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담을 쌓고 있던 이들에게 선뜻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지난 5월 마지막 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출간을 기념한 저자 유홍준 교수의 특별 강연이 있었다. 10년 만에 돌아온 이 시리즈의 저자 유홍준 교수가 독자들을 가장 먼저 안내하는 곳은 경복궁이다. 왜, 경복궁일까. 책 머리말에서 저자는
“경복궁에는 문화재청장의 경험이 담겼(p.6)”기 때문이라고 소개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로마나 파리에 관광을 갔다고 생각해보죠. 제일 먼저 찾는 곳에는 항상 ‘건축물’이 있습니다. 그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사상과 문학, 정치 그리고 경제는 땅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죠. 당시의 문화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게 건축입니다. 특히 그 왕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사상과 문화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건물이 바로, 왕궁입니다.”
각국의 왕궁을 보면 그 나라, 그 시대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모든 왕궁은 그 시대, 그 나라의 최고 기술과 최고 재료, 동원 가능한 재력의 소산”이며
“건축의 모습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그래서 우리는 왕궁을 찾는다. 광활한 평지에 세워진 중국의 자금성은 그 자체가 성곽이고 베르사유궁은 평온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렇다며 경복궁은 어떨까? 저자는
“우리나라 건축의 중요한 특징인 주변 환경, 즉 자연과의 어울림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는 왕궁이 경복궁”이라고 말한다.
“주변의 경관을 자신의 경관으로 끌어안는 차경의 미학을 경복궁처럼 훌륭히 이루어낸 건축은 세계에서 드물다”며,
“경복궁은 어느 곳에서 보아도 북악산과 인왕산을 볼 수 있”는 자연과의 조화가 뛰어난 건축물이라고 소개한다.
주변 자연과의 어우러짐 뿐만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법궁답게 근정전을 궁궐의 심장으로 삼은 다음 그 북쪽에 정사를 보는 편전인 사정전을 두고 그 뒤로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두는 남북 일직선상의 정연한 배치가 눈에 띌 것입니다.” 이제 궁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근정전의 위엄
경복궁 건축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근정전”이다. 근정전은 임금의 즉위식과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이었다. 근정전 건물의 진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당시 신하나 외국 사신이 여기로 들어오는 동선을 생각하면 된다.
궁궐의 얼굴인 광화문으로 들어와 홍례문에 다다르고 여기에서 금천을 가로지르는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에 이르면 홀연히 늠름하면서도 아름다운 근정전이 엄습하듯 다가온다. 근정문을 들어서 근정전으로 다가가면 배경으로 우뚝한 북악산과 인왕산이 발걸음을 이동할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움직이는 영상처럼 따라온다.(p.28)
저자는 간혹 자신이 직접 경복궁을 안내할 기회가 생기면,
“근정전에 들어서 답사객들을 근정문 행각 오른쪽 모서리로 모이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근정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모서리에 서면 북악산과 인왕산을 양옆에 끼고 듬직한 월대 위에 한껏 날개를 편 근정전 팔작지붕이 아름답고 품위 있게 보입니다. 마음 같아선 그 언저리에 ‘사진 잘 나오는 곳’이라는 푯말이라도 하나 세워놓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근정전 앞마당인 전정에 깔린 박석이 그 주인공이다.
“박석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조화를 꾀했던 우리나라 건축에 걸맞은 훌륭한 바닥재”로 쓰였다. 근정전 앞에는 불규칙하게 생긴 넓적한 박석이 촘촘히 붙어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선이 근정전 처마의 가녀린 곡선과 환상적으로 어울린다”는 것. 그리고 박석의 모양과 근정전 처마의 선이 북악산과 인왕산의 능선과도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저자는 근정전 앞마당과 종묘 정전 월대의 박석을 보면서 마감을 깔끔하게 하지 않는
“우리 건축의 폐단”이라며 불만을 표출하는 답사객을 종종 본다고 한다. 그런 답사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창덕궁의 인정전인데,
“대신 화강석을 반듯하게 다듬어서 포장한 그곳을 보면 인공적인 직선들이 얼마나 눈에 거슬리고 멋이 없는지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창덕궁 인정전의 전정은 일제시대 잔디를 입혔던 것을 1970년대에 걷어내고 지금의 화강석을 깔아놓은 것.
박석은 포장돌의 기능으로 보아도 매우 훌륭한 고급재료다. 잘 깨지지 않고, 미끄러짐도 방지해준다. 저자가 주목한 박석의 장점은 또 있다. 박석은 빛깔이 회색 또는 잿빛인데다 햇빛을 난반사하는 효과도 있어서 태양빛이 강렬한 여름날에도 눈부심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박석의 가장 훌륭한 기능은 비오는 날 발휘된다. 저자는 이와 관련된 사례를 이야기했다.
“문화재청장으로 부임할 당시 초도순시를 나가 경복궁 관리소장에게 격 없이 물은 적이 있어요. 소장님, 경복궁은 언제가 가장 아름답습니까? 그분이 지체없이 이렇게 대답했죠. 비 오는 날 꼭 근정전으로 와 박석 마당을 보십시오. 특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여기에 와보면 빗물이 박석 이음새를 따라 제 길을 찾아가는 그 동선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물길은 마냥 구불구불해서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하수구로 급하게 몰리지 않습니다. 옛날 분들의 슬기를 우리는 못 당합니다.”
