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공항과 고래 고기
〈Travel Moment〉김연수 여행 에세이
아버지가 “시원한 거 하나 마실래?”라고 물었다. 귀찮은 마음에 안 마시겠다고 얼른 대답했다. 고동색 고무 대야 안의 차가운 물에는 코카콜라, 칠성사이다, 포카리스웨트, 게토레이 같은 것이 둥둥 떠 있었다.
PHOTOGRAPH : LEE CHUN-HEE
내가 신병 훈련소에 들어간 건 1991년 7월의 일이다. 단기 사병, 즉 방위병이었기에 교육 기간도 4주로 짧았고 입영 장소도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경산의 50사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입영 전야의 비장함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내 헤어스타일을 담당한 동네 이발사에게 부탁해 머리를 깎은 뒤, 집에서 일찌감치 잠드는 것으로 입영 준비를 마쳤다. 경산까지는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을 감안해 아버지의 친구분께 훈련소 앞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막상 훈련소에 도착해 아버지와 친구분의 송별을 받으려니 어쩐지 보이스카우트 하계 캠프에라도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로 옆에선 슬픈 눈빛을 한 애인과의 포옹으로 고별사를 대신하는 장정으로 북적대는데, 나는 “군대 마이 좋아졌네” 같은, 노병의 소감을 들으며 민간인 생활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니 왠지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달까. 해서 아예 재입대할 기세인 두 분을 내가 먼저 보내 드리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몇 번이고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이제 곧 훈병이 될 나는, 그러나 덥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입 안에서 중얼중얼.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라고 읊조렸다. 그렇게 셋이 함께 길을 되돌아 나오는데 캔 음료를 얼음물 담은 큰 고무 대야에 넣어두고 파는 아주머니들이 쭉 앉아 있었다. 그중 한 고무 대야를 가리키며 아버지가 “시원한 거 하나 마실래?”라고 물었다. 역시 귀찮은 마음에 그럴까 말까 따져보지도 않고 안 마시겠다고 얼른 대답했다. 고동색 고무 대야 안의 차가운 물에는 코카콜라, 칠성사이다, 포카리스웨트, 게토레이 같은 것이 둥둥 떠 있었다.
7월에 입대한 훈련병은 다른 시기에 입대한 훈련병이 경험하지 못하는 훈련을 하나 배우는데, 그게 바로 오침(午寢)이다. 점심 먹고 내무반에서 1시간 정도 낮잠 자는 시간이 있었던 것. 군대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듯 그 시간에는 자기 싫어도 무조건 눈 감고 누워 있어야 했다. 원하지도 않는 시간에 잠드는 일보다 더 어려운 건 깨는 일이다. 해서 오침은 낮은 포복보다 힘든 훈련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고난도의 훈련을 7월 군번만 받느냐면, 너무 덥기 때문이다. 훈련을 받다 보면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건만 물도 많지 않아 탈진을 막으려고 스스로 소금을 집어 먹기까지 하는 형편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입대하기 직전에 본 그 고동색 고무 대야 속의 코카콜라, 칠성사이다, 포카리스웨트, 게토레이 등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 것은….
PHOTOGRAPH : KRIS DAVIDSON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귀국 항공편에 탑승할 즈음이면 지갑에 현지 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환전하기 쉽게 큰 지폐만 남기고 나머지는 출국 날짜에 맞춰서 써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출국장에서 주머니를 뒤져보면 자잘한 지폐와 동전은 나오게 마련. 이리저리 모으면 그 액수는 1~2만 원을 넘지 않는다. 면세점에 가봐야 겨우 초콜릿이나 살 수 있을까 말까. 그럴 때는 탑승장 안쪽에 있는 간이식당이나 카페에 들르는 게 상책이다. 그곳에서 생맥주를 판다면 가장 이상적이다. 거기서야 로컬 맥주지만, 탑승 게이트로 들어가는 순간 배 속의 그 맥주는 수입 생맥주로 둔갑하니까.
얼마 전에는 나가사키(長崎)에 다녀왔다. 2013년부터 진에어 직항편이 취항하기 시작한 나가사키공항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공항이다. 국내선이 활발한 곳이라 상하이와 인천 등지를 오가는 국제선 구역은 오히려 공항 한쪽에 밀려나 있다. 입국 심사장을 지나 탑승장 쪽에는 지방 기차역의 매점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면세점이 있다. 보통 주류를 구입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나가사키공항의 이곳 면세점에는 살 만한 일본 술이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나가사키 지역의 사케를 사 갈 요량이면 공항에 들어가기 전에 구입해 부치는 짐에 넣는 게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팁이고, ‘라스트 드링크’를 즐기는 이를 위한 좀 더 구체적인 팁은 다음과 같다. 입국 심사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스시집에 꼭 들르라는 것. 앞에서 말했듯, 거기에서는 기린 생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까. 그중에서도 세트 메뉴를 주문하는 게 좋다. 생맥주 세트를 시키면, 간단한 해물 세 종류가 나오는데, 맨 오른쪽에 있는 것은 문어숙회고, 맨 왼쪽은 도미회다. 그럼 한가운데 말린 포 같은 하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건 구지라(くじら), 즉 고래 고기였다. 나가사키 현은 고래 고기가 유명해 기차역에서 파는 에키벤에도 구지라가스가 있다더니, 맥주에 간단하게 딸려 나오는 회가 고래회인 것이다. 맛있게 먹은 뒤 1잔 더 주문해서 고래 고기를 먹을까 말까, 나는 망설였다. 옆 테이블에는 막 도착한 일본 아저씨가 나가사키까지 왔으니 구지라를 먹어야지, 라고 말하며 회를 잔뜩 주문하고 있었다. 더 마시다가는 취할 것 같다. 게다가 시간도 다 됐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3시간쯤 지나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음, 말하지 않아도 이제 내 머릿속 사정을 다들 알겠지.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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