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우X정희원 칼럼] 조금 특별한 퇴근길
이동에 몸을 쓰지 않으면 이동성을 잃고, 잃어버린 이동성은 자립에서 멀어진 삶을 만든다. 이동성을 잃어버린 어떤 퇴근길, 그렇게 날은 저물어갔다.
글ㆍ사진 정희원(노년내과 의사)
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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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 시대, 도시의 이동을 탐구하는 교통, 철학 연구자 전현우와
도시인의 이동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크로스 에세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언스플래쉬

오늘은 좀 특별한 퇴근길이다. 풍납동의 병원을 오후 다섯시 반에 떠나 남쪽을 향한 지 세 시간째다. 여기는 중부 고속 도로가 경부 고속 도로와 만나기까지 7km를 남겨놓은 곳이다. 생산된 지 8년이 되며 중년을 맞고 있는 현대 쏘나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스피커에서는 글리에르의 호른을 위한 네 개의 작품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출발한 지로부터 지금까지의 평균 속력을 계산하면 시속 30킬로미터 정도가 된다. 석가 탄신일 연휴를 앞둔 5월의 금요일 저녁.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조건은 다 갖춘 시각에 나는 왜 중부 고속 도로에 갇혀 있는 것일까?


고달프지만 어쨌든 이동해야 한다

양방향이 모두 꽉 막혀 있는 모습이, 퇴근길 러시아워의 한남 대교 근처 올림픽 대로를 떠올린다. 앞으로 가득 쌓인 브레이크등을 바라보며, 먼저 중부 고속 도로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전에서 박사를 하던 시절, 거의 매주 주말이면 아들과 아내가 있는 수도권의 집으로 갔다. 첫 번째 선택지는 기차,(고속철도와 새마을, 무궁화 등) 두 번째 선택지는 버스, 세 번째 선택지는 자동차였다. 물론 기차가 가장 편리하고 친환경적이지만, 금요일 저녁 상행 표를 구하는 일은 눈치가 없고 준비에 치밀하지 못한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버스는 기차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퇴근시간의 서울행 표는 역시나 귀했다. 

그러던 중, 2016년 여름 나는 전기차(현대 아이오닉 EV)를 구입했는데, 이때부터는 금요일 저녁의 온갖 고속도로와 국도를 전전하는 일이 시작된다. 그중 중부 고속 도로는 다음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는 사실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다. 중부를 타면 전기차 충전을 무료로 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중부 고속 도로 상의 휴게소들에는 아주 오래된 한국 전력 전기차 급속 충전기가 있었는데, 2017년 초까지는 무료였다. 당시에는 전기차 충전기가 설치된 휴게소도 드물었지만, 차량 대수 자체가 매우 적어 급속 충전을 하기는 지금보다 오히려 더 쉬웠다는 기억도 있다. 무료 충전의 놀라운 이점으로, 상당한 거리를 돌아가는 동선이었음에도 경부 고속 도로 대신 중부 고속 도로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충전비도 무료가 아니거니와, 나의 아이오닉 EV는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표준이 아니게 되어 버린 '차데모'라는 충전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이제는 고속 도로를 달리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새로 생긴 충전기들은 대부분 차데모 소켓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아... 옛날이여! 

그러면서 느낀 두 번째와 세 번째 중부 고속 도로의 특징은 주요 구간이 왕복 4차선이라는 사실과, 고저의 기복이 많다는 지형적 특성에 기인한다. 두 번째는, 주로 오르막이 시작되는 시점에 시속 61킬로미터인 트럭이 (조금 더 과적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시속 60... 59... 58킬로미터로 느려지는 트럭을 추월하기 위해 1차선으로 급하게 차선 변경을 시도하면서 벌어지는 도미노 현상이다. 이 결과로 바로 뒤 차량부터 연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하면서, 감속의 파동이 생기며 지, 정체 구간이 생성된다. 흔히 유령 체증(Phantom jam)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그래서 고갯길이 하나 나올 때마다 정체 구간이 하나씩 생긴다. 정체 구간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예상 도착시간은 하염없이 늘어진다.


