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된 영혼> 2권을 훔쳐간 여대생 하숙집 도둑의 정체는?
책도둑? 『매혹된 영혼』은 누가 가져갔을까?
로맹 롤랑은 20세기 프랑스의 중요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프랑스 최초의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로 19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매혹된 영혼』은 집필 기간만 12년으로 알려진 그의 또 다른 대작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고결한 영혼을 지닌 여성 앙네트 리비에르이다. 그녀는 세계대전 전후 격동의 세상을 온몸으로 통과하면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한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이상의 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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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책-내가 읽은 책=0
1990년대 초반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후반에는 대학생이었다. 같은 10년 세월이라 해도 90년대는 내게 80년대나 2000년대에 비해 훨씬 길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아마 그 안에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는 내가 인생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중학생 때 학교가 파하면 동네 서점으로 직행하여 책을 사고, 그것을 다 읽으면 책날개에 실린 신간 소개문을 통해 다음에 살 책을 정하고, 서점을 들락거리며 그것이 출간되기를 고대하던 시간들을 나는 기억한다. 고등학생 때 대하소설에 매료되어 저녁을 굶어가며 모은 돈으로 그것을 한 권씩 한 권씩 사서는 마침내 책장에 전질이 꽂힌 것을 보며 흐뭇해하던 날들도 기억한다. 내 방 한쪽에 세워져 있던 초록색 싸구려 플라스틱 책장, 책 내용은 잊었어도 거기 어떤 책들이 어떤 순서로 꽂혀 있었는지는 기억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와 알렉산드라 리플리의 『스칼렛』과 신이현의 『숨어 있기 좋은 방』과 이문열의 『영웅시대』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와 이외수의 『벽오금학도』와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과 홍명희의 『임꺽정』과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황석영의 『장길산』과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와 앤 타일러의 『종이 시계』…… 모두 내가 고르고 내 용돈을 아껴 샀던 책이었다.
아마도 방정식 ‘내가 갖고 있는 책-내가 읽은 책=0’이 성립한 시기는 그때가 마지막일 것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책을 소유하고 있지만 미처 읽지 못한 책이 태반이다. 남에게 받은 책이야 그렇다 치고, 내가 읽고 싶어서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다. 더더욱 어처구니없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방정식의 답은 커져만 간다. 내가 그만큼 책 읽기를 게을리 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책 읽는 속도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출간되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내 독서의 역사와 책 구매의 역사가 일치한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시켜주던 초록색 책장. 1995년에 나는 그것과 헤어졌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조립식 책상 하나 놓고 그 옆에 이불만 깔아도 발 디딜 공간이 없는 좁은 하숙방에 책장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다. 하여 대학 입학식 전날 나는 서울로 가져갈 책을 공들여 골랐다. 간택된 책들은 대략 열 권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로맹 롤랑의 『매혹된 영혼』이었다.
『매혹된 영혼』에 매혹된 나의 영혼
로맹 롤랑은 20세기 프랑스의 중요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프랑스 최초의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로 19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매혹된 영혼』은 집필 기간만 12년으로 알려진 그의 또 다른 대작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고결한 영혼을 지닌 여성 앙네트 리비에르이다. 그녀는 세계대전 전후 격동의 세상을 온몸으로 통과하면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한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이상의 끝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앙네트라는 여성의 일대기이자 파시즘이 횡행하던 전후 시대의 역사적 기록이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 앞 서점에서 나는 이 책을 샀다. 세 권으로 분책된데다 각 권당 600페이지 가까운 어마어마한 분량 탓에 그해 겨울은 이 책으로 시작해서 이 책으로 끝났다. 아니, 가끔은 그 겨울이 여태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도 내 책장에 세 권 나란히 꽂힌 『매혹된 영혼』을 볼 때마다 불현듯 20년 세월을 거슬러 책의 첫 장을 펼치던 그 겨울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책이 있는 한 나는 영원히 열일곱 살 여고생일 것이다. 완독의 과정은 지난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뜨겁고 묵직하고 순정한 감동에 홀려, 한참 동안이나 책을 껴안은 채 흐느껴 울던. 그때 나는 이미 『매혹된 영혼』에 ‘매혹된 영혼’이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독서취향
하지만 그리 특별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이 작품을 다시 읽은 기억은 없다. 고등학교 때 읽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겨우 한 번 읽었으면서, 등장인물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런데도 이 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필시 오래전에 겪은 어느 별난 사건 때문일 것이다.
1995년에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고향집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헐값에 입주했던 학교 앞 하숙집. 그곳에는 방이 모두 네 개 있었다. 나는 일곱 하숙생 중 유일하게 독방을 썼는데, 원래 주방이었던 것을 개조했다는 내 방의 문에만 잠금장치가 없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가. 게다가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 땅 아니던가. 나는 문에 자물쇠를 달아달라고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드렸다.
“학생, 지금 나 밥장사 한다고 무시하는 거야?”
아주머니는 대뜸 언성을 높였다.
“내가 하숙을 10년째 치는데, 이 집에선 여태까지 연필 한 자루 없어진 적이 없어! 지금 우리 집 하숙생들을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거야?”
