연애 상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구나 체험하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신에게서 ‘연애의 자격’을 감별하고 ‘거봐! 못하면서 왜 자꾸 자발적으로 안 하는 척해?!’ 하고 몰아붙이는 시뻘건 눈동자를 만나면? 대화가 안 통하는 단계이니 그냥 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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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승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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