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가 없어도 갈 수 있는 천국, 뉴칼레도니아
뉴칼레도니아는 2009년에 처음 갔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갔는데 그때만 해도 뉴칼레도니아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충격이었다. 뉴칼레도니아는 날개가 없어도 갈 수 있는 천국이었다.
201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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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더 천국 같은
이상하게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듯 여행도 그렇다. 사람 사이에만 인연이 있는 게 아니다. 사람과 장소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 완주가 그랬고 뉴칼레도니아가 그랬다.
뉴칼레도니아는 2009년에 처음 갔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갔는데 그때만 해도 뉴칼레도니아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충격이었다. 뉴칼레도니아는 날개가 없어도 갈 수 있는 천국이었다. 그 천국에서 같이 갔던 관광청 직원과도 친구가 되었다. 올해 또다시 엿새간 뉴칼레도니아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관광청에 근무하는 실장이 꼼꼼하게 여행 계획을 짜주었다. 거짓말 하나 섞이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 호탕한 목소리로 지도에 큼지막하게 동그라미까지 쳐가며 여행 일정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뉴칼레도니아 국내 항공사가 파업 중이라 미리 세운 계획이 쓸모없게 될 수도 있었다.
이번 여행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꽃보다 밥장이 되어 누메아 해변 도로를 자전거로 돌아볼지, 멋진 석양을 바라보면서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릴지, 호텔 수영장에 누워 넘버원 맥주나 마시며 그림을 그릴지. 일단 떠나봐야 알 수 있었다.
밤하늘에는 남십자성이 반짝거리고
르메르디앙 호텔에 도착해서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돌렸다. 8월의 뉴칼레도니아는 겨울이었다. 그저 밤에 긴팔을 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눈사람이나 제설 차량이 있는 건 아니었다.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닦으니 옅은 바다 냄새가 났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선풍기 날개는 느긋하지만 정확하게 돌았다. 어디를 가볼까. 앙스바타 해변을 따라가다 시트롱 해변을 거쳐 누메아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앙스바타와 시트롱 해변 사이에 있는 수족관에 들렀다. 수족관은 아담했지만 깜짝 놀랄 만한 물고기와 산호들이 반짝거렸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걸으면 마치 잠수복을 입고 스쿠버를 하는 것처럼 이내 서늘해졌다. 화이트 노이즈처럼 프랑스어가 떠다녔다. 양탄자가 깔린 계단에 앉아 커다란 유리벽 너머로 물고기들이 뻐금거리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수족관에서 나와 시트롱 해변으로 향하려다 돌아오는 길을 위해 남겨두었다. 조금 더 걸으니 ‘고아들의 만’에 다다랐다. 이름에서 풍기는 애처로운 분위기와 달리 한눈에 봐도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지하 주차장처럼 집에서 내려와 바로 요트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고, 바다를 향한 베란다에서는 메이드가 빨래를 널거나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가볍게 미소를 띠었다. 뉴칼레도니아에선 길을 걷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호흡을 하듯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몸이 스칠까 봐 살짝 비켜주기만 해도 “메르시Merci, 고맙습니다”가 자동으로 나왔다. 뭐가 그리 고마운지 늘 고마운 사람들뿐이었다. 하기야 반짝이는 햇살만 봐도 고마웠다. 비린내 없는 깨끗한 바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누메아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면 메인 요리인 프랑스식 오리구이를 놔둔 채 바게트로 배를 채우는 것과 다름없다. 시내보다 시내까지 가는 길이 진짜였다. 시내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베이커리에 들러 마카롱을 몇 개 사고 시장에서 베트남식 국수 요리를 먹었다.
누메아까지 걸어오면서 카메라를 든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예쁜 곳이 적을수록 예쁘게 찍는 게 기술이 된다. 좋은 렌즈와 디지털카메라는 평범한 곳을 마법처럼 빛나게 도와준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수평, 수직만 맞춰 아무 데나 찍어도 그대로 달력 사진이 되었다. 그래서 카메라가 필요 없는 게 아닐까. 천국에서는 마법의 렌즈나 포토샵이 필요 없는 법이다. 완벽한 세계니까 보이는 대로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서울살이에 지치고 주말이면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인 나는 게걸스럽게 셔터를 눌러댔다.
