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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빅뱅이 있다면, 80년대 문화혁명은 ‘시나위’

80년대 인기 있었던 가수 BEST10 <가요톱10>, <젊음의 행진> 출연 횟수가 최고 인기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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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아이돌이 등장하기 전, 80년대 가요계는 조용필, 민해경, 김범룡, 주현미, 이지연 등 솔로가수들이 정상을 차지했다. 1981년에 첫 방송된 <가요톱10>은 당시 가요 동향을 파악하는 척도였다. 방송사가 정한 집계에 따라 1위가 결정됐으며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 ‘골든컵’을 수여했다. 정규앨범 내에서 골든컵을 2회 이상 수상한 가수는 조용필, 박남정 단 두 명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는 가운데 한국프로야구가 출범되고

출판, 대중음악,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가 양적으로 팽창하던 그 시절.

부동산 투기 열풍과 본격적 강남 개발로 사회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사회 모든 분야갸 격하게 요동치던 시대였습니다.

<채널예스>는 1990년대를 탐험하는 기획을 거쳐 이제는 1980년대를 호출해봅니다.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이제는 마음껏 누려볼 수 있을까요?


2010년대 대한민국 음악계는 아이돌이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80년대에는 과연 아이돌과 같은 존재가 있었을까. 80년대 후반 소방차가 댄스그룹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면, 8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10대, 2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그룹은 송골매다. 80년대 대학생들은 솔로보다 밴드 음악을 즐겨 들었다. 대학교에서는 그룹사운드를 만드는 것이 유행해 81년에는 전국적으로 60여 개의 대학생 그룹사운드가 활동했다. 대학생 그룹으로 출발해 가요계에 굳건한 위치를 차지한 최초의 그룹사운드는 77년도에 데뷔한 ‘산울림’이었고 80년대를 대표하는 그룹은 단연 송골매였다.



80년대 록 밴드 '시나위' vs 2010년대 힙합그룹 '빅뱅'


80년대 중반 대한민국 록을 이끈 ‘시나위’

80년대 중반에는 록 밴드 시나위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한민국 헤비메탈, 얼터너티브록 밴드의 역사를 이어나갔다. 83년, 서울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신대철(기타)을 중심으로 결성된 시나위는 교내 밴드로 학교 축제 등의 무대에 서다 오디션을 통해 보컬 김종서를 영입 후, 레드제필린의 곡을 위주로 창작곡을 발표했다. 아버지 신중현의 아들로서가 아닌 정통 록 기타리스트로 인정 받길 원했던 신대철은 85년 이태원 록월드 무대에 시나위를 세웠고, 이후 보컬이 임재범으로 바뀌면서 86년에 1집 앨범 <Heavy Metal Sinawe>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80년대는 밴드 음악이 열악했던 시기, TV 방송 출연 규제도 심했고 앨범의 수익 분배도 정립되지 않은 터라 오로지 콘서트 수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집 앨범이 예상과는 달리 상업적으로 성공을 이루면서 평론가들로부터 가요계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임재범이 군대에 가게 되면서 다시 김종서가 보컬을 맡게 됐고, 김민기, 강기영이 각각 드럼, 베이스를 맡으며 2집 <Down And Up>을 발매, 시나위의 전성시대를 이끈다.

86년 데뷔한 부활과 함께 대한민국 록을 이끈 시나위는 멤버들의 탈퇴, 교체, 잠적 등으로 순탄치 않은 음악 생활을 이어가지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발라드, 트로트, 댄스가 중심을 이루는 대한민국 가요계에 록 장르를 주류로 편입시켰다. 당시 시나위는 일본 진출도 제안 받았지만 군미필자는 해외 활동이 제한되던 시기라 무산됐다. 시나위는 90년, 서태지가 베이시스트로 참여한 4집 <1990>을 발매하며 사회적 병폐나 부조리 등 대한민국 사회를 반영한 곡들을 주로 발표했다. 지금의 록 밴드들은 80년대 시나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록 역사가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80년대 가요 역사는 <가요톱10>과 함께

