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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나(I)'는 왜 항상 대문자인가

매체 기술을 권력의 문제로 생각했던 주권자들과 매체 기술이 초래한 새로운 정치적 상황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던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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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이 아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질문의 과정이다.

이택광

 

영어에 스며 있는 철학적인 의미라니 뭔가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생각의 구조가 언어라고 한다면 영어에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이 방식에 대해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을 '앎을 사랑하는' 철학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영어는 '외국어'이기 때문에 한국어를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에게는 낯설다. 예전에 지인 한 명이 우스개 삼아 "영어가 어려운 까닭은 외국어이기 때문"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그냥 웃어넘길 게 아니라 새겨들을 만한 지혜가 들어있는 말이 아니었나 싶다.


철학 하면 떠오르는 소크라테스도 다양한 '외국인'을 '손님'이라고 부르면서 대화를 나눴다. 철학은 '외국인'에 대한 환대다. 물론 이런 환대가 가능한 곳이라야만 철학도 가능하다. 외국인을 환대하지 않는 곳과 ‘탁월함’을 가르치는 문제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었던 메논이 말하듯이, 아테네를 벗어나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다른 도시에서 소크라테스처럼 함부로 비판을 했다간 체포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메논의 말이 있은 지 3년 뒤, 메논이 자유로운 도시라고 믿었던 그 아테네도 소크라테스의 독설을 더 이상 '관용'하지 못하고 처형해버렸으니, 철학 자체가 환대 받지 못하는 '외국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메논이 닿기만 해도 전기를 쏘아대는 '전기가오리(torpedo ray)'에 소크라테스를 빗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마비시켜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몰랐던 것을 상기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철학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이 아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질문의 과정이다. 영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의 말'로서 영어를 바라보는 것, 여기에서 '영어 학습'이라는 면모를 벗어난 본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영어라는 개별 형태의 특징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로서의 영어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게 이 기획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국어인 영어는 한국어에 익숙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한 지인이 들려준 대학 시절 영어 과외에 얽힌 경험담이 생각난다. 그 지인은 go의 과거형이 왜 went인지를 묻는 중학생에게 "영어는 원래 그러니까 그냥 외워"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독일어의 영향으로 그렇게 쓴다는 것을 알고 계면쩍었다고 한다. 영어는 숱한 외래어의 영향을 받았으니 이런 '발견'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근대적인 표기법으로 통일되기 전까지 go의 과거형으로 gaed도 쓰였다. 스코틀랜드의 고문헌에서 이와 같은 표기법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어를 하면서 마주치는 여러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나'를 표현하는 대문자 I일 것이다. 왜 '나'는 항상 대문자로 쓰는 걸까. 물론 미국의 시인 E. E. 커밍스처럼 소문자로만 시를 쓰는 경우도 있고, SNS에 포스팅을 하거나 휴대폰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보낼 때 입력 속도를 높이기 위해 대문자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모두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영어에서 '나'는 무조건 대문자 I다. I는 어쨌든 대명사다. 대명사 자체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유럽어는 거의 없다. 대체로 문장의 첫머리에 오는 단어만 대문자로 표기한다. 그런데 영어에서 '나'를 의미하는 I는 예외다. 항상 대문자인 것이다.

 

이택광


철학의 역사는 '나'를 지칭하는 대명사를 완성하는 문제에서 이 '나'가 분열되어 있는 문제까지 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나'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문자를 고집한 게 아닐까. 이런 추측은 크게 틀리지 않다. 원래 I는 고대 영어 ic에서 유래했다. 독일어에서 I에 해당하는 것이 ich이고 네덜란드어에서 ik인 것을 보면, 확실히 I의 기원을 알 수 있다. 보통 심리학에서 즐겨 쓰는 ego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나'를 뜻했다.