보드카처럼 맑은 바다, 우연한 만남
걸어서 이십 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크기, 에어컨 광고에서 흔히 보는 하얀 바닷가, 까무잡잡한 직원들이 익숙하게 차려주는 점심 뷔페. 아메데는 괌에서 코코섬으로 놀러 갔을 때와 비슷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이곳만큼 많은 관광객을 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바다는 보드카처럼 맑았다. 아메데 섬에서 배병우 사진작가를 만났다. 뉴칼레도니아 바다를 찍기 위해 왔다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여기 바다가 두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다. 10월에 뉴칼레도니아 바다를 주제로 전시를 한단다. 그는 화면에서 본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나이 든 어르신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난 체, 했던 말 또 하기, 왕년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알게 된 사실. 유도 선수 출신에 허영만 작가처럼 여수가 고향,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 중. 내 그림이 피터 막스와 닮았다고 짚어주며 앞으로는 시사적인 이야기나 정치적인 메시지도 그림에 담아보라고 조언해주었다.
아메데 등대에 올랐다. 나폴레옹 3세 때 지은 오래된 등대로 묵직한 철제 빔과 꼼꼼하게 박힌 볼트에는 하얀 페인트를 두껍게 덧칠했다. 행여 미끄러질까 봐 반질반질한 나선형 나무 계단을 또박또박 올랐다. 꼭대기에 오르니 철문이 밀릴 만큼 바람이 거셌다. 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커다란 바다 괴물의 등이었다는 이야기, 바다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등대 꼭대기의 난간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니 왜 그런 상상을 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섬은 마치 개울에 반쯤 잠긴 조약돌처럼 튀어나와 보였다. 물 아래 잠긴 거대한 산호초가 저 멀리 수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섬이 산호 괴물의 등껍질이라면 하얀 모래는 괴물의 각질인가.
아메데 섬까지 데려다 준 배는 부지런해서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다. 손님들을 데려다 주고서 점심 먹기 전에 다시 태웠다. 식욕을 돋워주려는지 상어가 사는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승무원은 바다에 바게트 조각을 던졌다. 깨끗한 물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올라왔다. 상어였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처럼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다시 섬으로 돌아와 승무원이 준비한 뷔페를 먹었다. 한쪽에서는 고기를 굽고 또 한쪽에서는 과일을 나눠주었다. 승무원이 정해준 동선을 따라 순서대로 챙겨 먹었다. 바게트를 던져주던 승무원은 어느새 배가 훤히 드러나는 원주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림, 내가 남기는 흔적
‘친구를 만들려면 먼저 들이대라.’ 이 방법은 뉴칼레도니아에서도 통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시원시원한 뉴칼레도니아 관광청 실장에게 먼저 물었다. 실장은 황당할 수도 있는 부탁을 끝까지 들어주며 르메르디앙 호텔 매니저와 진지하게 상의를 했다. 알고 보니 르메르디앙 누메아 호텔에서는 오래전부터 아티스트들이 모임을 하고 있었다. 뉴칼레도니아에 사는 아티스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데 운 좋게 여행 기간과 모임 날짜가 딱 맞았다. 관광청 실장과 호텔 매니저가 힘써주어서 그 달 아티스트 모임에 호스트로 초대되었다.
호텔 로비에는 며칠 전부터 행사가 있다는 푯말이 세워졌다. ‘Chang SukWon’이란 여권용 이름 위에 빨간 털모자를 쓰고 꿈붕어를 그리고 있는 내 사진이 붙어 있었다. 로비를 지나가다 내 뒷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일이 너무 커진 게 아닌가 싶었다.
아티스트 모임이라고 하기에 와인 몇 잔 갖다놓고 쟁그랑거릴 줄 알았다. 그런데 무대 위에선 3인조 밴드가 재즈를 감칠맛 나게 연주를 하고 사회를 맡은 여성은 오스카 시상식에서나 볼 법한 빨간 파티복을 입고 있었다. 멋모르고 반바지에 ‘쓰레빠’ 차림으로 왔다가는 보기 좋게 망신당할 뻔했다. 다행히 내 유일한 파티복인 디젤 청바지와 아르마니 익스체인지 프린트 티셔츠를 입고 왔다. 꼼꼼한 호텔 매니저는 빈 보드를 넉 장이나 이젤 위에 걸쳐두었다. 그러고는 ‘나 잘했지?’ 하며 찰톤 헤스톤 닮은 미소를 지었다. 난 돈만 주면 백 장이라도 그리겠다는 눈빛으로 가볍게 쏘아주었다.
