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전에 지나쳐버린 곡들
제일 처음 클래식에 관심을 가진 순간을 떠올려보면, 낯설고도 아름다운 선율에 귀가 번쩍했던 경험이 있었다. ‘서정적’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피부에 딱 와 닿게 느껴지게 하는 피아노의 선율. 화려하고 웅장하면서도 잘 짜여 있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흠칫 놀라 ‘도대체 이건 무슨 음악이지?’ 하던 호기심이 클래식을 기웃거리게 했다. 드라마나 광고 음악에 쓰이거나 휴대폰 알람 소리 등으로 익숙하게 듣는 멜로디도 클래식에서 따온 것이 많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클래식 선율의 아름다움을 접해왔다. 단지 그게 ‘아름답다’고 인식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줬기 때문에 별 감흥 없이 들은 게 아닐까.
체르니 30번쯤 다루면 눈 감고도 칠 수 있게 되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나 왕년에 장동건과 구본승이 듀엣으로 부른 노래 <풍경>에 삽입된 ‘G 선상의 아리아’ 같은 곡도 마찬가지다. 그 곡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기 전에 친숙하고 대중적인 매력에만 만족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확인해볼 수 있는데, 잘 안다고 생각하는 친숙한 선율의 클래식 곡도 처음부터 끝까지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관현악곡, 기악곡으로 분류되는 보통의 클래식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다정한 멜로디로 귀에 훅 꽂히는 이 음악들을 소품집으로 분류할 수 있다.
“클래식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얘기 중 하나는 ‘1곡이 너무 길다’는 거야. CD 한 장에 서너 트랙 담겨 있는 듯하지만, 한 시간을 들어야 하거든. 그런 고충이 있는 리스너에게는 이 소품곡들이 딱이지.” 마 선배가 제시한 소품곡 리스트를 보니,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곡 제목들이 눈에 띈다. 한 소절쯤은 흥얼거릴 수 있을 만한 곡들 말이다.
“현재까지 남아서 연주되는 소품들은 몇백 년의 시간과 싸워 이겨온 작품이기 때문에, 지금 들어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가 많지.”
“소품은 말 그대로 작은 작품이라는 뜻이야. 보통 교향곡이나 소나타처럼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짧은 클래식 곡들을 가리키지. 특별히 이런 조건을 갖춰야만 소품이라고 하기보다, 짧은 곡들의 통칭이기 때문에 좁게는 습작형태의 작품부터 넓게는 유명한 클래식 작품 중 일부를 따서 연주한 곡까지 포함돼.”
소품곡들은 보통 편집(컴필레이션) 형태로 묶여 음반이 나온다.
“클래식으로 유명한 음반사들이 있잖아. 노란 딱지의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이라든가, EMI, Warner Music 등의 음반사에서 선택하면 실패하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한 세대를 걸쳐 이름을 남긴 명장들의 녹음을 가져다 엮은 앨범들이니까. 이런 컴필레이션 앨범은 유명한 곡이나 손꼽히는 연주들을 맛보기로 들어볼 수 있는 장점도 있어.”
그렇다면 컴필레이션 앨범을 고르는 기준도 있을까?
“컴필레이션 앨범은 보통 테마 별로 음악이 구성되거나 악기 별로 구성되는 게 보통이지. 유명한 소품들은 하나의 악기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해. 마음에 드는 곡이 생기면, 다른 악기로 연주된 버전도 들어보면 재미있을 거야. 우리는 악기별로 소품을 살펴보자. 스포츠에서 축구와 야구만큼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클래식계의 대표 악기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품집부터 들어 볼까?”
[바이올린 소품집]
장영주가 연주하는 <샤콘느>
※ 바흐 : G선상의 아리아 (Bach : Air on the g string)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듯, 곡이 시작되면 선율이 은은하게 마음 속에 젖어 들어가는 이 곡은,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울 만큼 낭만적인 곡이다.