81년도에 첫 방송된 KBS <가요톱10>는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가요계의 흐름을 진단했다. 순위 집계의 중요한 척도는 시청자들이 보내는 인기투표 엽서였다. KBS는 전국 1천 3백여 명의 투표인단에게 엽서를 보내 그 회신을 집계했고, MBC는 인기투표 엽서 결과를 60% 반영해 순위를 선정했다. 대부분 청소년 팬들의 참여 비율이 높아 랭킹이 다소 청소년 위주로 편향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방송사 측은 ‘앨범 판매 실적으로 순위를 매길 경우, 조작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80년대 <가요톱10>에서 1년에 두 곡의 골든컵을 수상한 가수는 84년 조용필(친구여, 정의 마음), 윤수일밴드(아파트, 아름다워), 85년 조용필(어제 오늘 그리고, 그대여), 89년 박남정(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등이다. <가요톱10>은 89년에 ‘80년대 인기가요 10곡’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조용필(창밖의 여자), 이은하(아리송해), 이용(잊혀진 계절), 김수희(멍에), 설운도(잃어버린 30년), 해바리기(모두가 사랑이에요), 이선희(J에게), 김수철(못다 핀 꽃 한송이), 최진희(사랑의 미로), 나미(빙글빙글), 주현미(비 내리는 영동교), 이광조(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남이(울고 싶어라), 코리아나(손에 손잡고) 등이 순위권에 올랐다. 73년부터 94년까지 20여 년 동안 방송된 쇼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도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즐겨 출연했던 프로그램이다. 송승환, 왕영은, 최수종, 하희라 등 청춘 남녀 스타들이 MC를 맡았고 소방차, 이지연, 김완선, 박남정 등이 출연해 특집 무대를 꾸몄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으로는 이종환의 <디스크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이수만의 <젊음의 음악캠프>,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이택림의 <가요중계실>, 임국희의 등이 인기가 높았다.


조용필, 80년대 최고인기가수상 6회 수상

80년대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과 함께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이 가수들의 인기를 증명하는 지표였다. 80년 ‘MBC 10대 가수’로는 송창식, 윤수일, 전영록, 조용필, 최헌, 박경애, 윤시내, 이은하, 현숙, 혜은이가 이름을 올렸다. 당시 방송사는 10대가수선정위원회를 발족하고 엽서 투표와 설문조사 80%, 가요계에 끼친 공헌도 20%를 기준으로 10대가수를 발표했다. 신인가수의 경우 엽서 설문 50%와 장래성 50%를 비중으로 두어 선정했다. 80,81년 MBC 최고인기가수상은 조용필이 차지했고 82년에는 ‘잊혀진 계절’로 이용이 영예를 안았다. 그 후 83년부터 86년까지 조용필이 4년 연속 수상하며 기록을 세웠고 주현미가 88, 89년 최고인기가수상을 수상하며 그 뒤를 이었다.


밤무대 최고의 대우를 받은 가수는?

80년대까지는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 소위 밤무대에서 가수들의 공연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었기 때문에 TV, 라디오 출연 횟수와는 별개인 인기 순위가 있었다. 80년대 후반 밤무대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은 가수는 나훈아. 그는 월 3천만 원대의 출연료를 받으며 지방업소에서는 하루 공연에 3백만 원대의 출연료를 받았다. 이미자와 조용필은 월 평균 1천5백만 원대의 수익을 거뒀으며 주현미, 민해경, 전영록, 구창모, 조영남 등도 2백~3백만 원대의 출연료를 받았다. 지방업소에 출연할 경우 1회 출연료가 서울의 7회 출연료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서울에서 한 달에 5백 만원을 받는 가수라면 지방의 경우에는 하루에 1백20만 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았다. 한편 업소에서는 고액의 출연료를 주고 계약한 가수들이 단기간에 많이 출연하는 것보다 장기간에 걸쳐 무대에 오르는 것을 선호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홍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인기 있었던 가수 BEST10