몸도 풀 겸 물고기부터 그렸다. 럭비 하는 로봇도 그렸다. 말없이 그림만 그리는 게 심심할지도 모른다고 느꼈는지 사회자는 눈치 없이 자꾸 영어로 물어보았다. 도미니크는 무슨 사회부 기자처럼 플래시를 터뜨리며 셔터를 눌러댔다. 그림 그리랴, 사람 좋은 미소 지으랴, 영어로 묻는 말에 대답하랴, 자세 잡으랴, 명함 챙기랴, 혼자서 식은땀 꽤 흘렸다. 불현듯 위 피디가 보고 싶었다. 이럴 때 따라왔어야지, 뭐 하냐.
로봇을 다 그리고 뭘 그릴까 잠깐 고민하다 재즈를 연주하는 밴드를 그렸다. 음표가 날아다니고 드럼이 파닥거렸다. 한창 그리고 있는데 밴드 리더인 페르난데스가 무대에서 슬그머니 내려왔다. 완성될 때까지 지켜보다가 이 그림을 밴드 티셔츠에 써도 되냐며 영어로 더듬더듬 물어보았다. 왜 안 되겠어, 오케이! 그러자 뛸 듯이 기뻐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제 CD를 꺼내더니 선물로 주었다. 사인과 함께 영혼에 관한 멋진 문구도 적어주었다.
로비에는 우리나라 관광객도 꽤 있었다. 심심한 동네에선 작은 소란도 큰 구경거리가 된다. 시끌시끌하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로비로 내려온 것이다. 달리 할 일도 없었던지라 맥주 한 잔을 아껴 마시며 행사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조용히 다가와서 “좋은 일 하십니다” “멋지십니다”라며 토닥여주었다.
모임에 참석했던 크리스티앙과 프랑수아가 뉴칼레도니아에도 밤 문화가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며 나섰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크리스티앙은 페이스북을 활용하여 ‘전 세계인을 고객’으로 라이프 코치를 했다. 프랑수아는 그녀의 친구로, 페이스북으로 만났다. “누메아에서 굳이 페이스북으로……”라고 물어보자 누메아가 그 정도로 작지는 않다고 대꾸했다. 그는 누메아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는 대부분 그에게 현상과 인화를 맡긴다고 하였다.
새로 생긴 프랑스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 한 병과 늦은 저녁을 주문했다. 살짝 익힌 오리고기는 일품이었다. 마리오 형제처럼 생긴 프랑수아는 나이프를 아주 잘 다뤘다. 윙윙 도는 절단기에서 삼겹살이 썰려 나오듯 오리고기가 예리하게 잘려나갔다. 능숙한 칼질을 보니 더 맛있어 보였다.
오리고기를 씹는 내내 그들은 자기 집에 초대한 손님처럼 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여기는 우리가 초대했으니 돈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프랑수아는 확인이라도 하듯 주인장이 준 영수증을 세로로 찢더니 한쪽은 크리스티앙에게 건네주었다. 영어를 할 줄 모른다던 프랑수아도 와인을 마시고 나선 곧잘 했다. 왜 영어를 못한다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역시 듣던 대로였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게 아니야. 그냥 안 하는 것뿐이지.”
“영국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하지도 않아. 그런데 왜 내가 먼저 영어로 말해야 하는 거지?”
“넌 한국 사람이니까 괜찮아. 너한테 영어는 외국어잖아.”
프랑스에서 왜 여기로 왔는지 물어보았다. 크리스티앙만큼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영어로 대답해주었다.
“난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고 전 세계를 일곱 번이나 일주했지.”
“나쁜 와인을 마셔봐야 좋은 와인을 알 수 있어. 뉴칼레도니아는 그런 곳이야. 내겐 좋은 와인과 같아. 여름과 봄, 봄과 여름, 또다시 여름과 봄. 그게 뉴칼레도니아야!”
영어와 프랑스어를 오가며 와인과 맥주를 마셨다. 늦은 저녁이지만 디저트까지 꼼꼼하게 챙겨 먹었다. 서울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뉴칼레도니아식 밤 문화도 괜찮았다. 프랑수아는 수표책을 꺼냈고 크리스티앙은 신용카드를 꺼냈다. 20만 원이 넘는 저녁 값을 반반씩 계산하였다. 돌아가서도 메일로 안부를 묻자고 했다. 크리스티앙과 프랑스식 인사법인 비주로 작별 인사를 했다. 프랑수아는 호텔까지 날 데려다 주었다.
이상하게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듯 여행도 그렇다. 사람 사이에만 인연이 있는 게 아니다. 사람과 장소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 완주가 그랬고 뉴칼레도니아가 그랬다.
