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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스파이에게 바치는 진혼곡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의 마지막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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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끼는 후배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스파이로서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정의도, 명분도 희미해져갔다. 임무를 위해서 친구를 저버리기도 하고, 가족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는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적절하게 타협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스마일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스마일리는 철두철미한 정보요원, 스파이였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의 주인공 조지 스마일리는 늙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에서 스마일리는 후배들에게 밀려났고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났다. 언제나 날이 서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스파이가 현역에서 물러나면 어떻게 될까?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에는 게리 올드먼이 연기하는 스마일리의 느슨한 일상을 보여준다.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조용한 식당에서 차분하게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날이 바뀌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것이 요동치고 있는지.

존 르 카레의 『스마일리의 사람들』 은 스마일리가 등장한 7번째 소설이고, 은퇴한 스마일리가 카를라와 대결하는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에서 은퇴한 스마일리는 정보국 내의 ‘두더지’를 잡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내부의 공식적인 인력이나 절차를 이용할 수 없다. 스마일리는 알게 된다. 오래 전 만나 망명을 요구했지만 거절하고 소련으로 돌아간, 훗날 KGB의 수장이 된 카를라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스마일리가 일생을 바쳐 헌신했던 모든 것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The Honourable Schoolboy』 에 이어지는 『스마일리의 사람들』 에서 스마일리는 한때 그가 담당했던 소련 망명자의 죽음을 알게 된다. 에스토니아 출신이었던 블라디미르는 소련의 장군이었을 때 스마일리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망명한 후에는 망명자들의 조직을 만들어 이끌어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블라디미르의 가치는 사라졌고 망명자 조직도 지리멸렬했다. 살해당하기 전 블라디미르는 스마일리와 접촉하기를 원했고,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전했다. 정보국에서는 스마일리에게 사건을 맡긴다. 가급적이면 조용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리고 싶어서. 하지만 스마일리는 블라디미르의 정보가 모스크바 센터라 부르는 KGB의 수장 카를라에 관련된 것임을 알아낸다.

『스마일리의 사람들』 의 배경은 1970년대다. 지금 생각하면 냉전이 한창인 때였고,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미 그 때에도 모든 것은 썩어 들어갔다. 총성은 이제 끝났어, 조지. 그게 문제야. 모두가 회색이라고. 짝퉁 천사들이 짝퉁 악마와 싸우는 격이잖아. 전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총성도 들리지 않는 전쟁이라니. 존 르 카레는 두 경제 강국의 강박관념은 자체의 정체성과 의도, 세력과 약점을 드러내면서, 1970년대에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상호 감시와 과대망상에 빠진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아니 그렇기에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반면 외부에서는 그들의 초월적인 권력을 두려워했다. ‘불법’적인 작전을 금지하고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 그 결과 진짜 스파이는 사라지고 관료들과 기회주의자들만이 남았다.

시스템은 언제나 그랬듯 말잔치의 쓰레기만 남기고 눈물을 흘리며 사라졌다.....그는 얍삽한 자들이 무대를 장악할 때 뒷방에서 혼자 분투했건만 여전히 무대를 차지한 자들은 그들이다......오늘날 조용히 자신의 가슴을 들여다보니 처음부터 지도자는 없었으며, 지도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사실만 깨닫고 말았다. 그를 향한 유일한 제약은 자신의 이성과 양심뿐이었다. 결혼과 공공에 대한 봉사 정신도 빼놓을 수는 없다. 사회에 평생을 이바지했건만 남은 거라곤 나 자신뿐이군. 스마일리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은 007과 본 시리즈의 스파이 액션이 아니라 인간들이 벌이는 야비하고 추잡한 첩보전을 보여준다. 당연히 사람이 죽고 싸움도 벌어지지만 중요한 건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존 르 카레는 『스마일리의 사람들』늙은 스파이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라고 말한다. 스마일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끼는 후배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스파이로서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정의도, 명분도 희미해져갔다. 임무를 위해서 친구를 저버리기도 하고, 가족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는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적절하게 타협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스마일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스마일리는 철두철미한 정보요원, 스파이였다.

지금껏 스마일리가 죽어라 추적했던 야수도 광인도 로봇도 아니었다. 그도 분명한 인간이었다. 스마일리가 손을 조금만 내밀어도 절박한 사랑 따위에 무너지고 말 그런 인간.....그건 스마일리 자신이 실타래처럼 꼬인 삶을 통해 터득한, 누구보다 잘 아는 약점이기도 했다.

스마일리는 자신이 쫓는 것이 카를라인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결이라는 것도 감지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자신이 카를라의 쌍둥이 같은 존재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카를라와 스마일리를 비슷한 인간, 비슷한 이미지로 바라본다. 스마일리가 카를라를 잡으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 조지. 카를라는 당신 과거를 돌려주지 않아. 존 르 카레는 (스마일리와 카를라) 둘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결국 서로가 무인도의 유령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만다. 카를라는 자신의 정치 신념을 희생하고 스마일리는 인간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스마일리의 사람들』 은 냉전이라는 시대, 첩보전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희극’을 만들어냈는가를 보여준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가. 체제를 위하여, 라는 대의명분은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위안조차 주지 못한다. 거대한 환상일 뿐이다.

스마일리는 그런 점에서 결국 과거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불안해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언제나 마음을 다잡고 임무를 수행했다. 양심을 문밖에 남겨두어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마일리는 틀을 부수지 않는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때로 양심을 버리면서도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질 뿐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시대는 변했고, 존 르 카레는 스마일리의 시대를 이미 오래 전에 끝냈으니 이제는 새로운 첩보소설을 읽을 때이다. 존 르 카레의 근작들의 번역을 고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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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존 르 카레 저/조영학 역 | 알에이치코리아(RHK)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총 8편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중 일곱 번째 작품으로 영국 정보부의 조지 스마일리와 KGB의 스파이 마스터 ‘카를라’와의 마지막 대결을 다루고 있다. 은퇴한 늙은 스파이를 다시 첩보전의 중심으로 끌고 온 이 이야기는 ‘카를라 삼부작’의 시작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함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자 ‘궁극의 스파이 소설’로 평가받는 존 르 카레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자신의 삶 대부분을 국가에 헌신하고 거대한 이념의 충돌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스파이, 냉전이 낳은 사생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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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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