“그만큼 최고의 유명세를 자랑하는 이 곡은 바이올린 소품곡으로 분류하기 무색할 만큼 다양한 악기로 편곡됐어. 원곡은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Orchestral Suite)중 3번 모음곡에 포함된 곡이야.”
“이 곡의 유래를 두고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켜려는데 줄이 다 끊어지고 G선만 남았대. 그걸로 연주해서 ‘G선상의 아리아’가 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어. 이 곡은 관현악 모음곡에서, 바이올린의 가장 낮은 음을 내는 G선으로 연주하는 독주곡으로 편곡됐어. G선의 매력은 낮은 음이지. 이 말은? 첼로로 들어도 당연히 좋다는 얘기야.”
※ 비탈리 : 샤콘느 (Vitali : Chaconne)
와르르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을 들려주고 있는 듯한 처연한 멜로디의 이 곡은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고까지 불린다고 한다. 이 얘길 듣고 마 선배 왈,
“진짜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고 삐딱한 마음을 갖고 들었는데도 금세 푹 빠져 들어버렸”단다. 쓸쓸한 선율과 오케스트라의 비장함이 어울려 마음을 울리는 곡이다. 요즘 같이 쌀쌀한 가을날 듣기에는 어쩌면 조금 위험한 곡!
※ 마스네 : 타이스의 명상곡 (Massenet : Meditation from Tais)
영화 <홍진>의 한 장면
“너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영화가 있어. 한국에는 무협영화의 주인공으로만 알고 있는 대만 배우 임청하의 숨은 걸작 <홍진(Red dust)>이란 영화야. 여 주인공이 연인과 만찬을 나누며, 암담한 미래 앞에서 불안해할 때 악사가 조용히 다가와서 이 음악, 타이스의 <명상곡>을 연주해.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 조용히 흘러나오는 이 <명상곡>은 정말로 아름다워. 여주인공이 이 장면에서 눈물을 훔치는 까닭도 두려움보다는 아름다움 때문이구나 싶을 만큼.”
<홍진>은 영화 <색계>의 원작자이자 여류 소설가인 장애령(張愛玲)의 실제 생애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공산 혁명이라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 휩쓸렸던 여인의 인생과 사랑을 어둡고 담담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당시 중국어권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거머쥐고 극찬을 받았다. 한편 이 작품의 각본가가 자살하는 둥 구설수에도 많은 작품이라고 한다. 이 영화 속에서 타이스의 <명상곡>은 잠깐 등장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원래는 마스네(Jules Massenet)라는 작곡가의 오페라 ‘타이스 (Thais)’의 중간에 삽입되었던 관현악곡이다. 이 곡은 김연아의 스케이트 곡으로도 잘 알려졌지? 애잔하지만 비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마음속에 스며드는 듯한 곡이야. 개인적으로는 이 곡을 바이올린으로 편곡한 음악가에게 고맙다는 얘길 하고 싶을 정도라니까.”
장영주가 연주하는 <지고이네르바이젠>
※ 사라자테 : 지고이네르바이젠 (Sarazate : Zigeunerweisen)
“바이올린 소품 얘기를 하면, 의외로 이 곡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더라. 제목이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 때문일까? 심각하게 시작되는 이 유명한 도입부는 오히려 코믹한 CF의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쓰여. 작곡가인 사라자테는 스페인출신의 빼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스페인 집시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해. 리듬이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하지? 굉장히 무게 잡는 듯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는 리듬의 곡이야.”
※ 엘가 : 사랑의 인사 (Elgar : Salut d'Amour)
“’소품’이란 말이 이 곡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곡이 있을까? 영국의 작곡가 엘가가 자신의 부인을 위해 쓴 곡이래. 구절구절 사랑스럽고 귀여운 선율에 살짝 오글거리는 느낌도 나지? 짤막한 곡이라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들도 즐겨 연주하며, 첼로로도 많이 연주해. 발랄한 느낌이 좋다면 역시 바이올린으로 들어봐야 할 곡이야.”