뉴칼레도니아는 2009년에 처음 갔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갔는데 그때만 해도 뉴칼레도니아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충격이었다. 뉴칼레도니아는 날개가 없어도 갈 수 있는 천국이었다. 그 천국에서 같이 갔던 관광청 직원과도 친구가 되었다. 올해 또다시 엿새간 뉴칼레도니아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관광청에 근무하는 실장이 꼼꼼하게 여행 계획을 짜주었다. 거짓말 하나 섞이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 호탕한 목소리로 지도에 큼지막하게 동그라미까지 쳐가며 여행 일정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뉴칼레도니아 국내 항공사가 파업 중이라 미리 세운 계획이 쓸모없게 될 수도 있었다.
이번 여행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꽃보다 밥장이 되어 누메아 해변 도로를 자전거로 돌아볼지, 멋진 석양을 바라보면서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릴지, 호텔 수영장에 누워 넘버원 맥주나 마시며 그림을 그릴지. 일단 떠나봐야 알 수 있었다.
밤하늘에는 남십자성이 반짝거리고
르메르디앙 호텔에 도착해서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돌렸다. 8월의 뉴칼레도니아는 겨울이었다. 그저 밤에 긴팔을 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눈사람이나 제설 차량이 있는 건 아니었다.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닦으니 옅은 바다 냄새가 났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선풍기 날개는 느긋하지만 정확하게 돌았다. 어디를 가볼까. 앙스바타 해변을 따라가다 시트롱 해변을 거쳐 누메아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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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바타와 시트롱 해변 사이에 있는 수족관에 들렀다. 수족관은 아담했지만 깜짝 놀랄 만한 물고기와 산호들이 반짝거렸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걸으면 마치 잠수복을 입고 스쿠버를 하는 것처럼 이내 서늘해졌다. 화이트 노이즈처럼 프랑스어가 떠다녔다. 양탄자가 깔린 계단에 앉아 커다란 유리벽 너머로 물고기들이 뻐금거리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수족관에서 나와 시트롱 해변으로 향하려다 돌아오는 길을 위해 남겨두었다. 조금 더 걸으니 ‘고아들의 만’에 다다랐다. 이름에서 풍기는 애처로운 분위기와 달리 한눈에 봐도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지하 주차장처럼 집에서 내려와 바로 요트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고, 바다를 향한 베란다에서는 메이드가 빨래를 널거나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가볍게 미소를 띠었다. 뉴칼레도니아에선 길을 걷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호흡을 하듯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몸이 스칠까 봐 살짝 비켜주기만 해도 “메르시Merci, 고맙습니다”가 자동으로 나왔다. 뭐가 그리 고마운지 늘 고마운 사람들뿐이었다. 하기야 반짝이는 햇살만 봐도 고마웠다. 비린내 없는 깨끗한 바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누메아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면 메인 요리인 프랑스식 오리구이를 놔둔 채 바게트로 배를 채우는 것과 다름없다. 시내보다 시내까지 가는 길이 진짜였다. 시내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베이커리에 들러 마카롱을 몇 개 사고 시장에서 베트남식 국수 요리를 먹었다.
누메아까지 걸어오면서 카메라를 든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예쁜 곳이 적을수록 예쁘게 찍는 게 기술이 된다. 좋은 렌즈와 디지털카메라는 평범한 곳을 마법처럼 빛나게 도와준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수평, 수직만 맞춰 아무 데나 찍어도 그대로 달력 사진이 되었다. 그래서 카메라가 필요 없는 게 아닐까. 천국에서는 마법의 렌즈나 포토샵이 필요 없는 법이다. 완벽한 세계니까 보이는 대로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서울살이에 지치고 주말이면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인 나는 게걸스럽게 셔터를 눌러댔다.
보드카처럼 맑은 바다, 우연한 만남
걸어서 이십 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크기, 에어컨 광고에서 흔히 보는 하얀 바닷가, 까무잡잡한 직원들이 익숙하게 차려주는 점심 뷔페. 아메데는 괌에서 코코섬으로 놀러 갔을 때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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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칼레도니아에서 이곳만큼 많은 관광객을 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바다는 보드카처럼 맑았다. 아메데 섬에서 배병우 사진작가를 만났다. 뉴칼레도니아 바다를 찍기 위해 왔다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여기 바다가 두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다. 10월에 뉴칼레도니아 바다를 주제로 전시를 한단다. 그는 화면에서 본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나이 든 어르신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난 체, 했던 말 또 하기, 왕년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알게 된 사실. 유도 선수 출신에 허영만 작가처럼 여수가 고향,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 중. 내 그림이 피터 막스와 닮았다고 짚어주며 앞으로는 시사적인 이야기나 정치적인 메시지도 그림에 담아보라고 조언해주었다.