몸의 이동성을 빼앗긴 우리의 이동

마지막 세 번째 특징은 '차랑 더미' 형성 현상이다. 고갯길도 아니고 저속 차량이 추월을 시도하는 경우도 아니고, 교통량이 많은 것도 아닌데, 평균 통행 속도가 슬슬 느려지는 현상인데, 내비게이션에서도 교통 정체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인 경우다. 이 경우 좌우로 조금씩 추월을 시도하며 '차량 더미' 앞으로 빠져나가면 그 앞에는 길게는 1km 이상씩 차가 한 대도 없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원인은 느리게 1차선에서 정속 주행하는 차 한 대가 길을 꼭 막고 있는 것이다. 원인이 되는 차량으로는 체감상 모 회사에서 과거에 판매하던 CVT(연속 가변 변속기)를 탑재한 차량들이 많았다. 아무튼 이런 특징들 때문에 중부 고속 도로는 특히나 웬만하면 심하게 막힐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체들이 합쳐지면 전 구간이 내비게이션에서 보이는 '빨간 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빨간 길'은 이동의 고달픔을 배가시킨다. 오늘도 나는 이동해야 하지만 또한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 차는 정체에 묶이고, 몸은 좁은 공간에 묶인다. 움직이도록 설계된 사람은,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묶여 있으면 좋지 않은 변화들을 경험한다. 다리가 부어오르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의 근력과 이동성(mobility)을 장기간 사용하지 못하면 점차 건강을 잃고 관절은 굳어가게 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작은 대응책도 하나 있다. 23년간 운전을 했고,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 호른을 연습하며 배운 스킬 하나는 이 '빨간 길'에서 마우스피스를 입술에 대고 곡 연습을 하는 것이다. 많은 호른 연주자들은 운전하는 두뇌와 마우스피스로 곡을 연주하는 두뇌가 잘 분리되어서, 정체 구간에서의 연습이 아주 편리하다고 느낀다. 스피커에서는 연습해야 할 곡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면 장거리 운전에서 몸이 굳는 느낌은 훨씬 나았다.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간다. 많은 이들이 이동의 문제로 고통받고, 아프고, 건강을 잃어가기도 한다. 나와 함께 이 길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도, 이 고통이 즐거워서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수렵-채취 사회의 사람 역시 먹고살기 위한 기본적인 활동을 위해 하루에 많게는 15km 이상도 걷거나 뛰었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들에게 이동은 휴식을 제외하면 삶의 거의 전부였다. 

살기 위해서 이동하는 것은 현대인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음날 아침과 저녁에 이어서 생긴 학회 발표로 광주에 가는 길이다. 기차표 예매를 시도하여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황금연휴 주말의 광주행 왕복 기차표는 인기 강좌 수강 신청과 비슷한 자세로, 1개월 전에 최선을 다해 시도해야 구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강의를 부탁받은 것은 고작 2주 전이다. 퇴근 후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동선이 마땅치 않은 상황.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도상 훈련해 본 결과, 풍납동 병원에서 광주의 목적지 까지는 차량 외의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렇게 중부 고속 도로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어디론가 이동하지만 우리 몸은 대개는 짧은 거리는 만원인 대중교통에 낀 채로, 긴 거리는 의자에 부착된 채 정지된 상태를 유지한 채다. 그 결과의 누적은 우리 몸이 진화된 바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동성이다. 어깨와 엉덩이 관절은 굳어가고 엉덩이 근육은 위축되며 다리 근육들은 짧아진다. 이동은 몸에 더 편안하게 바뀌었지만, 해가 갈수록 사람들은 더 이른 시기에 비만, 고지혈증 등 만성 질환을 앓게 된다. 

이동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동의 편리함을 대가로 매우 비싼 집값을 치르기도 하고, 이동은 선거 결과를 좌우하기도 한다. 사람의 이동을 좌우하는 것은 이동성이다. 이동에 몸을 쓰지 않으면 이동성을 잃고, 잃어버린 이동성은 자립에서 멀어진 삶을 만든다. 이동성을 잃어버린 어떤 퇴근길, 그렇게 날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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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원(노년내과 의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전문의를 취득했다. 현재는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의과대학 시절, 호른을 연습하던 중 근육 유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근감소증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이후 내과 실습을 돌며 노인의학에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내과 전공의 시절 노쇠에 대해 연구하다가 공부에 대한 갈증이 생겨 의과학대학원에 들어가 이학박사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