[피아노 소품집]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트로이메라이>
※ 슈만 : 트로이메라이 (Schumann : Traumerei)
“‘트로이메라이’란 꿈을 꾸다, 라는 뜻이야. 마치 꿈결을 헤매는 기분이 들 만큼 피아노 선율이 부드럽게 다가오지. 가곡의 왕 슈베르트 못지않게 낭만적인 가곡을 많이 작곡했던 슈만이 지은 곡인데, 그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만들었다는 피아노 작품 모음집 <어린이의 정경>에 담긴 곡이야.
이 음악은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도 주멜로디로 등장하는데, 피아니스트 호로비츠가 직접 연주하는 트로이메라이가 가히 일품이야. 여러 연주 중에서도 호로비츠가 수십 년 만에 고향인 모스크바에 어렵게 돌아와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있노라면 그 주름진 손가락 끝에서 울려 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가슴이 뭉클해지더라.”
※ 사티 : 짐노페디 (Satie : Gymnopedies)
“이 음악은 익숙하지? 영화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이 곡은 클래식보다는 현대의 연주 곡에 가까운 느낌이야. 사티의 짐노페디는 간결하고 조심스러울 만큼 고독한 느낌의 멜로디 라인이 인상적이야. 요즘 사람들의 감성에도 걸맞은 곡이지.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에서 종교의식에 사용했던 춤곡이라고 한다. 이 곡을 배경음악으로 춤을 췄다면 참 난해한 현대무용이 하나 탄생했겠지? 그의 음악은 당대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던 모양이야. 에릭 사티도 시대를 앞서 간 작곡가로 현대에 와서야 재평가받고 있어.”
랑랑이 연주하는 <라 캄파넬라>
※ 리스트 : 라 캄파넬라 (Liszt : La campanell)
“지난주에 이야기했듯이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였던 리스트는 많은 아름다운 피아노곡들을 남겼어. 워낙 스스로 피아노를 잘 쳐서인지, 그의 피아노곡은 하나같이 어려운 기교가 담겨 있어. 리스트의 곡 중에서 드물게 발랄한 느낌의 곡이 바로 이 <라 캄파넬라>야. ‘종소리’라는 뜻의 <라 캄파넬라>는 도입부의 영롱한 선율이 피아노의 음색을 정말 잘 살리고 있는데, 점점 뒤로 갈수록 음표는 현란해지고, 곡의 분위기까지 신비로워져.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100미터를 뛰고 난 육상선수의 다리처럼 피로해질지 몰라도 듣는 이에게는 아름답고 즐거운 곡이지.”
※ 베토벤 : 엘리제를 위하여 (Beethoven : Fur Elise)
“이 곡은 옛날에 자동차가 후진할 때마다 나왔던 선율이야. 아마 제목은 몰라도 멜로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곡이지. 국민 벨소리라고나 할까. 베토벤이 헌사한 ‘엘리제’는 누구일까 싶지만, 베토벤의 여인들은 모두 가설만 있을 뿐 실재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아. 원곡은 벨소리로 사용되는 반복 절보다 더 길고 다이내믹해. 이번 기회에 꼭 한번 제대로 들어봐.”
랑랑이 연주하는 <이별의 곡>
※ 쇼팽 : 연습곡 작품 ‘이별의 곡’ (Chopin : Etude op.10 no.3)
“쇼팽의 피아노 작품들은 지금까지 소개해온 소품스타일에 들어맞는 곡들이 많아, 굳이 하나를 꼽기가 매우 어려워. <클래식 가이드>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녹턴>만큼이나 유명한 쇼팽의 피아노곡이 바로 이 연습곡 3번이야. 리스트의 곡 <사랑의 꿈>과 비슷한 느낌이면서 이별의 슬픔을 담고 있는 이 곡은, 쇼팽이 완성하고 나서 스스로 매우 만족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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