아메데 등대에 올랐다. 나폴레옹 3세 때 지은 오래된 등대로 묵직한 철제 빔과 꼼꼼하게 박힌 볼트에는 하얀 페인트를 두껍게 덧칠했다. 행여 미끄러질까 봐 반질반질한 나선형 나무 계단을 또박또박 올랐다. 꼭대기에 오르니 철문이 밀릴 만큼 바람이 거셌다. 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커다란 바다 괴물의 등이었다는 이야기, 바다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등대 꼭대기의 난간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니 왜 그런 상상을 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섬은 마치 개울에 반쯤 잠긴 조약돌처럼 튀어나와 보였다. 물 아래 잠긴 거대한 산호초가 저 멀리 수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섬이 산호 괴물의 등껍질이라면 하얀 모래는 괴물의 각질인가.
아메데 섬까지 데려다 준 배는 부지런해서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다. 손님들을 데려다 주고서 점심 먹기 전에 다시 태웠다. 식욕을 돋워주려는지 상어가 사는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승무원은 바다에 바게트 조각을 던졌다. 깨끗한 물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올라왔다. 상어였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처럼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다시 섬으로 돌아와 승무원이 준비한 뷔페를 먹었다. 한쪽에서는 고기를 굽고 또 한쪽에서는 과일을 나눠주었다. 승무원이 정해준 동선을 따라 순서대로 챙겨 먹었다. 바게트를 던져주던 승무원은 어느새 배가 훤히 드러나는 원주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림, 내가 남기는 흔적
‘친구를 만들려면 먼저 들이대라.’ 이 방법은 뉴칼레도니아에서도 통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시원시원한 뉴칼레도니아 관광청 실장에게 먼저 물었다. 실장은 황당할 수도 있는 부탁을 끝까지 들어주며 르메르디앙 호텔 매니저와 진지하게 상의를 했다. 알고 보니 르메르디앙 누메아 호텔에서는 오래전부터 아티스트들이 모임을 하고 있었다. 뉴칼레도니아에 사는 아티스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데 운 좋게 여행 기간과 모임 날짜가 딱 맞았다. 관광청 실장과 호텔 매니저가 힘써주어서 그 달 아티스트 모임에 호스트로 초대되었다.
호텔 로비에는 며칠 전부터 행사가 있다는 푯말이 세워졌다. ‘Chang SukWon’이란 여권용 이름 위에 빨간 털모자를 쓰고 꿈붕어를 그리고 있는 내 사진이 붙어 있었다. 로비를 지나가다 내 뒷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일이 너무 커진 게 아닌가 싶었다.
아티스트 모임이라고 하기에 와인 몇 잔 갖다놓고 쟁그랑거릴 줄 알았다. 그런데 무대 위에선 3인조 밴드가 재즈를 감칠맛 나게 연주를 하고 사회를 맡은 여성은 오스카 시상식에서나 볼 법한 빨간 파티복을 입고 있었다. 멋모르고 반바지에 ‘쓰레빠’ 차림으로 왔다가는 보기 좋게 망신당할 뻔했다. 다행히 내 유일한 파티복인 디젤 청바지와 아르마니 익스체인지 프린트 티셔츠를 입고 왔다. 꼼꼼한 호텔 매니저는 빈 보드를 넉 장이나 이젤 위에 걸쳐두었다. 그러고는 ‘나 잘했지?’ 하며 찰톤 헤스톤 닮은 미소를 지었다. 난 돈만 주면 백 장이라도 그리겠다는 눈빛으로 가볍게 쏘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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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풀 겸 물고기부터 그렸다. 럭비 하는 로봇도 그렸다. 말없이 그림만 그리는 게 심심할지도 모른다고 느꼈는지 사회자는 눈치 없이 자꾸 영어로 물어보았다. 도미니크는 무슨 사회부 기자처럼 플래시를 터뜨리며 셔터를 눌러댔다. 그림 그리랴, 사람 좋은 미소 지으랴, 영어로 묻는 말에 대답하랴, 자세 잡으랴, 명함 챙기랴, 혼자서 식은땀 꽤 흘렸다. 불현듯 위 피디가 보고 싶었다. 이럴 때 따라왔어야지, 뭐 하냐.
