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식물탐색]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드는 일
허태임의 식물탐색 9화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모자라거나 부족한 생명체다. 그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힘은 절대적인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 (2023.03.14)
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
아직도 폴더폰 쓰는 사람이 다 있냐고, 그 구식 기기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나를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곤 했다. 나는 2005년 대학 입학과 함께 휴대 전화를 처음 개통한 후 15년이 넘도록 폴더폰을 쓴 적이 있다. 스마트폰이 나오고 나서도 '스마트한' 그 세계로 곧장 진입하지 못했다. 휴대 전화 자체가 없던 시절을 더 길게 살았던 나는 폴더폰이 불편하지 않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어느샌가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더 많아진 세상이 되었다. 내게도 운명의 시간은 찾아왔다. 2G 서비스가 종료되면서 이제 더는 기존 폴더폰을 쓸 수 없으니 보조금을 지원해줄 때 스마트폰으로 바꾸라는 이동 통신 회사의 통보였다. 나의 뜻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나는 과거의 내 휴대용 전화기에 작별을 고하고 지금의 스마트폰을 들이게 되었다. 재작년의 일이다.
"제가 아직 2G폰 쓰거든요."
이제는 이게 안 통한다.
"아니, 스마트폰 바꿨다면서 톡은 왜 안 해요?"
그래서 이제는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단톡방에 들어오지 않으니 불편하다고 따지듯이 묻는 사람들에게.
오프라인에서 이미 수많은 관계 속에 있잖아요, 우리가. 그런데 온라인에서 또다시 더 많은 관계 속에 얽매여야 한다는 게 저한테는 너무 버거운 일이라서요. 무엇보다 휴대 전화 확인을 잘 안 하는 게 몸에 배서 제게는 낯선 그 '톡'을 시작한다는 게 도저히 엄두가 안 나네요.
나는 평소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하는 일에 비교적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사적인 일이든 업무와 관련된 일이든 성심을 다해 상대를 마주한다. 상대방에 대해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 삶의 중요한 루틴 중 하나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에서 추가로 누군가와 연결되는 일에 쓸 에너지가 남아 있을 일이 없다. 그렇게 탕진한 힘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 있어야, 그 틈과 그 사이에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관계를 맺을 기운이 생긴다. 그래서 내게는 그 누가 되었든 얼마간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시간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 권리를 보장받고 싶은 것이다.
그 점에서 아날로그적인 삶이 나랑 좀 잘 맞는다고 하면 허황한 사치처럼 들릴까. 식물이 그걸 지지해 준다는 느낌도 받는다. 일단 식물들은 나한테 휴대 전화에 이거 설치해라, 저거 설치해라 몰아세우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만나자고 강요하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리는 식으로 내가 직접 식물을 찾아가도록 이끈다. 식물은 은근히 밀당의 고수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나는 재래식의 덕을 볼 때가 많다. 인공위성에서 보내는 신호를 수신해서 현재 나의 위치를 계산하는 GPS가 우리 삶 곳곳에서 스며들었다. 식물을 만나러 가는 길도 그렇다. 산 입구까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고 요즘에는 산에서도 GPS와 통신 신호가 얼마나 잘 잡히는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주요 명산에서는 휴대 전화도 빵빵 터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일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각종 지도앱에서 제공하는 정식 등산로에서 길이 표시되지 않은 구간이 주로 내 일터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디지털의 혜택은 딱 거기까지다. 대신에 그때부터 나는 예상 소요 시간을 넘겼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어진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게 된다. 길이 없는 곳에 사는 그 식물들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만드는 게 나의 일이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 점에서 아날로그적인 삶이 나하고 호흡이 맞는다.
식물을 탐구하는 방식에서는 이미 디지털이 큰 비중을 차지한 지 오래고 다양한 앱들도 출현했다. 그걸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결코 전부일 수는 없다. 깊은 산 속에 사는 희귀 식물 서식지의 환경을 구명하기 위하여 나와 동료들은 기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를 그 험지에 설치한다. 접근이 워낙 어려우니 그런 방식으로 편리를 꾀하는 것인데, 정확한 양질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곳을 직접 방문해야만 한다. 산악의 모진 기후에 장비가 훼손되지 않도록 다듬어야 하고 저장 용량 한도를 염두에 두고 넘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추출해야 한다. 그렇게 대면해서 얻은 자료는 실제 기상청 데이터와 일일이 맞추어 보며 오류가 난 구간은 없는지 수작업을 거친다. 그리고 나서야 슈퍼컴퓨터를 온전히 믿고 분석 프로그램을 작동할 수 있다. 분석 결과를 얻고 나면 다시 희귀 식물 서식지를 한동안 모니터링하는 방식으로 검증 과정을 거친다. 그 일련의 과정은 사계절을 여러 번 통과해서 최소 몇 번의 반복 작업이 이루어진 후에 한 편의 보고서나 논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남덕유산 근처 산세가 유독 험한 월봉산을 계절마다 찾는다. 전 세계적으로 최근 부쩍 삶의 영역을 축소하고 있는 침엽수,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만 사는 고유 식물인 구상나무가 거기 살고 있어서다. 지구가 추웠던, 그래서 매머드가 수북한 털을 방한복처럼 두르고 활동했던 시기를 호시절로 여겼던 그 친구들이 지금은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다. 구상나무가 소멸하면 지구상의 한 생물이 멸종한다는 사실에서 세계자연보전연맹은 구상나무를 심각한 멸종 위기종으로 평가한다. 어쩌다가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일종의 단서와도 같은 것을 몇 해째 나는 길이 없는 그곳 구상나무 자생지에서 길을 만들면서 얻는 것이다.
그간에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저울질하며 나는 그 둘의 조화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기도 한다. 식물의 세상에 접근하려면 사람 사는 세상처럼 오프라인을 제대로 알아야 온라인을 똑똑하게 쓸 수 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일을 단 하나로 쉽게 단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동시대의 과학자들이 강조하는 점이기도 하다. 과학이 발전하고 각종 분석 기법이 화려해질수록 그에 비례해서 현장에 대한 해석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기반해법'이 지금의 기후 위기와 새롭게 등장하는 감염병을 해석하는 일에도 긴요하게 쓰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모자라거나 부족한 생명체다. 그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힘은 절대적인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 접목이라고 했던가. 자연에서 과학을 하면서 나는 식물이라는 타자와의 소통, 그 비슷한 걸 배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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