저자는 근정전 앞마당의 배수시스템은 뒤쪽(북쪽)을 앞쪽(남쪽)보다 70센티미터 정도 높여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울기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박석의 이음새가 그리 훌륭한 물길이 되어줄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강연회에 참가한 모든 독자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면 꼭 한 번 근정전을 찾을 것을 권했다.
경복궁 건축미학의 극치, 경회루
경회루는 경복궁 건축의 꽃으로 불린다. 경회루는 근정전, 종묘 정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단일평면으로는 가장 크다.
연못의 크기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이고, 48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진 이 층 누각은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으로 남북 33미터, 동서 29미터다. 누마루의 넓이는 298평이나 되어 300명이 올라가도 한 평에 한 사람이 서 있는 셈이어서 공간에 여유가 있다. 기록상으로는 1,200명이 모였던 적이 있으니 그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p.79)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베풀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경회루는 오랫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2005년 6월 1일은 그동안 출입 금지했던 경회루를 44년 만에 일반에게 개방하던 날이다. 저자는 이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학생들의 축하공연을 요청하여 경회루에서 아악곡 ‘수체천’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분합문을 모두 들어 올려 개방한 상태였는데 소리의 퍼짐과 울림이 아주 장엄하여 그 어떤 공연시설이나 스피커를 통해서는 들을 수 없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소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며, 경회루가 얼마나 뛰어난 건축물인지를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경회루 건축의 뛰어난 이유 중 하나는 인공방지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경회루는 밖에서 보면 누각이 못에 어른거리면서 더욱 아름답게 비치며 누각 안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면 땅과 거리감이 생겨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 곳에 가장 경이로운 부분은 연못 물의 순환시스템이다. 강제 순환장치 없이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연못 전체를 돌아 나감으로써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이러한 순환시스템의 원리를 접하고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전통적으로 연못에 물을 넣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현폭 기법이다, 또 하나는 연못의 수면과 평면을 이루어 자연스럽게 흘러들게 하는 자일 기법이며, 또 하나는 연못 밑으로 잠겨 넣는 잠류 기법이다. 경회루 연못에는 이 세 가지 기법이 모두 적용되었다. 한때 경회루 연못 청소를 위해 물을 다 뽑아낸 적이 있다. 이때 경회루 밑바닥은 수평이 아니라 입수구가 있는 북동쪽이 약간 높고 출수구가 있는 남서쪽은 약간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약간의 기울기는 물의 흐름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p.82)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연못 전체를 순환시키는 것이 아닐 만큼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이곳 물의 순환시스템은 오늘날에도 많은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경회루 연못은 맑은 물을 유지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강제 순환시키는 일 없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건원궁과 복원사업과 춘양목
궁 속의 궁인 건청궁은 고종이 기거하기 위해 별도로 세운 건물이다. 즉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살림공간이다. 1895년 건천궁 곤녕합에서 명성화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건청궁은 1909년 일제가 헐어버렸다. 자신들의 범행 자취를 지우려고 한 것이다.
건원궁 복원공사는 2004년 6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마침 내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한 기간에 공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어느 문화재 복원보다도 건청궁에 마음을 많이 썼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한옥 건축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p.110)
한옥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나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앞으로
“전통 목조건축 복원에 사용할 춘양목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춘양목이라 불리는 목재는 금강송으로, 고성, 울진, 삼척, 봉화 등 태백산맥 줄기에 자라는 소나무다. 광화문과 숭례문 복원에서 어렵게 금강송을 구해 복원하였지만, 대들보는 구하지 못해 캐나다에서 수입해왔다는 것. 경주 황룡사를 복원하는 데 필요한 목재는 4톤 트럭으로 무려 2,400대분이라고 한다.
저자는 산림청의 금강송을 문화재청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리고 울진 소광리 통고산 휴양림이 있는 곳에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150만 평의 솔밭이 있음을 확인하고 산림청을 찾아갔다고 한다. 150년을 넘나들 업무협약(MOU)의 시작이었다. 2004년 11월 11일,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서 산림청과 문화재청 사이에 업무협약식이 이루어졌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이 협약서에 같이 서명했고 이의근 경상북도 지사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현장에 금강송 보호비도 세웠어요. 옛날에는 봉산비, 금송비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 있는 소나무를 베면 곤장 몇 대에 처함이라는 경고문을 세운 예에 따른 것이죠. 이듬해에는 업무협약서를 타임캡슐에 넣어 묻고 무쇠뚜껑에 개봉일자를 2155년 11월 11일이라고 새겨두었습니다.”
협약문의 내용은 이렇다.
‘산림청과 문화재청은 후손들이 전통 목조건축을 수리하고 복원하는 데 사용할 금강송 보호림을 조성하는 데 합의하고 국무총리 입회하에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 150만 평의 금강송 솔밭은 향후 150년간 어떤 이유로도 벨 수 없다는 업무협약을 맺으며 이에 관한 일체의 자료를 여기 타임캡슐에 담아 후손들에게 알려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