   조용필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불리는 조용필의 전성기는 80년대였다. 1968년 그룹 ‘애트킨즈’ 멤버로 데뷔해 ‘그룹 25’, ‘조용필과 그림자’를 거쳐 75년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며 큰 인기를 누린 조용필은 1980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인 ‘창밖의 여자’를 선보여 단숨에 스타가 됐다.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했고 80년부터 86년까지 각 방송사의 최고 인기가수상을 모두 휩쓸며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못찾겠다 꾀꼬리’는 82년 9월부터 11월까지 무려 10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골든컵’ 제도가 생겨났고 5주 이상 1위를 하면 순위 집계 대상에서 제외됐다. 86년에는 수준 높은 음악성을 추구하기 위해 당시 가수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야간업소 행사를 뛰지 않기로 했고 87년에는 가요의 다양화를 위해 가요제 후보 대상에서 하차했다. 88올림픽 노래 ‘서울 서울 서울’은 영어, 일어, 중국어 등으로도 소개됐으며 89년에는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신곡을 취입했다.


   전영록

70년대 영화배우로 데뷔했지만 80년대에는 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79년 3집 앨범에서 ‘누군가’를 발표한 후 가수 활동을 포기할 뻔했지만 82년 ‘지나간 시절의 연가’로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83년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84년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가 연속으로 히트했다. 라디오 <전영록 음악실>, <젊음의 음악캠프> 등을 7년동안 진행해온 전영록은 84년도에 DJ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음악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 85년도 배우 이미영과 결혼할 때는 전국이 떠들썩했고 명동에 1,000석 규모의 통기타 레스토랑 ‘영스타’를 개업하기도 한다. 87년도에는 10집 앨범 ‘하얀 밤에’, ‘이제 자야 하나 봐’를 발표했고 자신의 5인조 그룹사운드의 이름을 공모하기도 했다. 89년에는 TV 출연을 자제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후 양수경, 이은하, 김지애, 이지연 등에게 곡을 써줬다.



   이선희

84년, 제5회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폭발적인 가창력과 소년 같은 헤어 스타일과 바지만 고수하는 옷차림으로 ‘언니부대’를 만들었다. 84년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하며 신인상, 최고 인기가요상, 10대 가수상으로 최초 3관왕에 오르는 등 큰 인기를 모았다. 85년 첫 앨범 <아 옛날이여>가 발매되자마자 7곡이 <가요톱10> 순위에 진입했고 86년에는 ‘알고 싶어요’가 5주 연속 1위를 하며 골든컵을 두 번째로 차지하고 한 달 방송 횟수 107회, MBC 라디오 음악차트에서 15주 1위 기록을 만들어냈다. 89년 5집 <한바탕 웃음으로>에서는 ‘나의 거리’가 5주 연속 1위로 4번째 골든컵을 수상하고 ‘한바탕 웃음으로’가 1990년에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1989년, 1990년 한 앨범으로 2년 연속 골든디스크상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89년에는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영어 음반을 제작해 해외 팝 시장에 진출했다.


   주현미

81년 강변가요제로 데뷔한 주현미는 중학교 2학년 때 기념음반 <고향의 품에>를 취입했으며 대학생 시절 약대 음악그룹 ‘진생라딕스’의 보컬로 <강변가요제>에 출전해 입상했다. 84년 약대를 졸업한 주현미는 약사로 활동하던 당시 작곡가 정종택의 권유로 김준규와 함께 메들리 음반 쌍쌍파티를 취입하고 쌍쌍파티의 히트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를 계기로 1985년에 정규 음반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가수에 데뷔를 하며 국내 최초 약사 가수로 화제가 됐다. 첫 음반의 타이틀곡 ‘비 내리는 영동교’가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신인상을 수여, 86년, ‘눈물의 부르스’ 1988년, ’신사동 그 사람’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주현미는 10대 가수상과 최우수 가수상을 차지하며 김연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80년대에 주현미는 김수희, 심수봉과 함께 당시 여성 트로트계 빅3로 불리면서 그녀들과 함께 무대와 공연을 펼쳤으며 여러 음반을 제작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최성수