나는 그녀의 서슬에 눌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문도 잠그지 못하는 방에서 잠을 자고 리포트를 쓰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주머니가 호언한 대로 연필은 한 자루도 없어지지 않았다. 없어진 것은 다른 것들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와 보니 책장 한쪽이 어딘가 휑했다. 어라? 즐겨 보던 만화책 한 권이 보이지 않았다. 발도 없는 책이 저 스스로 도망갔을 리는 없는데. 내가 뭔가 착각했겠지 하고 잊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며칠 후 그 책은 외박하고 돌아와 시치미를 떼는 애인처럼 다소곳이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나는 소스라쳤다. 그래도 그 일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책도 무사히 돌아왔고, 무엇보다 평화로운 하숙집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옆방 하숙생들은 다들 선량하고 다정한 선배들이었다. 남의 방에 함부로 잠입할 것 같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그들의 친구들이 수시로 하숙집을 드나들었으나 그렇다고 그 친구들을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그것이 시작이었다. 며칠 간격으로 책들은 줄줄이 사라졌고 줄줄이 돌아왔다. 나는 말썽쟁이 자식들을 거느린 어미의 심정으로 책들의 가출과 귀가를 지켜보았다. 누군가 내 방에 몰래 드나든다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로지 책만 빌려갔다 가져오는 정도라면 용납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중에는 그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독서 취향에 흥미마저 갖게 되었다. 하여 내가 좋아하는 책이 사라졌을 때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형편없다 여기는 책이 사라졌을 때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서점에서 내가 읽을 책을 살 때에도 그 손님이 이 책을 좋아할지 어떨지를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이번에 가져간 책은 꼭 돌려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매혹된 영혼』이 사라졌다. 그간의 반복 학습으로 어떤 책이 사라지든 초연하게 굴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사라진 책이 가운데 2권이었기 때문이다. 희한한 일이 아닌가. 이유가 뭐지? 왜 하필 2권이지? 혹시 1권을 읽었다는 이야기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문득 그의 독후감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매혹된 영혼』을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사흘이 지났다. 조바심이 났다. 뜬금없이 나는 수중에 책이 있었을 때는 펼쳐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2권의 첫 문단이 어떤 문장으로 시작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흘렀다. 학교 도서관에 갔다.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광화문 대형 서점에 갔다. 그리고 『매혹된 영혼』이 초판을 끝으로 절판되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이제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책이 된 것이었다. 열흘이 지났다. 전에는 사나흘이면 사라진 책이 돌아왔던 것 같은데.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를 어쩐다? 마냥 손 놓고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제 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그간의 상황을 털어놓을 수도 없고.
고심 끝에 결정했다. 일기장을 펼쳤다. 남의 책을 그렇게 유유히 가져갈 수 있다면 남의 일기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세세한 표현까지 떠올릴 수는 없지만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으리라. ‘최근에 당신이 가져간 『매혹된 영혼』은 제가 매우 아끼는 책입니다. 절판되어서 다시 구할 수도 없어요. 예전부터 당신이 제 책들을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가 돌려놓곤 했다는 것을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번에 가져간 책은 꼭 돌려주세요. 부탁입니다.’ 그리고 일기장을 사라진 2권 대신 1권과 3권 사이에 끼워놓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학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여니 책꽂이에 문제의 2권이 돌아와 있는 것이 보였다. 숨이 멎는 듯했다. 나는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책꽂이 앞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기다렸던 책이 아니라 그 옆의 일기장부터 펼쳤다. 아, 이럴 수가. 없었다. 편지를 쓴 페이지가 찢겨 나가고 없었다. 그가 뜯어간 것이리라. 저 읽으라고 쓴 편지니까 제가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답장은 없었다. 하긴 어떤 멍청한 도둑이 사건 현장에 제 필적을 남기겠는가. 책에라도 표식을 남기지 않았을까 살펴보았지만 허사였다.
‘무수한 사람이 죽어간 교육계에서도 여성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두 개의 학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앙네트는 중부 지방 어느 도시의 남자 중학교 교사로 임명되었다…….’ |
‘여기서는 주제라든가 이론 같은 것을 찾지 말기를. 여기서는 오로지 진지하고도 오랜, 기쁨에서나 괴로움에서나 풍성하며, 모순 역시 없지 않아 있는, 과오도 많으며, 비록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없을 망정 우리의 궁극의 진실인 ‘조화’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는 한 삶의 내면의 역사를 보아주기를.’ |
『매혹된 영혼』에 매혹된 소녀, 김미월 작가님은…
웅숭깊고 따스한 시선으로 청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젊은 작가.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정원에 길을 묻다」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와 장편소설 『여덟 번째 방』등이 있다. 지난 해 출간한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으로 채널예스 독자와 만난 바 있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김미월 작가야말로, 만나보면 소설 만큼이나 따뜻하고, 그녀의 문장만큼이나 매력적인 사람이다. 최근 2012 문지문학상, 2012 젊은작가상 등을 잇달아 수상하는 등 독자와 평론가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기대주. 90년대를 되돌아 봤을 때, 떠오르는 한 권에 책에 관한 인상깊은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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