 

원래 I는 손으로 글씨를 쓰던 중세에 독립적으로 표기한 i를 강조하기 위해 길게 쓰던 습관에서 연유했다. 말하자면 소문자를 손으로 길게 쓴 것이 I였다. 이 표기는 숫자 1을 의미하기도 했다. 1을 I로, 2를 II로, 3을 III으로 표기하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대문자 I는 특별히 다른 글자와 구별하기 위해 썼던 셈이다. 원래 소문자 i는 위에 점이 없는 1의 형태에 가까웠다. 이렇게 쓰던 i를 강조하기 위해 길게 늘여서 I로 만든 것이다.


길게 늘인 대문자 I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를 의미하는 글자 i를 소문자로 쓰면, 의미론적인 중요성에 비해 너무 하찮게 보여 문장에서 실수로 떨어져 나온 것처럼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일인칭 주어를 표기하면 의미 전달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문장 첫머리에 오는 일인칭과 중간에 오는 일인칭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류 공통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게으름 덕분에 일인칭 주어는 그냥 대문자로 표기하는 버릇이 굳어져버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게 통일해서 쓰는 게 훨씬 쉽고 편했기 때문이다.


대문자 I의 쓰임새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텍스트가 바로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다. 13세기에 쓰인 이 텍스트에서 초서는 당시로 본다면 혁신적인 문법을 채택해서 일인칭 주어를 대문자로 표기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새것에 민감하다. 이들이 혁신을 대중화한다. 초서 덕분에 '나'를 의미하는 I를 대문자로 쓰는 습관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의 일부가 되었다. 문학이 어떻게 언어를 바꾸고 또 어떻게 습관을 바꾸는지 초서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일인칭 주어를 대문자 I로 쓰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텐베르크는 인쇄기계를 처음으로 발명한 후, 인쇄물의 품질이 손으로 필사한 것과 똑같다는 점을 내세워 광고했다. 이처럼 새로운 감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감각을 새롭게 배치함으로써 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일인칭 주어를 뜻하는 대문자 I는 처음에 손으로 글씨를 쓰던 철자법에서 유래했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기계로 서적을 찍어내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정확한 필사를 위해 만들어졌던 철자법은 그대로 보전되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줄까. 얼핏 생각하면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데리다는 이 사실에 착안해 글와 말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의미론적인 문제를 가지고 해체라는 놀라운 철학적 사유 방식을 만들어냈다.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글쓰기와 차이』에 담겨있는 「차이(Diff?rance)」라는 에세이에서 이런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서 '글쓰기'라는 용어는 문자를 통한 기록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유의해서 데리다의 생각을 살피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데리다는 차이를 뜻하는 프랑스 단어 diff?rence의 e를 a로 바꿔 쓴 diff?rance도 발음상 같은 소리를 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문자로 기록된 것이 모두 소리로 들리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diff?rance의 a는 소리를 통해 감각되지 않지만 인지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바로 이런 인지 또는 이해 자체가 감각적인 메타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명한 문자와 소리의 불일치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말이 글보다 우월하다는 전통적인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성서조차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지 글이 있었다고 전하지 않는다. 플라톤에서 후설에 이르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문자는 음성을 위한 보조수단일 뿐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대접 받지 못했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한술 더 떠서 플라톤은 문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대화에 담겨 있는 생생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놓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문자의 편리성이 기억력을 감퇴시켜서 결과적으로 진리에 대한 나태한 태도를 부추기게 된다는, 요즘으로 치면 SNS 때문에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개탄 비슷한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플라톤에서 시작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가 근거 없는 믿음을 통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글과 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영어의 일인칭 주어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은 소리와 표기의 조응관계에 따라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표기는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매체 기술과 과거 필사의 습속이 결합해서 이루어졌다. 문자의 기록이 음성과 아무런 관련 없이 발생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매체 기술은 바로 감각의 재배치를 의미한다. 매체 기술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유럽에서 띄어쓰기 문제는 권력의 지배를 받았다. 주권자가 바뀌면 띄어쓰기 규칙이 바뀌었고, 이에 불복하는 인쇄업자는 추방당하기도 했다. 문자로 무엇을 기록한다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영어에서 '나'를 대문자로 쓰게 된 사연은 매체 기술을 권력의 문제로 생각했던 주권자들과 매체 기술이 초래한 새로운 정치적 상황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던 긴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다음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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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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