83년도 ‘그대는 모르시더이다’로 데뷔한 최성수는 ‘풀잎 사랑’, ‘동행’, ‘남남’, ‘기쁜 우리 사랑은’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자신의 곡을 대부분 직접 작곡해 싱어송라이터로 인정 받았으며, 발라드,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며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최성수는 고등학교 2학년생 교회 성가대의 일원으로 정박아 위문공연에 참여했다가 아이들이 노래로 위로를 받는 것을 보고 가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통기타 가수로 가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89년에는 미국 디스코매직 레코드사와 로열티 계약을 맺고 영어로 노래를 취입해 미국과 유럽에 진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완선

17세가 되던 86년, 1집 <오늘밤>으로 데뷔. 파격적인 댄스와 매혹적인 관능미로 남성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대한민국의 마돈나로 불렸다. 86년 KBS 가요대상 신인상을 시작으로 1987년부터 91년까지 5회 연속 올해의 가수상을 수상했다. 본격적인 댄스뮤직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 받는 김완선은 대중 음악계에 아이돌 가수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으며, 데뷔 초 브레이크 댄스, 허슬, 로보트 춤 등 여러 장르의 춤을 선보이며 “노래와 춤의 균형 있는 나름대로 예술세계를 개척하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국제무대에도 진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85년에는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일원으로 무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지연

학교에서 보컬그룹 ‘재뉴어리’의 싱어를 하다가 87년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로 가요계에 데뷔, 청순한 외모로 남성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데뷔 당시 유현상과 작업을 하면서 김완선, 안혜지, 문희옥 등과 함께 여고생 가수 겸 80년대 하이틴 가수로 떠올랐다. 김완선과 라이벌이라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88년에 발표한 ‘난 아직 사랑을 몰라’는 2004년 영화 <어린 신부> OST에 실려 문근영이 리메이크해 현재 세대에 많이 알려졌고, 89년에 발매한 2집 앨범에 실린 ‘바람아 멈추어다오’는 후에 장나라, 김혜수, 러브홀릭에 의해 다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이지연은 이 때를 정점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는 하이틴 스타로 발돋움했다.





   소방차

1987년 1집 <어젯밤 이야기>로 데뷔, 소녀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룹. 정원관, 이상원, 김태형은 고교 시절 체육관에서 만난 인연으로 83년 KBS무용팀 짝꿍 멤버로 활동한 바 있다. 소방차라는 그룹명은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한강 다리에서 질주하는 소방차를 보고 따왔다. 데뷔 초, “일정한 틀 없이 무정형의 파격성을 띠는 무대 매너를 선보이고 있다”고 평가 받았으며 비디오형 가수로 각광 받았다. 특히 ‘텀블링 율동’은 소방차의 개성을 살리며 10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젯밤 이야기’가 히트를 친 후 이듬해 2집 <일급비밀>을 발표했고, 이상원 대신 새 멤버 도건우를 영입한 후 3집 <사랑하고 싶어>를 발매해 89년 후반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김범룡

1982년 연포가요제에서 보컬 듀오 빈 수레의 보컬리스트로 참가하여 자작곡 ‘인연’으로 우수상을 수상하여 첫 데뷔하였고 그 후 1985년 개인 음반 1집에 수록된 자작곡 ‘바람 바람 바람’으로 솔로 가수 데뷔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5년에 KBS 신인가수상, 1986년에는 MBC와 KBS에서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독특한 음색과 감성으로 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상은

88년도의 샛별이라고 불렸던 가수 이상은은 ‘담다디’ 한 곡으로 80년대 후반을 평정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 이상은은 <강변가요제> 대상을 탄 후, 하루 평균 3백 여 통의 팬레터와 극성팬들의 전화 때문에 데뷔한 지 한 달도 못돼 이사를 해야만 했다. 패션모자에 뭉툭한 구두, 껑충한 바지 차림으로 무대를 휘저은 이상은은 10대 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76cm의 큰 키 때문에 가요계의 최장신 여자 가수로 불렸으며, ‘담다디’는 뮤지컬영화로 개봉되기도 했다. 이상은은 90년 2집 <사랑할거야>로 또 한번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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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엄지혜


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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