로봇을 다 그리고 뭘 그릴까 잠깐 고민하다 재즈를 연주하는 밴드를 그렸다. 음표가 날아다니고 드럼이 파닥거렸다. 한창 그리고 있는데 밴드 리더인 페르난데스가 무대에서 슬그머니 내려왔다. 완성될 때까지 지켜보다가 이 그림을 밴드 티셔츠에 써도 되냐며 영어로 더듬더듬 물어보았다. 왜 안 되겠어, 오케이! 그러자 뛸 듯이 기뻐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제 CD를 꺼내더니 선물로 주었다. 사인과 함께 영혼에 관한 멋진 문구도 적어주었다.
로비에는 우리나라 관광객도 꽤 있었다. 심심한 동네에선 작은 소란도 큰 구경거리가 된다. 시끌시끌하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로비로 내려온 것이다. 달리 할 일도 없었던지라 맥주 한 잔을 아껴 마시며 행사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조용히 다가와서 “좋은 일 하십니다” “멋지십니다”라며 토닥여주었다.
모임에 참석했던 크리스티앙과 프랑수아가 뉴칼레도니아에도 밤 문화가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며 나섰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크리스티앙은 페이스북을 활용하여 ‘전 세계인을 고객’으로 라이프 코치를 했다. 프랑수아는 그녀의 친구로, 페이스북으로 만났다. “누메아에서 굳이 페이스북으로……”라고 물어보자 누메아가 그 정도로 작지는 않다고 대꾸했다. 그는 누메아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는 대부분 그에게 현상과 인화를 맡긴다고 하였다.
새로 생긴 프랑스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 한 병과 늦은 저녁을 주문했다. 살짝 익힌 오리고기는 일품이었다. 마리오 형제처럼 생긴 프랑수아는 나이프를 아주 잘 다뤘다. 윙윙 도는 절단기에서 삼겹살이 썰려 나오듯 오리고기가 예리하게 잘려나갔다. 능숙한 칼질을 보니 더 맛있어 보였다.
오리고기를 씹는 내내 그들은 자기 집에 초대한 손님처럼 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여기는 우리가 초대했으니 돈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프랑수아는 확인이라도 하듯 주인장이 준 영수증을 세로로 찢더니 한쪽은 크리스티앙에게 건네주었다. 영어를 할 줄 모른다던 프랑수아도 와인을 마시고 나선 곧잘 했다. 왜 영어를 못한다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역시 듣던 대로였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게 아니야. 그냥 안 하는 것뿐이지.”
“영국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하지도 않아. 그런데 왜 내가 먼저 영어로 말해야 하는 거지?”
“넌 한국 사람이니까 괜찮아. 너한테 영어는 외국어잖아.”
프랑스에서 왜 여기로 왔는지 물어보았다. 크리스티앙만큼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영어로 대답해주었다.
“난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고 전 세계를 일곱 번이나 일주했지.”
“나쁜 와인을 마셔봐야 좋은 와인을 알 수 있어. 뉴칼레도니아는 그런 곳이야. 내겐 좋은 와인과 같아. 여름과 봄, 봄과 여름, 또다시 여름과 봄. 그게 뉴칼레도니아야!”
영어와 프랑스어를 오가며 와인과 맥주를 마셨다. 늦은 저녁이지만 디저트까지 꼼꼼하게 챙겨 먹었다. 서울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뉴칼레도니아식 밤 문화도 괜찮았다. 프랑수아는 수표책을 꺼냈고 크리스티앙은 신용카드를 꺼냈다. 20만 원이 넘는 저녁 값을 반반씩 계산하였다. 돌아가서도 메일로 안부를 묻자고 했다. 크리스티앙과 프랑스식 인사법인 비주로 작별 인사를 했다. 프랑수아는 호텔까지 날 데려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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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멀리까지 와서 그림을 남기려고 안달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몇 년 전 북경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만리장성 꼭대기까지 가려고 케이블카를 탔는데 케이블카 안에 빅뱅의 태양과 대성 이름이 우리말로 적혀 있었다. 진짜 빅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인증샷도 찍었다. 양산 통도사에 갔을 때도 비슷했다. 절로 가는 길가 바위에 한자로 된 이름들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내 그림은 케이블카와 바위에 새긴 이름이나 다를 바 없다. 왜 그리느냐고? 내가 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기고픈 마음 때문이다. 개가 전봇대에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는 좀 더 세련되고 깔끔한 방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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