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빅뱅이 있다면, 80년대 문화혁명은 ‘시나위’
90년대 아이돌이 등장하기 전, 80년대 가요계는 조용필, 민해경, 김범룡, 주현미, 이지연 등 솔로가수들이 정상을 차지했다. 1981년에 첫 방송된 <가요톱10>은 당시 가요 동향을 파악하는 척도였다. 방송사가 정한 집계에 따라 1위가 결정됐으며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 ‘골든컵’을 수여했다. 정규앨범 내에서 골든컵을 2회 이상 수상한 가수는 조용필, 박남정 단 두 명이었다.
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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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는 가운데 한국프로야구가 출범되고 출판, 대중음악,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가 양적으로 팽창하던 그 시절. 부동산 투기 열풍과 본격적 강남 개발로 사회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사회 모든 분야갸 격하게 요동치던 시대였습니다. <채널예스>는 1990년대를 탐험하는 기획을 거쳐 이제는 1980년대를 호출해봅니다.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이제는 마음껏 누려볼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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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대한민국 음악계는 아이돌이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80년대에는 과연 아이돌과 같은 존재가 있었을까. 80년대 후반 소방차가 댄스그룹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면, 8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10대, 2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그룹은 송골매다. 80년대 대학생들은 솔로보다 밴드 음악을 즐겨 들었다. 대학교에서는 그룹사운드를 만드는 것이 유행해 81년에는 전국적으로 60여 개의 대학생 그룹사운드가 활동했다. 대학생 그룹으로 출발해 가요계에 굳건한 위치를 차지한 최초의 그룹사운드는 77년도에 데뷔한 ‘산울림’이었고 80년대를 대표하는 그룹은 단연 송골매였다.
80년대 록 밴드 '시나위' vs 2010년대 힙합그룹 '빅뱅'
80년대 중반 대한민국 록을 이끈 ‘시나위’
80년대 중반에는 록 밴드 시나위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한민국 헤비메탈, 얼터너티브록 밴드의 역사를 이어나갔다. 83년, 서울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신대철(기타)을 중심으로 결성된 시나위는 교내 밴드로 학교 축제 등의 무대에 서다 오디션을 통해 보컬 김종서를 영입 후, 레드제필린의 곡을 위주로 창작곡을 발표했다. 아버지 신중현의 아들로서가 아닌 정통 록 기타리스트로 인정 받길 원했던 신대철은 85년 이태원 록월드 무대에 시나위를 세웠고, 이후 보컬이 임재범으로 바뀌면서 86년에 1집 앨범
86년 데뷔한 부활과 함께 대한민국 록을 이끈 시나위는 멤버들의 탈퇴, 교체, 잠적 등으로 순탄치 않은 음악 생활을 이어가지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발라드, 트로트, 댄스가 중심을 이루는 대한민국 가요계에 록 장르를 주류로 편입시켰다. 당시 시나위는 일본 진출도 제안 받았지만 군미필자는 해외 활동이 제한되던 시기라 무산됐다. 시나위는 90년, 서태지가 베이시스트로 참여한 4집 <1990>을 발매하며 사회적 병폐나 부조리 등 대한민국 사회를 반영한 곡들을 주로 발표했다. 지금의 록 밴드들은 80년대 시나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록 역사가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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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도에 첫 방송된 KBS <가요톱10>는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가요계의 흐름을 진단했다. 순위 집계의 중요한 척도는 시청자들이 보내는 인기투표 엽서였다. KBS는 전국 1천 3백여 명의 투표인단에게 엽서를 보내 그 회신을 집계했고, MBC는 인기투표 엽서 결과를 60% 반영해 순위를 선정했다. 대부분 청소년 팬들의 참여 비율이 높아 랭킹이 다소 청소년 위주로 편향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방송사 측은 ‘앨범 판매 실적으로 순위를 매길 경우, 조작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80년대 <가요톱10>에서 1년에 두 곡의 골든컵을 수상한 가수는 84년 조용필(친구여, 정의 마음), 윤수일밴드(아파트, 아름다워), 85년 조용필(어제 오늘 그리고, 그대여), 89년 박남정(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등이다. <가요톱10>은 89년에 ‘80년대 인기가요 10곡’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조용필(창밖의 여자), 이은하(아리송해), 이용(잊혀진 계절), 김수희(멍에), 설운도(잃어버린 30년), 해바리기(모두가 사랑이에요), 이선희(J에게), 김수철(못다 핀 꽃 한송이), 최진희(사랑의 미로), 나미(빙글빙글), 주현미(비 내리는 영동교), 이광조(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남이(울고 싶어라), 코리아나(손에 손잡고) 등이 순위권에 올랐다. 73년부터 94년까지 20여 년 동안 방송된 쇼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도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즐겨 출연했던 프로그램이다. 송승환, 왕영은, 최수종, 하희라 등 청춘 남녀 스타들이 MC를 맡았고 소방차, 이지연, 김완선, 박남정 등이 출연해 특집 무대를 꾸몄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으로는 이종환의 <디스크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이수만의 <젊음의 음악캠프>,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이택림의 <가요중계실>, 임국희의
조용필, 80년대 최고인기가수상 6회 수상
80년대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과 함께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이 가수들의 인기를 증명하는 지표였다. 80년 ‘MBC 10대 가수’로는 송창식, 윤수일, 전영록, 조용필, 최헌, 박경애, 윤시내, 이은하, 현숙, 혜은이가 이름을 올렸다. 당시 방송사는 10대가수선정위원회를 발족하고 엽서 투표와 설문조사 80%, 가요계에 끼친 공헌도 20%를 기준으로 10대가수를 발표했다. 신인가수의 경우 엽서 설문 50%와 장래성 50%를 비중으로 두어 선정했다. 80,81년 MBC 최고인기가수상은 조용필이 차지했고 82년에는 ‘잊혀진 계절’로 이용이 영예를 안았다. 그 후 83년부터 86년까지 조용필이 4년 연속 수상하며 기록을 세웠고 주현미가 88, 89년 최고인기가수상을 수상하며 그 뒤를 이었다.
밤무대 최고의 대우를 받은 가수는?
80년대까지는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 소위 밤무대에서 가수들의 공연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었기 때문에 TV, 라디오 출연 횟수와는 별개인 인기 순위가 있었다. 80년대 후반 밤무대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은 가수는 나훈아. 그는 월 3천만 원대의 출연료를 받으며 지방업소에서는 하루 공연에 3백만 원대의 출연료를 받았다. 이미자와 조용필은 월 평균 1천5백만 원대의 수익을 거뒀으며 주현미, 민해경, 전영록, 구창모, 조영남 등도 2백~3백만 원대의 출연료를 받았다. 지방업소에 출연할 경우 1회 출연료가 서울의 7회 출연료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서울에서 한 달에 5백 만원을 받는 가수라면 지방의 경우에는 하루에 1백20만 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았다. 한편 업소에서는 고액의 출연료를 주고 계약한 가수들이 단기간에 많이 출연하는 것보다 장기간에 걸쳐 무대에 오르는 것을 선호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홍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인기 있었던 가수 BEST10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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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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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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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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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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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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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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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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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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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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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개의 댓글
필자
엄지혜
eumji01@naver.com
미미의괴담
2013.08.30
즌이
2013.05.30
did826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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